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다. 코트 안에서나 밖에서나 바람직한 모범생을 보는 것 같다. 30대 중반에 들어서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펼치면서 누가 봐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바른 길의 표본’같은 선수다. 34살에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고, 35살에는 자신의 두 번째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일본에서 열린 초대 EASL 챔피언스 위크에서 동아시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대한민국 최고 가드’가 아닌 ‘아시아 최고 가드’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긍정적 마인드의 정점’에서 온화한 유쾌함으로 주변까지 밝게 만드는 에이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MBTI를 EEEE로 적어야 하는 ‘자칭 관종’. 어쩌면 ‘슈퍼스타로 태어난 남자’ 김선형의 이야기다.

해당 기사는 <루키> 2023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0
아아! 청춘, 사람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소유할 뿐, 그 나머지 시간은 회상할 뿐이다. (앙드레 지드)

그 ‘반듯한 청년’을 만난 것은 3월 13일, 수원 영통구의 한 스타벅스 카페였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나타난 그는 갑자기 초콜릿과 사탕을 꺼냈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 죄송하다”며, “내일이 화이트데이라서 준비했다”고 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지켜봤던 이미지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남자에게 화이트데이 사탕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일상적인 인터뷰에도 신경을 써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하지만 대뜸 악담부터 던졌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나이를 먹긴 먹었네. 눈가에 주름도 있고!”

프로 12년 차. 리그를 대표하는 베테랑 가드로 입지를 굳힌 지 한참이지만, 선수 김선형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2012년에 머물러있다. 지난 20여 년간, 인터뷰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을 많이도 만났다. 하지만 ‘루키’라는 이름표를 달고 김선형만큼 재미있는 모습을 보인 이는 흔치 않았다.

코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기자석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김선형은 그때의 그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코트를 질주하고 있다. 그래서 김선형의 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보인다.

오랜만에 밝은 조명 아래 가까이 앉아서, 어쩌면 전에 없이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의 흔적을 발견했다. 기쁘다. 역시 세상의 나이는 나 혼자 먹은 것은 아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거세게 달려오는 세월에게 정면으로 얻어맞은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있다’는 김선형에게도 분명 10여년의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죠.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나이 먹었다는 느낌이 그렇게 드는 거 같아요. 더 노련해졌다고 느꼈거든요. 당연히 점프나 스피드는 줄어들었지만, 신체 능력은 줄어도 그만큼 저의 구력은 늘어나잖아요? 그런데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거랑 구력이 늘어나는 속도는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 거 같아요. 떨어지는 속도는 조금 더딘데, 구력이 늘어나는 속도는 빨라지는 느낌이에요. 요즘에도 계속 그런 느낌을 받고 있어요.”

긍정 대마왕이다. 신인 시절부터 그랬다. 독한 질문에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살짝 질책하는 듯한 의견을 던져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래. 김선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확실히 체력 회복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기는 하죠. 9일 동안 6경기 할 때는 동생들이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난 잘 자고 나왔는데, 얼굴 보더니 ‘어제 몇 시에 잤냐’고 걱정하듯 물어보는 경우도 있어요. 몸에 나타난다는 거죠. 경기 뛴 다음날은 확실히 형들이 옛날에 얘기하던 것처럼 회복이 좀 더뎌요. 그런데 와이프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결혼한 지 이제 8년째가 되는데 저한테 나이 먹은 것 같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도대체 언제 늙는 거냐’고 하던데요.”

뭔가 수긍하는 듯 했지만 다시 극단의 긍정회로로 전환했다.

“사실 저희 부부가 상당히 자뻑이 심해요. 자기 자신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서로한테도 그렇거든요. 그게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얘기들을 늘 해주니까 좋은 것 같아요.”

응. 들리지 않아...

 

