[루키] 이승기 기자 = 2015-16시즌 ‘트와이먼-스톡스 올해의 동료’ 상의 주인공은 빈스 카터였다. 이는 ‘최고의 동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선수들이 직접 꼽은 상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올여름 NBA 사무국이 공개한 카터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 ‘트와이먼-스톡스 올해의 동료’ 상이란?

이 상은 코트 안팎에서의 리더십을 갖추고 팀에 헌신하며, 현역 선수들의 멘토이자 롤 모델로서 누구나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300명 이상의 NBA 선수들의 비밀 투표를 통해 선정되며, NBA 레전드 패널들이 선정한 각 컨퍼런스 별 6명, 총 12인의 후보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수상의 영예를 안는다.

트로피의 이름이 ‘트와이먼-스톡스'인 이유가 있다. 1950년대 선수였던 잭 트와이먼과 모리스 스톡스의 눈물 나는 우정을 기리기 위해서다. 

두 선수는 신시내티 로얄스의 동료였다. 그런데 당시는 인종차별이 대단히 심했던 시기였다. 흑인이었던 스톡스는 백인 선수들에게 과격한 반칙을 당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결국 사단이 났다. 스톡스가 경기 도중 머리를 심하게 다치며 전신마비 판정을 받게 된 것. 이때 동료였던 트와이먼이 스톡스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트와이먼은 자신의 연봉을 탈탈 털어 스톡스의 병원비를 마련했다. 또, 돈이 모자라자 ‘투 잡'을 뛰면서까지 병원비를 보탰다. 뿐만 아니라 스톡스가 눈을 감기까지 무려 12년 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이는 친족이라도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트와이먼 역시 이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백인이었던 트와이먼이 흑인이었던 스톡스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그 정도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고 보면 되겠다.

신시내티 로얄스를 계승한 새크라멘토 킹스는 트와이먼의 2번과 스톡스의 12번을 영구결번하며 그들의 우정을 기리기도 했다. 트와이먼과 스톡스의 우정은 농구 팬들의 가슴 속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한편, 이 상은 2013년 처음으로 제정되었으며, 초대 수상자는 천시 빌럽스였다. 2014년에는 셰인 베티에, 2015년에는 팀 던컨이 이 트로피를 들어 올린 바 있다.

 

다음은 빈스 카터의 인터뷰다.

 

Q ‘동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것은 언제였나.

빈스 카터(이하 카터) 고등학교 때였다. 난 4학년 때보다 3학년 때의 평균 득점이 더 높았다. 또, 몇몇 블로그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 사람들이 “오, 카터는 우리가 생각했던 스코어러는 아니네”라고 평하더라.

그런데 나는 리바운드와 어시스트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동시에 동료들이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동료의 가치를 깨달은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다. 누가 내게 말해준 건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또, 나는 팀 내의 모든 동료들에게 항상 감사했다. 실력을 떠나서 모두 꿈을 위해 노력하고, 내게도 같은 기회(※ 역주 - 대학에 진학한 것)를 주었기 때문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딘 스미스 감독님께서는 내게 그런 마음(※ 역주 - 동료를 생각하는 것)을 심어주셨다. 난 항상 그 가르침을 간직해왔다.

Q NBA에 입성했을 때, 많은 베테랑 선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존경했던 선배나 닮고 싶었던 마인드가 있다면.

카터 난 운이 좋았다. 데뷔 첫 몇 년 동안 찰스 오클리와 함께 뛸 수 있었다. 오클리는 마이클 조던의 동료였던 선수다. 또, 도미니크 윌킨스와 함께 뛰었던 케빈 윌리스도 우리 팀에 있었다. 래리 버드의 동료였던 디 브라운, 매직 존슨의 동료였던 덕 크리스티, 레지 밀러의 동료였던 안토니오 데이비스도 있었다. 내 주변이 이런 선수들로 가득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내게 미디어를 다루는 법, 매 경기를 준비하는 법 등을 알려줬다.

※ 역주 - 2000-01시즌, 카터는 전설의 센터 하킴 올라주원과 함께 뛰기도 했다. 2001년 여름, 휴스턴 로케츠가 올라주원을 토론토로 트레이드한 덕분이다. 올라주원은 이미 만 39세였지만 평균 22.6분간 코트를 누비며 7.1점 6.0리바운드 1.1어시스트 1.2스틸 1.5블록의 좋은 성적을 냈다. 시즌 종료 후 올라주원은 정든 코트와 작별을 고했다.

Q 멤피스 그리즐리스에서 뛴 지 2년이 흘렀다. 이 팀의 핵심 선수들은 모두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왔다. 그런데 어떻게 2년 만에 이 팀의 리더가 됐는지.

카터 그들이 내가 리더 역할을 맡아주길 원했다. 난 사실 뒤에 앉아 조용히 분석하는 걸 좋아한다. 끼어들어 군림하려 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게 되면서 많은 대화를 하게 됐다. 난 여러 상황에 대해 의견을 공유했고, 언젠가부터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더라.

결국 타이밍의 문제다. 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코칭스태프가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끼어들어서 무엇이든 말하라”고 요구하더라. 그 당시의 동영상들을 보면 내가 코치 뒤에서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난 이들에게 참견하거나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Q 훌륭한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과거의 당신은 화려한 덩크를 터뜨리던 위대한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벤치를 이끌며 팀에 공헌하는 베테랑이 됐다. 지난 몇 년 동안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카터 (생각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난 내게 기회를 줬던 위대한 감독들과 많이 뛰어왔다. 어떻게 하면 아직도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했고, 이제는 그러한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런 것을 깨닫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 쉬워진다. 난 전 세계의 마누 지노빌리나 제이슨 테리 같은 선수들을 지켜봐왔다. 내가 가장 먼저 연구했던 선수는 비니 존슨이었다. 그는 농구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 중 한 명이다. 한 번 깨달음을 얻은 후, 내 경기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효율적으로 뛰기 위해서였다.

