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키드, 마이크 비비

 

[루키] 이승기 기자 = 미국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참사를 겪지 않아도 됐다. 당신이 보지 못한 최고의 드림팀을 소개한다.

 

방심이 부른 대참사

미국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이전 대회에 비하면 지배력이 많이 떨어졌다. 당시 미국 선수들은 경기보다 시드니 관광에 더 열중하는 등 올림픽 정신이 결여된 행태로 비난을 받았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던 미국은 당연히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게 됐다.

결국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미국은 자국에서 열린 2002 세계선수권대회에서 6승 3패 기록, 6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국제대회 58연승 행진도 깨졌다. 당시 미국은 상대를 우습게 여겼다. ‘어차피 우승’이라는 생각에 2군에 가까운 로스터를 꾸렸다. 뿐만 아니라 상대 국가에 대한 전력분석에도 소홀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러한 안일한 생각으로는 우승할 수 없었다. 미국은 세계농구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충 해도 우승’했던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이 독이 된 셈이다.

미국은 자존심에 제대로 상처를 입었다. 세계최강임을 자부했던 농구 종주국임에도, 자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고작 6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제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2003 아메리카선수권대회에서 반드시 3위 안에 들어야 했다. 미국농구협회는 이 대회를 앞두고 스타급 선수들에게 러브콜을 돌리기 시작했다.

1.5군 출격!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NBA 선수들은 국가대표 차출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상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또, 금메달이 당연시 여겨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동기부여도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스타들은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보다는 부상 관리 및 휴식을 더 선호했다.

이에 따라 최정예 멤버의 구성이 쉽지 않았다. 샤킬 오닐과 케빈 가넷, 크리스 웨버, 폴 피어스, 게리 페이튼 등이 대표팀 불참을 선언했고, 합류 의사를 보였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당시 성폭행 혐의로 피소되며 자연스레 하차하게 됐다.

결국 미국은 1군이 아닌 1.5군에 가까운 로스터를 구성하게 됐다. 2003 아메리카선수권대회 당시 미국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센터 저메인 오닐
파워포워드 팀 던컨, 엘튼 브랜드, 케년 마틴, 닉 칼리슨
스몰포워드 트레이시 맥그레디, 리차드 제퍼슨
슈팅가드 알렌 아이버슨, 빈스 카터, 레이 알렌
포인트가드 제이슨 키드, 마이크 비비

한 눈에 봐도 빅맨진이 빈약함을 알 수 있다. 당시 NBA는 센터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저메인 오닐과 팀 던컨을 동시에 선발로 기용하고, 나머지 빅맨들은 로테이션으로 활용했다.

케년 마틴과 리차드 제퍼슨은 신인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이슨 키드와 함께라면 전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들은 당시 뉴저지 네츠(現 브루클린)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을 일궈낸 바 있다.

닉 칼리슨은 2002 세계선수권대회에 이어 다시 한 번 대표팀에 승선했다. 당시 칼리슨은 캔자스 대학의 슈퍼스타로, NCAA 최고의 빅맨으로 군림했다. 아직 NBA 데뷔 전이었고, 대표팀에 뽑힐 정도의 기량도 아니었지만 아마추어리즘의 상징성 때문에 뽑혔다.

반면, 스윙맨 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다.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알렌 아이버슨과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가 모두 합류했다. 또, 리그 제일의 외곽슈터 레이 알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 중이었다. 코비와 피어스가 빠졌지만 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포인트가드진에는 키드와 마이크 비비가 포진했다. 키드는 당시 MVP 후보로 꼽혔던 최고의 야전사령관이었다. 비비는 정교한 외곽슛과 클러치 능력이 강점이었다.

