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상혁 기자] 현역 시절 2대2 픽앤롤의 마스터로 불렸던 강혁 코치가 친정팀 전자랜드의 부름을 받았다. 삼성과 전자랜드에서의 화려한 선수 생활을 뒤로 하고 은퇴 후 곧바로 모교인 삼일상고에서 4년 반, LG 코치로 보낸 3년에 이은 3번째팀이다.

현역 시절에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2대2 픽앤롤 마스터라는 확실한 자기만의 무기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플레이오프 MVP까지 차지했던 강혁은 이제 전자랜드 가드진의 성장과 팀 우승이라는 목표를 앞두고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게 됐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우여곡절 많던 어린 시절

나는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농구를 시작한 계기는 우연했다. 집 앞 시민회관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오산의 성산초등학교 농구부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동네 형들과 놀러갔지만 농구부 훈련 때문에 회관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시 코치님이 나만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때 또래들보다 키가 좀 큰 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때가 5학년 초였는데 농구 골대라는 걸 처음 봤다. 사실 그때는 농구의 '농'자도 몰랐던 때니까. 당시 나는 육상이나 배구도 한번씩 했는데 금세 관뒀던 때였다. 그 코치님이 농구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셨는데 바로 거절했다. 농구를 모르기도 했고 부모님도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그러나 나중에 그 코치님이 부모님과 따로 연락을 주고 받고 하더니 어느새 나도 농구를 하게 됐다. 처음에는 뭔가 거부감이 있었지만 농구하러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줘서 금세 마음이 바뀌었던 기억이 있다. 

농구 시작이 결정되고 전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는데 처음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해도 배우는 게 재밌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선후배 관계가 세지면서 힘들었다. 그때만 해도 선후배 간에 서열이나 군기가 강할 때여서 무섭기도 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마침 그때 내가 진학한 오산중 농구부가 해체를 하면서 농구를 쉬게 됐다. 2학년말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부모님들이 지금 학년들까지만 졸업한 뒤에 해체해줄 것을 학교 측에 건의했다. 그게 받아들여져 다시금 농구를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싫었지만 선수가 없다는 등쌀에 밀려 다시 농구를 하게 됐다. 그때 동기 중에 하나가 김성철(현 DB 코치)인데 그 친구와는 초중고대 모두 같이 다녔다. 

경희대와 최부영 감독, 그리고 부산행

다들 알다시피 나는 경희대를 졸업했다.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어른들 간에 이야기가 오갔고 나 역시 막연하게 경희대의 스파르타식 지도가 선수로서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셀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강해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라는 생각이 컸다. 

대학 입학 때 내 위로는 윤영필, 김광운, 박성배(전 우리은행 코치), 손규완(KGC 코치) 같은 형들이 있었다. (김)성철이는 신장도 있고 워낙 농구도 잘해서 고교 3학년 신분이지만 농구대잔치에도 뛰었다. 나는 같은 포지션의 (김)광운이 형이 졸업하고 나서야 스타팅으로 경기에 뛸 수 있었다.

당시 최부영 감독님이 1학년 말에 “너는 스타팅으로 투입되는 게 낫냐, 아니면 나중에 투입되는 게 낫냐?”라고 물어보셔서 스타팅이라고 답했고 그때부터 베스트 멤버가 됐다.  

그때는 농구가 나름 잘 될 때였다. 윤영필, 박성배, 손규완, 김성철, 내가 스타팅이었고 하상윤(광신방예고 코치), 윤훈원, 양은성(삼성 코치) 등이 백업 멤버였다. 곧잘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어이없이 지거나 할 때면 패널티가 이어졌다.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회기동 경희대 농구부 숙소까지 뛰어간 적도 수두룩하다. 

3학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전문 용어로 2박 3일 정도 '소풍'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해 6월이 좀 지났을 때 같은데. 우리가 초반에 성적이 좀 괜찮아서 감독님이 풀어주셨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성적이 안 좋았다. 그러면서 훈련이 타이트해졌는데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너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다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 나가자’라고 말했다. 

다른 동기들은 안 간다고 하는데 성철이가 “나는 갈래”라고 하더라. 그래서 바로 둘이서 짐을 싸서 부산으로 갔다. 처음에는 무슨 생각이 나겠는가? 모처럼 느끼는 자유에 맛있는 것도 먹고 만화방에서 둘이 만화책을 보며 머리도 식히고 신나게 놀았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되자 당시 차고 있던 삐삐가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 거다. 부모님들의 연락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지금 친구들이야 모르지만 당시 그 표현은 매우 거칠면서도 많은 것을 포함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가 있으면서도 우리는 나름 치밀하게 학교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남아 있는 동기들이 이야기하는 게 나와 성철이가 나가고 나서 감독님이 훈련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덩달아 훈련 분위기가 편해진 것은 당연했다. 숙소의 선수들이 ‘돈 떨어지면 이야기해라. 보내줄게’라고 말을 하더라. 어떤 마음인지는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어느 정도 쉬었다고 생각한 나와 성철이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러자 감독님은 어디냐고 물으셨고 나는 무서운 마음에 부산이 아닌 대전이라고 했다. 당장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셨지만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까지는 갈 수 없기에 다음날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감독님 댁에 찾아가니 사모님께서 감독님이 훈련에 나가셨다고 했다. 전화로 댁에 왔다고 하자 어느 식당에 가 있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식당에서 기다리면서 불호령이 떨어질까 불안해하는 가운데 감독님이 오셨다. 

하지만 감독님은 거기서 아무런 말씀 없이 묵묵히 고기를 구워주시면서 “나가서 제대로 먹기나 했겠어? 어서 먹어”라는 말만 하셨다. 그렇게 말없이 용서를 받았고 팀에 복귀해 얼마 안 남았던 대회 준비를 잘해서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최부영 감독님께는 지금도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 뿐이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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