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 이승기 기자 = 마이크 댄토니 감독은 2016-17시즌 휴스턴 로케츠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휴스턴에 자신의 색깔을 입혔다. '닥치고 공격', 일명 '닥공'은 여전했다. 올 시즌에는 제임스 하든이 '댄토니의 남자'로 낙점 받았다. 그렇다면 과거 댄토니의 수혜를 입었던(?) 애제자들은 누가 있을까.

 

공격농구의 귀재 마이크 댄토니 감독. 올 시즌에는 휴스턴 로케츠를 맡아 서부의 강호로 올려놓고 있다 ⓒ NBA 미디어 센트럴

 

 

마이크 댄토니는 누구?

“7 Seconds Or Less” 마이크 댄토니 감독의 철학이다. 댄토니는 ‘7초 이내’에 공격을 마무리하는 등 매우 빠르고 공격적인 농구를 선호한다.

댄토니는 현대농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댄토니 감독이 이끄는 피닉스 선즈의 등장 이후, NBA의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스몰라인업과 스페이싱, 3점슛과 픽-앤-롤 등을 중시하는 ‘댄토니표 농구’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었다. 비슷한 농구를 추구하는 팀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음은 물론이다.

2014-15시즌 챔피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뿌리는 사실 댄토니에게 있다. 현재의 워리어스는 2000년대 중반 피닉스의 시스템을 그대로 계승해 발전시킨 팀이다.

댄토니가 맡은 모든 팀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피닉스에서의 대성공 뒤에는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에서의 실패도 겪었다. 지금 그는 휴스턴에서 새 출발에 나서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도전을 지켜보도록 하자.

 

댄토니 비긴즈

댄토니의 커리어를 설명할 때, 스티브 내쉬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둘은 말 그대로 영혼의 파트너였다. 내쉬는 댄토니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시켜준 존재였다. 댄토니가 유비라면, 내쉬는 제갈량이었다고 보면 된다.

잠시 2003-04시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피닉스는 2003 플레이오프에서 선전하며 차기 시즌을 기대케 했다. 하지만 2003-04시즌 개막과 동시에 부진에 빠졌다. 선즈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프랭크 존슨 감독을 해고하고 댄토니를 감독으로 고용했다. 하지만 팀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피닉스 구단은 간판스타였던 스테판 마버리, 페니 하더웨이를 트레이드하는 등 아예 리빌딩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댄토니 감독은 유망주들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팀의 코어인 숀 매리언, 이때부터 이미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다재다능한 조 존슨, 빠르고 외곽슛이 좋은 리안드로 발보사까지. 훌륭한 유망주가 차고 넘쳤다. 선즈는 결국 29승 5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탈락했다.

2004년 여름, 댄토니와 구단 수뇌부는 차기 시즌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뛰어난 재능은 많았지만, 이들을 한 데 묶어줄 조련사가 필요했다. 선즈는 자유계약시장에서 만 30살의 포인트가드 내쉬와 계약을 맺었다. 이어 3점슛 능력이 빼어난 쿠엔틴 리차드슨도 영입했다. 준비는 끝났다.

 

2000년대 중반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2년 연속 MVP를 거머쥐었던 스티브 내쉬 ⓒ 나이키

 

 

영혼의 파트너, 스티브 내쉬

2004-05시즌이 개막했다. 댄토니 감독은 과감한 스몰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파워포워드인 스타더마이어를 센터로 두고, 스몰포워드인 매리언을 파워포워드로 기용하는 모험을 한 것이었다. 기동력을 살려 공격력을 극대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존슨과 리차드슨이 스윙맨 라인을 맡았고, 내쉬가 전체적인 경기조율을 담당했다. 

피닉스의 ‘베스트 5’는 작았지만, 대신 그만큼 빨랐다. 특히 화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리그에서 가장 빠른 페이스로 경기하며 평균 득점 1위(110.4점)에 올랐다. 동시에 103.3점으로 리그 최다실점의 불명예를 안았다. 형편없는 수비를 보강하는 대신,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이를 만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피닉스의 농구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첫 27경기에서 24승 3패를 거두는 등 가공할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픽-앤-롤과 3점슛, 속공을 기반으로 펼치는 피닉스의 ‘닥공’ 농구는 매우 신선했다. 상대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수비법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그렇다고 지역방어를 설 수도 없었다. 폭발적인 외곽슛을 갖춘 선즈 앞에서 지역방어를 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 선즈의 농구는 리그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댄토니가 전체적인 판을 짰다면, 이를 코트 위에서 구현한 이는 내쉬였다. 내쉬는 완벽에 가까운 경기운영능력을 보여줬다. 마치 하늘에서 코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대단히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어시스트를 배달했다. 내쉬 덕분에 48분 내내 오픈 찬스가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슈팅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쏘면 들어갔다. 거의 신의 경지였다.

놀랍게도, 피닉스는 62승 20패로 시즌을 마쳤다. 전년도 29승 팀이 무려 33승이나 더 거둔 것이었다. 댄토니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내쉬는 MVP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사실 내쉬는 댈러스 매버릭스 시절에도 잘했다. 올스타에 뽑혔고, 올-NBA 서드 팀에 선정될 정도로 기량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MVP 레벨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시즌 만에 리그 MVP가 될 수 있었을까.

내쉬는 이에 대해 “댈러스 시절의 나는 그냥 하나의 공격 유닛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닉스에서는 내게 경기운영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게 가장 큰 차이”라고 설명했다.

댄토니 감독은 포인트가드 중심의 농구를 펼친다. 모든 전술의 초점이 볼 핸들러에게 맞춰져있다. 또, 수비를 등한시하며 오로지 공격에만 몰두한다. 이러한 환경이 내쉬의 단점(허약한 수비력)을 가려주고, 장점(슛, 패스, 속공)만 극대화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었다.

내쉬는 2005-06시즌 다시 한 번 MVP를 수상, 2년 연속 MVP에 선정되는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내친 김에 2006-07시즌 MVP 3연패를 노렸으나, 덕 노비츠키(댈러스)에게 가로막혀 아쉽게 실패했다.

내쉬와 댄토니는 리그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등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지만, 우승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내쉬와 댄토니는 함께 했던 4년 동안 번번이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2008년 여름, 댄토니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뉴욕 닉스로 떠났다. 당시 피닉스의 단장이었던 스티브 커(現 골든스테이트 감독)는 댄토니에게 잔류를 요청했지만, 댄토니는 뉴욕과 4년간 2,400만 달러에 합의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에 따라 댄토니와 내쉬도 자연스레 결별하게 됐다.

내쉬와 댄토니는 2012년 LA 레이커스에서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내쉬는 이미 만 38세의 노장이 됐고, 레이커스는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댄토니 또한 본인의 전술과 맞지 않는 선수 구성으로 인해 고생했다. 내쉬와 댄토니는 2012-13, 2013-14시즌 2년 동안 함께 했지만 끝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내쉬는 2013-14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한편, 2013-14시즌 내쉬는 부상으로 인해 거의 뛰지 못했다. 댄토니 감독은 켄달 마샬을 선발 포인트가드로 활용했다. 마샬은 평균 8.0점 8.8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놀라운 어시스트 능력을 선보였다. 참고로, 댄토니와 함께 하지 않았을 때 마샬의 평균 어시스트 기록은 2.84개에 불과하다.

 

(2부에서 계속...)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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