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After Those Days

①편에 이어...

#4
내려놓고 쉬고 있었지만 농구 자체를 끊지는 않았다. 꼭 가고 싶었지만 합류하지 못한 월드컵도, 시즌 시작 후 정규리그도 챙겼다.

“월드컵은 정말 아쉬웠어요. 대회를 보면서도 많이 아쉬웠죠. 푸에르토리코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중국전은 많이 속상했죠. 중국이 우리한테 이기고 정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게 화면에 잡히는데 전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우리 대표팀이 정말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정규리그는 개막전이 아쉬웠어요. 2차 연장까지 가서 졌잖아요.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 경기를 이겼으면 시즌 초반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경기를 보다보니 제 이름이 정말 많이 나오더라고요? 당연히 나올 줄은 알았고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도 했는데, 너무 많이 나오는 거예요. 경기장에 붙어 있는 제 프로필 사진도 비춰주고...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데 한두 경기도 아니고 계속 그러는 게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현장에 없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건 코트에 있는 선수들인데 뭔가 잘못된 거 같았어요. 지려고 들어가는 선수는 없잖아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열심히 준비한 선수들이 주목받아야죠. 잘한 건 칭찬받고, 못한 건 지적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막상 거기에 없으면서도 내가 계속 주목 받는 게 미안했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경기를 안 봤는데, 엄마가 TV를 틀어놓으시니까 제 이름이 또 들리더라고요.”

 

#5
11월 30일, 처음으로 경기장에 모습을 보인 박지수는 12월 17일 하나원큐와의 부천 경기에 시즌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약 8분을 소화했다.

그렇게 예열을 한 박지수는 올스타전 휴식기 이전 마지막 경기였던 12월 25일 신한은행과의 경기에서는 2차 연장 포함 36분 55초를 뛰었다. 4위 싸움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였던 이 경기에서 KB는 신한은행에게 패했다. 이 결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4위 경쟁에서 KB는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KB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유는 박지수의 회복이었다. 휴식기를 거치면 박지수의 몸 상태가 더 좋아질 것이고, 박지수가 자신의 기량을 점진적으로 회복하면 KB의 위력 또한 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실제로 박지수는 올스타 휴식기 이후 열린 두 경기에서 모두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팀은 연승을 달렸다.

“후반기에 달라질 거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런데 크리스마스 때 신한은행 전부터 올스타 휴식기까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어요. 정말 회복이 쉽지 않더라고요. 웨이트를 하고, 농구를 하는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갔어요. 나는 변한 게 없는데 무게도 안 들리고, 훈련을 하는데 매치업 선수한테 밀리더라고요. 후반기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졌죠.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다시 마음을 잡았어요. 코트에 다시 복귀했을 때를 계속 떠올리거든요.”

그는 공백을 딛고 코트로 복귀했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너무 행복했어요. 낯설면서도 설렜고, 또 좋았어요. 그런데 마지막 4쿼터에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코트에서 뛰고 있는 양 팀의 모든 선수들이 이 시즌을 위해 비시즌의 힘든 훈련을 다 견디고 준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건데, 이유가 어쨌든 나는 그때 쉬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내가 복귀하자마자 작년만큼 하고 또 작년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건 욕심이고 같이 뛰는 선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복귀전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팀을 위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잘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 경기부터는 내가 어떤 걸 잘하는 것 보다 우리가 더 잘하고 우리가 더 자신감을 찾았으면 좋겠고, 내가 거기에 뭐라도 도움에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더 잘 풀린 거 같아요. 코트에 다시 선 것만으로도 뭉클했고 감동적이었어요. 항상 농구를 해왔고, 아무래도 직업이다 보니 내가 농구를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코트를 다시 밟으면서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이거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마음을 잊지 말고 계속 되새기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고 매일 저한테 반복하고 있어요.”

