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진호 기자] 사실 김정은에게 하나은행에서의 마지막 3년은 고난과도 같았다.

개인적인 문제가 겹쳤다. 가족에 대한 정과 애틋함이 유독 깊은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이들이 떠나가는 일이 연이어 생겼다. 누구보다도 각별했던 할머니와 친남매와도 같았던 사촌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김정은은 사촌 동생의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바로 복귀한 경기에서 16점 5어시스트로 팀 승리를 이끌었고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다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7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부상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애증의 시즌
만성적으로 허리에 부상을 안고 있었지만 연이어 다른 부상이 겹쳐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특히 무릎 반월판이 찢어진 부상은 심각했다. 하지만 몸이 아파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특히 2015-16시즌은 더욱 그랬다. 팀이 플레이오프를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도 한 번에 찢어지진 않았을 거라고 해요. 처음에는 근력이 좋으니까 몰랐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2015년 홈 개막 KB 경기 때였어요. 시즌 두 번째 경기였죠. 원정 개막전은 KDB생명한테 이겼었고... KB전에 제가 정말 못했는데 그날 무릎에 느낌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경기도 졌고 분위기도 최악이었어요. 다음날 일어나서 계단을 걷는데 심각하다는 걸 그 때 느꼈어요.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확 드는 거예요. 그만큼 예감이 안 좋았죠.”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반월판이 더 찢어지면 선수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소견이었다. 병원 5군데를 돌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술은 하지 않았다. 수술을 하면 시즌을 뛸 수 없었기 때문. 테이핑을 깁스 수준으로 하면서까지 버텼다.

“하나은행 창단 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늘 무거웠는데 그때는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첼시 리도 와서 골밑이 강해졌고... 진단은 절망적이었지만 팀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뛰겠다고 결정했죠. 그때 수술했으면 지금은 다 나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 선택에 후회는 안 해요. 그때로 돌아가도 시즌을 뛸 거예요.”

2015-16시즌. 하나은행은 정규리그를 20승 15패로 마치며 2위를 차지했고, KB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승리해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데뷔 11년 만에 처음으로 챔프전 진출이 결정되자 김정은도 동료들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나은행은 챔프전에서 최강 우리은행에게 3전 전패로 패하며 우승에 실패했지만 누구도 하나은행의 준우승을 실패라고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담은 거기까지. 동화같은 스토리의 어두운 뒷면이 그 후로 이어졌다.

‘한국계 혼혈’이라는 신분을 주장했던 첼시 리의 사문서 위조사건이 터지며 하나은행의 2015-16시즌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기록은 물론 순위와 준우승도 말소됐다. 하나은행이 처음으로 밟은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 무대는 물론 김정은의 부상 투혼도 철저하게 기록에서 지워졌다. 

‘첼시 리 사태’가 터지자 김정은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된 거냐”며 “사실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단순히 지난 한 시즌이 물거품 된 것 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신세계 시절 해체의 아픔을 겪었던 김정은은 그 사건으로 또 한 번 큰 풍파가 밀려올까봐 두려워했다. 팀의 중심이자 맏언니, 정신적 지주로서 후배들을 다독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김정은은 시즌 직후 예정됐던 자신의 결혼식에도 걸어 들어갈 수 있을지 여부를 걱정할 만큼 무릎 상태가 나빴다.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이동한 곳은 신혼여행지가 아닌 병원이었고 수술대에 올랐다.

김정은은 ‘신혼여행을 건국대병원으로 다녀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한 시즌의 투혼이 산산히 부서져버린 비시즌을 보낸 2016-17시즌. 김정은은 재활과의 힘겨운 싸움을 병행하며 시즌을 보냈다.

“재활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몸에 근육통이 없으면 ‘내가 오늘 열심히 안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7개월 동안 하나은행의 송혜련 트레이너랑 둘이 매일 붙어서 강박이 생길 정도로 재활을 했어요. 이 무릎 수술은 우리나라에서 제가 처음이래요. 트레이너도 고생 많이 했어요. 제가 그 전 시즌에는 종아리가 세 번 찢어지면서 7경기를 못 뛰었거든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두 시즌을 제대로 소화 못한 거라 빨리 회복하고 싶다는 자존심도 있었어요.”

12년-13시즌을 함께한 첫사랑과의 이별
2017년 4월 13일. 신한은행 최윤아와 우리은행 양지희의 은퇴소식과 함께 김정은이 FA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소속구단인 하나은행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는 것. 