 

 

 

적수가 없다

 

2003 아메리카선수권대회가 개막했다. 미국의 선발 라인업은 ‘오닐 - 던컨 - 맥그레디 - 아이버슨 - 키드’였다. 여기에 카터와 알렌이 돌아가며 키 식스맨 역할을 맡았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약했지만, 주요 로테이션의 강력함만 놓고 본다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이 대회에 미국의 적수는 없었다. 그 어떤 나라도 미국만 만나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미국은 평균 101.7점을 퍼부으며 70.8점만 허용하는 등 최다득점과 최소실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또, 평균 30.9점차로 상대를 박살내며 10전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또 다른 ‘드림팀’으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2000년대 초중반,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을 자랑했다.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 2라운드 도중 미국의 국제대회 58연승 행진을 중단시키는가 하면, 2004 아테네 올림픽 준결승전에서도 미국을 89-81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2003년 대회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미국 대표팀이 2라운드와 결승전에서 두 차례나 아르헨티나를 꺾었기 때문. 특히 결승전에서는 미국이 106-73으로 완승을 거뒀다. 던컨은 22분 만에 23점 14리바운드 FG 73.3%(11/15)를 기록하며 아르헨티나의 골밑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기준 2년 연속 NBA MVP에 빛나던 던컨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공격 효율성은 무자비할 정도였다. 야투성공률 56.2%, 3점슛 성공률 46.8%라는 황당한 기록을 내며 모두 압도적 1위에 올랐다. 공도 매우 잘 돌았다. 평균 29.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 21.8개의 아르헨티나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선수 개개인의 활약도 더 없이 뛰어났다. 카터(64.0%), 오닐(62.3%), 던컨(60.7%), 엘튼 브랜드(60.5%), 비비(60.4%) 등 무려 다섯 명의 선수가 야투성공률 6할 이상을 찍었다. 게다가 비비(16/28, 57.1%), 아이버슨(15/28, 53.6%), 알렌(16/29, 55.2%)은 경이로운 3점슛 생산력을 보이며 외곽 공격을 주도했다.

왜 볼 수 없었나

위에 기술했듯, 미국은 2003 아메리카선수권대회를 지배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에 따라 2004 아테네 올림픽 직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팀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아테네 올림픽에 등장한 팀은 전력이 한참 떨어졌다. 2003년 드림팀과는 전혀 다른 팀이었다.

원인은 테러 위협 때문이었다. 당시 그리스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등 치안 및 보안이 매우 불안했다. 한때 ‘미국이 아테네 올림픽에 불참할 것’이라는 루머가 떠돌 정도였다. 결국 NBA 스타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했고,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역대 최약체 로스터를 꾸려 올림픽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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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만 아니었다면, 팀 던컨과 케빈 가넷, 크리스 웨버가 한 팀에서 뛰는 꿈의 라인업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 NBA 미디어 센트럴

 

| BOX | 파업 때문에

아쉽게 출범하지 못한 드림팀은 하나 더 있다. 바로 1998 세계선수권대회 미국 대표팀이다. 미국농구협회가 발표한 최초의 멤버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센터 팀 던컨, 크리스찬 레이트너
파워포워드 크리스 웨버, 빈 베이커, 탐 구글리오타
스몰포워드 그랜트 힐, 케빈 가넷, 글렌 라이스
슈팅가드 앨런 휴스턴
포인트가드 게리 페이튼, 팀 하더웨이, 터렐 브랜든

하지만 이 드림팀이 1998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일은 없었다. 1997-98시즌 종료 후 NBA가 직장폐쇄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선수노조와 구단주측은 수익분배구조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펼쳤고, 파업은 꽤나 장기화됐다. 이에 따라 NBA 스타들은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모든 NBA 선수들의 세계선수권대회 참가가 불허됐다.

결국 미국농구협회는 하부리그 선수들과 대학생들을 국가대표로 선발,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정예멤버를 꾸리지 못한 미국은 3위에 그쳤다(?). 유고슬라비아는 결승전에서 러시아를 64-62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승기 기자(holmes1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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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제공 = 홍기훈 일러스트레이터(incob@naver.com)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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