#1
김선형은 이미 KBL 역사에서 큰 틀의 흐름을 바꾼 선수다. 한국 농구에 존재하는 가드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깼다. 각 포지션의 분업이 철저하게 규정되던 시대. 가드의 우선 덕목은 경기를 운영하고 볼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때에 따라 직접 림을 노리기도 했지만, 1번의 득점이 많아진다는 것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 경기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의 설명이기도 했다. 이미 세계적으로는 ‘듀얼 가드’가 유행을 하고, ‘슛이 없는 가드는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 나왔지만, 국내에 이런 분위기가 정착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흐름의 선두에 김선형이 있었다. 팀 구성원들을 살리며 경기 운영을 할 수도 있지만 찬스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격을 먼저 보는 가드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KBL 최초의 케이스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190cm가 안 되는 가드가 속공 상황에서 냅다 덩크를 때려박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 ‘역사’에 “‘관습은 모든 것의 왕’이라고 한 핀다로스가 옳았다”고 기술했다. ‘관습’이 인간을 지배한 것이 적어도 2500년은 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옳다고 믿어지는 고정된 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온 변화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김선형은 전통적인 가드의 개념을 깨고 공격적인 가드의 시대를 KBL에 불러온 선구자다. 그는 당시 감독이었던 문경은 KBL 경기본부장에게 감사를 전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감독으로 모신 분이 문경은 감독님이잖아요? 저한테는 잊을 수 없는 분이세요. 많은 기회를 주셨고, 2년 차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제 스타일을 용인해주셨거든요. 그 전까지는 SK가 그렇게 빠른 팀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 스피드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써 주시면서 시너지가 난 거 같아요.”

“감독님이 바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뭔가 철렁했어요. 아쉬웠고요. 10년을 같이한 감독님이 물러나시는 거라 큰일 났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새로 오신 감독님이 전희철 감독님이었잖아요. 코치로 오랫동안 같이 계셨던 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 오신 분이 전희철 감독님이라서 빠르게 추스르고 새롭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
다시 시간을 2012년 2월 7일로 돌려보자.

김선형은 당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위냥샷을 성공했다. 74-74 동점에서 종료 23초를 남기고 볼을 잡은 그는 제자리에서 볼을 돌리며 여유를 보이다가 기습적인 돌파를 성공했다. 득점도 득점이었지만 박빙의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듯 혀를 살짝 내밀고 볼 핸들링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루키의 모습에 SK의 홈팬들은 열광했다.

“감독님이 7초에 시작을 하라고 하셨는데 볼을 잡고 보니 시간이 많이 남았더라고요. 괜히 드리블을 치다가 수비가 붙으면 볼을 잡게 될 수도 있어서 드리블 없이 볼을 돌렸는데 갑자기 함성 소리가 들렸어요. 저 때문이더라고요. 그래서 볼을 더 빨리 돌렸죠. 7초 남기고 돌파를 시작했는데, 상대 팀파울이 남았거든요? 그쪽 벤치에서도 끊으라고 하는데 파울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올라갔어요.”

경기 후 김선형이 전했던 당시의 상황이다. 관중들이 환호한다고 클러치 상황에서 볼을 더 빠르게 돌렸다는 신인. 어찌 보면 무모할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당시 김선형의 앞에는 프로 입단 동기인 이관희가 있었다. 김선형은 패스를 받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수비하는 이관희를 가리키며 심판을 향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하는 등, 이관희를 자극했다. 관중의 함성을 유도한 플레이도 매치업 상대였던 이관희에게는 다소 불쾌한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이관희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김선형의 득점 이후 남은 시간은 3.8초. 이관희는 빠르게 반격에 나서 드라이브인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득점이 성공했다면 김선형과 이관희의 라이벌리가 일찍부터 흥미진진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때 영상을 보면 플레이보다 제 머리밖에 안보여요. 앞머리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원장님께는 죄송하지만 미용실을 바꾸고 싶어요.”

요즘 KBL에 워낙 독특한 캐릭터가 많이 등장해서 그렇지, 솔직히 김선형도 정상은 아니다.

“그 때의 저는 집요하리만큼 림 어택을 많이 하더라고요. 플로터도 안 쓰던 시절인데, 외국 선수가 있든 없든 림 어택을 많이 한 거 같아요. 젊고, 체력도 되고, 회복도 빠르고, 스피드나 점프도 좋으니까 그거 믿고 그냥 때려 박더라고요.”

남의 이야기 하듯 말하는 그에게, 만약 지금, 당시의 김선형과 함께 코트에 있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같이 못 뛰죠. 클러치 타임에 제가 있는데 어떻게 뛰어요? 벤치에 있어야지. 만약 같이 코트에 있다면... 음... 아마 볼을 못 잡겠죠. 제가 플레이를 해야 하니까요.”

김선형의 자존감은 과거의 자신에게도 배려가 없다.

“다음에 LG와 경기를 할 때 저 때랑 비슷한 상황이 되고 앞에 (이)관희가 있으면 한번 돌려봐야겠네요. 그때 느낌을 살려서요. 세레머니로 유니폼을 한번 들어 올려야겠네요.”