※ 역주 - 비니 존슨은 1980년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핵심 멤버로, 역대 최고의 식스맨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마이크로웨이브(Microwav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벤치에서 출격해 순식간에 경기장 분위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존슨은 디트로이트의 리그 2연패(1988-89, 1989-90)에도 큰 역할을 해냈다. 플레이오프에서 클러치샷도 여러 차례 터뜨리는 등 강심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Q 혹시 전성기 때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어린 선수들에게 예전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보여준 적이 있는지.

카터 아직 없다. 그런데 이제 그럴 때가 다가오고 있다. 3, 4년 뒤에는 선수들에게 내 하이라이트 필름을 보여주며 “봐라, 나도 한때는 잘나가던 선수였어. 내가 보증한다.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은 그런 적이 없다.

※ 역주 - 빈스 카터는 2000년대 초반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몇 년 동안 올스타 투표 1위를 독차지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경이로운 운동능력, 신기에 가까운 덩크 묘기, 날카로운 돌파능력과 정교한 점프슛 능력을 바탕으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2000-01시즌에는 평균 27.6점 5.5리바운드 3.9어시스트 1.5스틸 1.1블록을 기록하는 등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Q 플레이오프 커리어를 돌아보면, 각기 다른 팀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다. 가장 파이널 진출에 가깝다고 느낀 순간이 있다면. 또, 향후 2~3년 정도 더 뛰는 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궁금하다.

카터 3년까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도전이 될 것이다.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재미있으니까.

(파이널에 가장 가깝다고 느꼈던 팀은) 올랜도 매직이었다. 우리는 보스턴 셀틱스와의 시리즈에서 6차전 끝에 패했다. 당시로서는 큰 기회였다. 파이널에 올라가 싸우고 싶었다.

난 파이널 무대에서 뛰어본 적이 없다. 일단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나면, 남은 경기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진다(웃음).

동시에, 다 끝나고 나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래도 챔피언에게 졌잖아.” 작년에 우리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졌다. 챔피언에게 패해 영광이다.

※ 역주 - 카터는 2009-10시즌 당시 올랜도에서 뛰었다. 당시 올랜도는 드와이트 하워드와 라샤드 루이스, 카터를 중심으로 정규리그에서 59승 23패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잘나갔다. 1라운드에서 샬럿 밥캐츠(現 호네츠)를 4승 0패로 무찔렀고, 2라운드에서도 애틀랜타 호크스를 4승 0패로 꺾었다. 하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만난 보스턴에게 2승 4패로 무릎을 꿇는 바람에 파이널 진출이 무산되고 말았다.

멤피스는 2015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골든스테이트를 만났으나 2승 4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워리어스는 승승장구하며 파이널에 진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Q ‘올해의 동료'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당신의 반응이 궁금하다.

카터 굉장히 흥분됐다. 시즌 중반쯤, 사람들이 이 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와, 카터 너 후보로 올라갔더라”하고 말이다. 기억난다. 매우 멋진 일이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수상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와, 정말이야?”

말했듯이,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이게 내가 어떤 선수인지 잘 나타내준다. 난 훌륭한 동료가 되어 선수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왔다.

멤피스 선수들을 보라. 이들은 베테랑들이다. 이 리그에 오래 몸담고 있었던 선수들이다. 동료들에게 오랜 기간 고마울 것 같다. 매우 감사하다.

※ 역주 - 빈스 카터의 인터뷰 현장에 있던 셰인 베티에는 “이 상은 동료들이 직접 투표했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동료들로부터 ‘우리는 네가 리그 최고의 동료라고 생각해’라고 인정받은 셈이니까 말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베티에는 2014년 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Q 2001년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해 토론토 랩터스의 질주를 어떻게 봤나.

카터 정말 대단히 놀랍다. 카일 라우리와 더마 드로잔에게 연락도 했었다. 난 SNS처럼 모두가 볼 수 있는 연락 수단은 쓰지 않는다. 그런 건 내 것이 아니다. 난 그냥 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너네 진짜 최고야.” 

라우리와 드로잔은 고개를 빳빳이 세워도 된다. 역사를 바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마저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토론토가 잘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토론토가 승승장구할 거라 생각했다. 토론토의 승리에 관한 기사를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랑스러웠다. 랩터스는 파이널에 오를 수도 있었다. 정말 보기 좋더라. 

내가 뛰던 당시 세웠던 토론토의 기록을 이들이 넘은 것도 참 좋았다. 원래 모든 기록은 깨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올해 많은 역사를 목격했다. 그게 우리가 농구를 보는 이유다.

성장을 거듭해온 젊은 친구들이 역사를 만들고 기록을 깨고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 역주 - 빈스 카터는 토론토 랩터스가 낳은 최고의 스타였다. 1998년 데뷔해 2000년대 초반 토론토를 강팀으로 이끌었다. 2000-01시즌 랩터스는 47승 35패를 기록하며 구단 역대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2015-16시즌 토론토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56승 26패를 올리며 창단 이래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을 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비록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2승 4패로 패하며 짐을 쌌지만, 구단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시즌을 보냈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일러스트 제공 = 홍기훈 일러스트레이터(inc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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