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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영그는 NBA 진출의 꿈 한국인 NCAA 리거 이현중 ①

 

[루키=박상혁 기자] NCAA 1부 데이비슨 대학에 재학 중인 이현중은 하승진에 이어 제2의 한국인 NBA 리거를 꿈꾸고 있는 농구 유망주다. 당시 하승진은 221cm라는 신체 조건에 힘입어 NBA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현중은 그것과는 궤를 달리 한다. 
2m대의 장신 슈팅가드로서 국내에서 고교를 마친 뒤 NBA의 아시아 청소년 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내 호주의 NBA 아카데미에 스카우트됐다. 아카데미에서 세계의 여러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기량을 갈고 닦아 NCAA 대학에까지 스카우트 되는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며 빅리그 진입을 노리고 있다. 최진수와 하승진이 어려움을 겪었던 영어 및 학점 관리도 이미 적응돼 큰 문제가 없다.
이런 그의 이력과 현재 진행형인 노력 및 결과물에 국내 농구팬들은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선수 본인이 그토록 꿈꾸고 있는 NBA 진출이라는 대형 사고를 터트리기를 말이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승부욕으로 농구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이현중의 농구 시작은 매산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였다. 아버지 이윤환(삼일상고 농구부장) 씨와 LA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 유명한 어머니 성정아 씨 사이에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농구공을 접하는 것은 당연했다. 성정아 씨의 말에 따르면 5살 때부터 농구공을 갖고 노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안했다고. 여기에 누나까지 농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구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하지만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 법이다. 이현중도 그랬다. 첫 위기가 온 것이 삼일중 재학 시절이다. 아직 성장할 수 있는 선수들인만큼 기본기를 가르치고 쉬엄쉬엄 하는 훈련이 필요했는데 그런 게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코트를 60분에 180바퀴 뛰고 그랬어요. 산도 많이 뛰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이게 뭘 위한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당시 친구들 중에 산을 뛰다가 무릎이 안 좋아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다른 나라 훈련 시스템도 모를 때였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가면 농구를 못할 것 같았어요. 그때 처음 부모님께 농구를 관두겠다는 얘기를 했죠.”

그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전교 8등을 할 정도로 공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난 학생이었다. 그의 부모 역시 농구인이었지만 공부도 곧잘 하는 아들이 힘든 길을 걷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농구를 관두겠다는 그의 말에 흔쾌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가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김도완 현 삼성생명 코치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는 농구에 필요한 운동과 훈련만 시키는 스타일이었고 도저히 힘들어 농구공을 놓으려던 이현중 역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만약 그때 김도완 코치가 삼일중 감독으로 부임하지 않았다면 지금 NCAA에서 활약하는 이현중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이현중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는 평범한 키에 그저 그런 선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부터 슛만 쏘는 걸 좋아했어요. 중 2때까지 키도 평범한 데다 힘도 약하고 그래서 슛만 쏘게 됐죠. 그러다 엄마가 기본기를 더 확실하게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죠. 그래서 안희욱 선생님을 찾아가서 스킬 트레이닝을 배웠는데 이러면서 키도 커서 중 3때 192cm까지 컸어요. 슈팅 연습도 많이 해서 잘 들어가니까 김도완 코치님이 저를 장신가드로 기용해주셨어요. 그때부터 가드 움직임이 배어 있어서 잘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만약 그때 제 몸이 허약하지 않았다면? 아마 센터로 뛰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몸은 다소 허약했지만 그는 예전부터 타고난 승부욕이 있었다. 중학교 때 전교 8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할 수 있던 것은 따지고 보면 이런 승부욕 때문이다. 

“제가 원래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못하는데. (루더바 : 그러면 공부를 잘하기 어려울 텐데요) 그런데 왠지 쪽팔릴 것 같았어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보면 운동선수들은 답안지를 그냥 다 찍고 엎드려서 잠을 자거든요. 그런 게 싫었어요. 그리고 운동선수라고 일반 학생들보다 점수가 덜 나오는 것도 싫었고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했던 것 같아요.”