이와 동시에 다른 구단들에게는 불똥이 떨어졌다. KDB생명을 제외한 4개 구단이 모두 ‘김정은 잡기’에 뛰어들었다. 사실상 주전급 선수들의 FA이동이 어려운 WKBL 구조에서 김정은은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시장에 나오기 힘든 대어 중의 대어였다. 

“집 근처 커피 전문점에서 하나은행 국장님이랑 만나서 결렬서를 썼는데 그렇게 나와서 집까지 울면서 걸어갔어요. 웃기죠? 내가 결정해놓고 내가 울어... 필름처럼 지난 일이 생각난다는 게 맞더라고. 이게 잘하는 일인지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남편한테 전화해서 결렬됐다고 하니까 남편도 목소리가 떨리더라고요. 결국 집까지 못 가고 남편 회사로 가서 같이 퇴근했어요. 집에 혼자 못 있겠어서... 남편 차에서 펑펑 울었어요.”

프로 데뷔 후 12년간 13시즌을 뛰었던 팀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김정은은 이후 전화도 꺼놓고 며칠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첫 사랑과 겪는 실연의 아픔을 그는 서른이 넘어 처절히 느끼고 있었다.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것 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고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쏜살같이 하루가 끝나 있었다.

너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남편이 “은퇴하는거냐”고 묻기도 했다고. 

“지난 시즌에 팀이나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생각보다 빨리 복귀했어요. 이 수술이 보통 복귀까지 1년을 본다고 하더라고요. 4월에 수술했으니까 저는 1월을 목표로 했는데 12월에 복귀했잖아요. 재활을 정말 열심히 했고 우리 선수들 쉴 때는 트레이너랑 여고 팀에 가서 운동을 한 적도 있어요.” 

김정은의 복귀는 나쁘지 않았다. 폭발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며 화려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꼭 필요할 때에 정확히 자신의 역할을 해줬다.

WKBL에서 가장 젊은 팀. 선수 대부분이 20대 중반 이전의 나이였던 하나은행은 확실한 세대교체를 통해 '가장 어린 에이스' 강이슬이 중심을 잡으며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프로 2년차의 김지영이 '깜짝 스타'로 떠오르며 새로운 색깔을 보여줬다. 

그런데 부상에서 복귀한 김정은이 어느 순간부터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몸 보다는 정신적으로 흔들렸어요. 처음에 복귀해서 뛸 때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점점 더해지면서 힘들어졌죠. 자존심도 상하고, 스트레스 심하게 받고, 그러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니까 몸도 또 쳐지고... 확실히 경기 감각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컸어요. 코트에서 뛰어도 긴장감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노마크 골밑슛이 3점슛처럼 보였어요. 내가 다 무너진 느낌이랄까... 내가 내 바닥을 본 거 같아요. 팀에 내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정은이 FA로 잔류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김정은은 끝내 계약서가 아닌 결렬서를 선택했다.

애증의 시간을 온전히 함께한 터라 서운함과 안타까움도 있다. 이는 하나은행도 마찬가지. 신세계 시절부터 김정은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한종훈 하나은행 사무국장은 1차 결렬 이후에도 "(김정은이) 돌아오지 않겠냐"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하나은행과 김정은은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김정은은 팀의 결정과 선택도 존중한다며 “구단도 마지막까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줬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하나은행을 떠난 김정은이 며칠 간 이별 후유증을 앓으며 연락을 받지 않자 ‘김정은 영입’에 뛰어든 4개 구단도 비상이 걸렸다. 일부에서는 김정은이 특정 구단과 미리 계약을 한 후 연락을 끊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처음에는 연락 오는 것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저한테 그런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 자체가 감사하더라고요. 내가 아직까지 선수로서 가치가 있다는 걸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된 거 같아요.”

이제는 추억이 된 옛 소속팀이지만 하나은행은 물론 선수들에게도 여전히 각별함과 정이 남아있다. 숙소에 있는 자기 짐을 빼러 갈 자신이 없어 부탁을 하기위해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한참을 같이 울었다. 

“하나은행은 여전히 젊고 열심히 하는 팀이잖아요. 미래가 밝은 어린 선수들도 많고요. 잘 할 거에요. 특히 김(이)슬이나 (신)지현이는 정말 잘 될 거예요. 걔들, 예쁘다고 팬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그런데 팬들이 그것도 아나? 얘네 진짜 독종이에요. 작년에 얘들이랑 내가 계속 재활 했잖아. 와... 정말 독하게 재활을 하더라고요. 나도 사실 운동 세게 하는 걸로 안 밀릴 자신 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분명히 오랫동안 운동하면서 좋은 모습 보여줄 거예요.”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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