지금은 그의 시그니처가 된 '플래시썬 세리머니'가 있지만, 당시 김선형은 결정적인 장면에서 자신의 유니폼 앞을 잡아당겨서 부각시키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리고 세리머니를 하겠다는 건, 무조건 본인이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다.

“언제든지요. 10번 해도 10번 다 제가 이기죠. 이러면 관희한테 너무 잔인하네요. 그런데 관희도 그럴 거예요. 자기가 이길 거라고...”

 

#3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국 농구 선수들은 세리머니에 소극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주먹을 번쩍 쥐어드는 모습 외의 장면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공수 전환이 빠른 농구의 특성상, 득점 후에 바로 백코트를 해야 해서 세리머니를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고, 괜히 승부가 결정 나기 전에 액션을 취했다가 ‘쓸데없이 나댄 자의 비참한 이불킥 자료’로 박제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선형은 달랐다. 세리머니에 진심인 선수였다.

유니폼을 잡아당겨 앞으로 내미는 세리머니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결정적인 3점슛을 코너에서 성공한 후, 백코트를 주문하는 감독의 애타는 손짓에도 벤치 뒤쪽의 팬들을 바라보며 유니폼을 잡고 여유롭게 세리머니를 펼치던 루키였다.

“넣고 나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감독님이 백코트 하라고 하시는 줄 몰랐어요. 바로 앞에 있는 형들도 안 보이고 그 뒤에 팬들만 보였는데, 감독님이 보였겠어요? 세리머니가 조금 길었던 것 같아요. 다음에는 짧게 할게요.”

보통 “다음에는 얼른 백코트 하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김선형은 “짧게라도 하겠다”며 세리머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경기에서 그는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고, 여전히 유니폼을 잡고 펼쳐 보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이번에는 짧게 했어요”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다. 본인도 인정한 ‘극단의 자뻑’이 누그러들 중년으로 치닫고 있지만, 자신의 시그니처 세리머니를 만들어낼 만큼 세리머니에 정성이다. 정규리그 MVP에 오른 후, 시상식 단상에서도 여지없이 그 세리머니를 보였다. 동료들의 플레이에도 다양한 액션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자신감과 타고난 쇼맨십이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4
다시 긍정 대마왕으로 돌아가자. 신인 시절의 김선형은 고속 직진이 특기인 선수였다. ‘주변을 보지 못하고 경주마처럼 내달리기만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네, 저는 진짜 공만 잡으면 앞만 보이는 것 같아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예리한 한 방을 준비한 질문에 타격감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초긍정 방어다.

“확실히 긍정적인 면에서는 남다른 것 같아요. 분명히 상처받고 뒤에서 울 수도 있는 질문이나 평가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프로 1-2년차 때 제 야투가 굉장히 낮았어요. 그때 형들이 정말 많이 놀렸어요. 대표팀에서 형들이랑 3대3 같은 걸 하는데, 제가 볼을 잡으면 RA(Restricted Area) 지역까지 내려가서 수비를 하더라고요. 드레이먼드 그린이 웨스트브룩 수비하는 거 처럼요. 형들이 짓궂으니까 장난을 많이 쳤거든요. (양)동근이 형(현대모비스 코치)이 ‘발로 한번 쏴 봐라. 그게 더 나을 것 같다’고도 했는데, 전 그래서 발로 쐈어요. 놀리는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당하는 제가 타격감이 없으니 형들도 그 다음부터는 장난을 안치더라고요.”

“경주마 같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 경주마가 잘하니까 경기를 뛰는 거잖아요. 남들은 제 속도로 달려본 적 없잖아요. 그 속도면 경주마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요즘 200km로 달리다가 100km로 달리니까 잘 보인다는 말도 하는데, 사실 200km로 달릴 때는 앞만 보는 게 맞아요. 다른 데 보다가 돌이라도 밟으면 정말 큰 사고 나는 거거든요. 속도가 조금 떨어진 요즘은 주변이 정말 잘 보여요.”

그래서일까? 어시스트가 부쩍 늘었다. 득점과 어시스트는 커리어 하이다. 서른다섯에 커리어 하이를 쓰고 있으면 보통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 김선형은 이미 어려서부터 충분히 주목을 받은 선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하며 혼자만 시계를 멈춰버린 피터팬이다. 여전히 덩크슛을 성공하는 가벼운 몸놀림을 보면 정말 네버랜드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음... 그때는 전성기였고, 지금은 최전성기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밉지 않게 잘난 척 하는 것도 능력이다.

사진 = 강정호 기자, KBL 제공

②편에 계속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