삼일중 시절 그의 공부 방법은 일단 수업시간에 자지 않고 메모도 하면서 열심히 듣는다. 그리고 오후 수업과 훈련이 끝나고 집에 와서는 수업 때 적어놓은 메모를 보고 공부를 했다. 대신 다음날 훈련을 위해 오후 11시면 취침을 했다고. 무리하게 부담을 갖기 보다는 편안하게 했다는 그다. 

중학교 때와 달리 삼일상고 진학 후에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졌지만 영어 공부만은 놓치 않았다. 영어의 중요성을 깨달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5살 때 영어 유치원을 나왔고 학원을 다니는 등 어떻게든 영어와의 끈은 이어갔다고. 

결과론적으로 이런 노력은 그가 호주의 NBA 아카데미에서 적응하고 NCAA까지 가는 밑바탕이 됐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지난해 12월 10일 코핀 스테이트 대학과의 경기가 기억난다. 그 경기에서 더블-더블을 기록했는데, 기분좋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에서 전화를 걸어준 기자님들과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 뒤 밤새 리포트를 작성했다. 리포트를 끝내니 아침이더라. 30분 정도 자고 아침 먹고 수업에 가서 리포트를 제출했다. 너무 피곤했지만 리포트를 안 낼 수는 없으니까.”(웃음)

코핀 스테이트 전에서 이현중은 17득점 10리바운드로 데뷔 후 처음으로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그 주 A10 컨퍼런스 금주의 신인에 선정됐다. 이러면 뭐하나? 밤새 리포트를 썼다는데. NCAA에서 농구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 힘든 일인 것 같다. 

인생의 기회가 된 U-17 세계선수권대회

삼일중을 거쳐 삼일상고에 진학하면서 이현중의 기량도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자연스레 농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태극마크도 달게 됐다. 그리고 그 역시 이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요. 2015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16세 이하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선발됐죠. 마침 주말리그 왕중왕전이 끝나고 소집돼서 한 달 정도 훈련을 했어요. 군산과 수원, 서울에서 훈련을 하는데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받을 때 느낌이 남다르더라고요. 그때 잘하던 (양)재민이 형, (신)민석이 형 같은 형들하고 같은 팀이 됐다는 것도 신기하면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의 농구 인생에 전환점이 된 계기는 역시 U-17 대회였다. 변변한 센터 하나 없는 팀이었지만 U-17 청소년 대표팀은 오세일 감독의 지도하에 외곽 위주의 농구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고 세계 대회 진출권까지 따냈다. 

“그때는 저희 팀에 센터가 없었어요. 제 키가 팀내에서 3번째로 컸을 정도였죠. 대신 선수들의 케미스트리가 코트 안이든 밖이든 잘 맞고 좋았어요. 오세일 감독님도 선수 기용을 골고루 잘해주셔서 불만을 가진 선수도 없었고 각자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었어요. 팀 전체적으로 3점슛을 많이 쏘는 농구를 했는데 잘 먹혔죠.”

아시아 정상에 오른 U-17 청소년대표팀은 이듬해 열린 U-17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프랑스와 도미니카공화국 등을 이기고 조 3위로 16강에 진출해 아시아 대회에서 우승을 놓고 다투던 중국과 만났다. 

“첫 경기였던 프랑스 전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겼어요. 이후 비교적 약체였던 도미니카공화국을 잡고 3번째 상대였던 보스니아한테는 졌죠. 이후 16강에서 중국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이전 아시아 대회에서 우리한테 져서 흔히 말하는 ‘열이 받친’ 상태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전 대회와 다른 라인업으로 나서면서 다시 꺾었죠. 그 다음이요? 8강에서 미국을 만났는데. 그때는 뭐 아시다시피 처참하게 깨졌어요.”(웃음) 

8강으로 마무리한 이 대회에서 이현중은 평균 득점 11.7점으로 전체 28위를 기록했고, 3점슛 성공률은 41.5%로 전체 7위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 전 패배가 그에게는 어지간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잠을 설친다는 그다. 

“그때 52점차로 패했어요. 우리가 크게 못한 것도 아닌데 경기가 끝나니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넘사벽’이었죠. 이때가 계기가 됐어요. 한국에만 있으면 정말 우물 안 개구리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든 해외로 농구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②편에서 계속... 
사진 = 이현수 기자, KBL 제공

박상혁 기자  jumper@rook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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