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상혁 기자] ①편에 이어..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된 상무 시절

나는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0순위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신인 시절을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 김영만 등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서 경기를 뛰기는커녕 경기장에도 같이 따라다니지 못하고 숙소를 지킬 때였다. 

이러다 팀명이 모비스로 바뀌고 최희암 감독이 부임할 즈음에 상무에 입대하게 됐다. 그리고 상무 시절이 내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상무 입대 후 부산에서 2002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그때 한국농구가 중국을 꺾고 우승을 하지 않았나? 상무에서도 현주엽(전 LG 감독)과 신기성(SPO TV 해설위원), 조상현, 이규섭(삼성 코치)이 대표팀에 차출돼 나갔는데 부대에 복귀할 때는 금메달을 땄기 때문인지 말 그대로 금의환향을 했다.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이도 비슷하고 같이 운동을 시작했는데 누구는 저렇게 대우를 받고 나는 왜 못 받을까라는 생각을. 그러면서 독을 품고 제대를 했다. 제대 후 숙소에서 1년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 설날과 추석, 명절에만 딱 한 번씩 총 2번만 나가고 계속 숙소에서 새벽-오전-오후-야간에 개인 훈련을 했다. 

그때 팀을 맡던 분이 유재학 감독님도 가족들이 미국에 있을 때로 숙소에 계실 때였는데 주말이면 나를 데리고 식사도 챙겨주시면서 좋게 봐주셨다. 나는 그때 ‘1년 동안 죽어라 해보고 안 되면 (선수를) 관둬야겠다’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딱 1년간 정말 죽어라 운동했다. 

이런 비시즌을 보내고 시즌이 됐는데 정작 감독님이 경기를 안 뛰어주시는 거다. 2라운드까지 기다리다 참다 못해 감독님을 찾아갔다. 그동안 내가 상대 득점원들을 나름 분석한 것을 필기한 노트를 들고 가져가 “왜 나를 안 내보내주시냐? 기회를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일단 돌아가라고 하신 감독님이 이틀 후 경기를 앞두고 가진 훈련에서 B팀이 아닌 A팀 멤버로 나를 투입하셨다. 그리고 그날 경기에 스타팅으로 나섰다. 상대가 LG였는데 내 수비 상대는 조우현이었다. 그때 팀원들이 하프코트 맨투맨을 할 때도 혼자서 풀코트 맨투맨을 하는 등 정말 토 나올 때까지 뛰었다. 물론 1쿼터 10분을 뛰고 다리에 쥐가 나서 감독님께 교체 사인을 보냈고 이후 나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유재학 감독님이 나를 기용해주셨고 어느 정도의 출전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유 감독님은 그러면서 나에게 수비를 알려주셨다. 공격은 3점슛을 연습하라고 하시면서 “3점슛은 30개 던져 안 들어가도 상관없으니 일단 던져라. 대신 수비는 네가 뛰는 동안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는 감독이 원하는 걸 잘하는 게 좋은 선수라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모비스에서 7년을 뛰었는데 나름 유재학 감독님과도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아직은 배울 게 많은 초보 지도자

모비스에 이어 나는 SK와 전자랜드, 삼성을 거쳐 은퇴했다. 은퇴를 할 즈음에는 무릎도 그렇고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기력도 안 나왔다. 대신 아쉬움은 없었다. 후회 없이했다고 생각한다. 수술 한 번 안 하고 게임을 그래도 많이 뛰었으니까. 

은퇴 후에는 아웃도어 의류 사업을 7년 정도 했다. 잘 될 때도 있었고 안 될 때도 있지만 그럭저럭 운영은 됐다.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평생 해오던 게 아니라 어설펐고 주위에서도 농구계에 복귀 안 하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에 조성원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명지대로 가게 됐다. 학교에서는 2년 좀 넘게 있었는데 대학 코치는 정말 만능이어야 했다. 운동 가르치는 것 외에 원정 경기 때 숙소 및 식당 섭외, 일정 조율, 그리고 선수들에 대한 지원 등 많은 걸 해야 했다. 

나는 지도 스타일이 굉장히 센 편이다. 유연하고 부드럽게 하기보다는 타이트하고 강하게 하는 편인데, 감독님은 정반대다. 그래서 한번은 감독님께 “제 스타일로 한 번 지도해보겠다”라고 말씀드렸고 감독님이 당시 웃으면서 알겠다고 하셨다. 

한 학기 정도 가르쳤는데 스트레스가 뒷목에 올라와서 병원을 다녔을 정도였다. 애들의 기준점을 너무 높게 잡은 데다 마음대로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해당 학기가 끝나자마자 감독님께 다시 찾아가 “메인으로 가르치는 건 못하겠다. 코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다시 말씀드렸다. 

LG에 올 때 감독님이 물어보셨다. 학교에 남을지 아니면 같이 갈지. 나는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때 같이 가자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다. 내가 감독님 덕분에 지도자가 됐고 아직 배울 것도 많기 때문에 LG에 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팀에 온 지 100일 정도가 지났다. 프로선수들이라 확실히 대학선수들과는 다르다.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고 스스로 노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스스로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감독님이 노력하시는데 선수들이 거기에 맞춰서 개인 운동도 많이 하고 그런다. 다만 어린 선수들은 아직 혼자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데 그런 때 나 같은 코치가 잡아줘야 한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이 프로로서 책임감을 갖고 농구를 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절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농구를 좋아해서 하면 좋겠다. 나는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 역시 지도자로서 내가 노력하면 선수들이 알아주고 따라올 것이고 내가 노력 안하고 게으르면 선수들도 안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노력하려고 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Comment

조성원 LG 감독
처음 명지대로 부를 때도 내가 책임진다고 이야기했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LG까지 데려왔다. 능력도 있는 지도자고 여기에서도 다소 처져있거나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잡아주면서 선수들을 잘 이끄는 지도자다. 수비의 세세한 부분을 잘 지적해주고 선수들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끔 잘 지도하고 있다. 여러모로 믿음이 가는 지도자다. 

강병현 LG 주장
화끈한 완전 상남자 스타일이시다. 훈련 때는 감독님이 지적 안 하는 부분을 따로 지적해주시면서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주는 스타일이다. 강한 스타일이면서도 선수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무조건 강하기보다는 시기와 상황에 맞게 강약 조절이 가능한 그런 코치님이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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