 

#6
복귀 후 그의 경기를 보면 이전보다 웃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는 물론, 아쉬운 플레이나 실수가 나와도 이전보다 많이 웃는다.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웃으려고 노력해요. 억지로라도 밝게 하려고요. 복귀 후 훈련 때나 선수들이랑 함께 있을 때도 그랬고 경기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나를 속이는 것도 있어요. 그렇게라도 웃으면 기분에 영향을 미치거든요. 이전에는 인상을 찡그린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안 되면 다음에 하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웃으려고 노력해요.”

어려서부터 관심의 집중이었던 박지수는 경기 중의 표정 하나만 갖고도 많은 구설이 생겼다. ‘어린 선수가 얼굴에 너무 감정을 드러낸다’부터 그로 인해 ‘건방지다’는 말도 나왔다. 사실 프로 무대에서 지적하기에는 너무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일찌감치 리그의 파괴자로 올라선 박지수에게는 유독 많은 지적이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고치려고도 했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표정도 지어봤는데 뭘 해도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까지 만들어지더라고요. 앞에서는 위로하고 격려해주면서 뒤에서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도요...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건너서 저한테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그 말을 저한테 전하는 사람도 싫었고요. 진짜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배운 거 같아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금은 냉정해지고 신중해진 것 같아요.”

한때 SNS에 박지수가 고통을 호소했던 글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여론은 도를 넘어선 악성 댓글이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사실 핵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시잖아요? 정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죠. 악플과 부담 때문이었다면, 이미 이전에 저는 여기 못 있었을 거예요. 그런 건 중학생 때부터 봤는데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 고통이었지만, 굳이 나서서 그 이유와 원인을 밝히지는 않았다. ‘악성 댓글과 선수로서의 부담’이 지목되며 박지수 스스로 멘탈이 약한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박지수와 함께했던 지도자들과 선수들은 박지수에 대해 “멘탈은 그 누구보다 강한 선수”라며,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이번 공황장애에 대해서도 이미 ‘어려서부터 많은 책임감을 안고 살아온 선수로서의 부담과 악성 댓글로 인한 상처가 이유’라고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 전문가들은 공황장애에 대해 ‘정확한 원인을 특정하기가 어렵고 불분명하다’며, ‘그래서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신중하게 치료해야 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박지수 역시 자신이 겪었던 이번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말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과거 상황의 원인을 악성 댓글로 특정 지었던 일부에서 다시 한 번 그 이유를 명명하고자 할 뿐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추측일 뿐이다.

“이기고 잘한 경기도 끝나고 나면 못한 게 먼저 생각났어요. 내가 부족한 점, 팀이 부족한 점이 먼저 떠올랐고요. 작년에 (강)이슬 언니가 ‘잘 한 건 잘했다고 해도 된다. 인터뷰 할 때 잘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시즌 내내 말해주면서 조금씩 변할 수 있었어요. 전에는 주변에서 칭찬을 해줘도 못한 게 먼저 떠올라서 스스로 칭찬하는 게 용납되지 않았거든요. 이슬언니 덕분에 내가 잘한 부분은 나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어야 강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박지수의 당면 과제는 체중 증량이다. 김완수 감독은 물론 박지수와 경기를 펼친 상대팀 지도자들도 현재 박지수의 몸 상태에 대해 정상일 때의 60% 정도라고 평가한다. 박지수 본인의 생각도 같다. 한참 좋았을 때보다 체중이 8kg가 모자란다.

“아픈 동안 음식이 안 받더라고요. 저는 정말 소식자들을 이해 못했거든요. 배불러도 맛있으면 더 먹었어요. 먹는 행복이 없으면 삶에 무슨 행복이 있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픈 동안에는 하루 종일 한 끼도 안 먹은 적도 있어요. 음식 자체가 싫었어요. 배는 고픈데 음식을 보면 먹기 싫고, 넘어가지도 않더라고요. 엄마가 ‘제발 한 끼라도 먹으라고, 죽지 않을 만큼이라도 먹으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그래도 복귀하고 체중이랑 근육량을 어느 정도 회복했거든요. 근육량은 차이가 안 나는데 체중이 8kg 정도가 모자라요. 구단에서도 체중을 늘리라고 배려해주시고 식사 때마다 저한테는 계속 고기를 주시는 데 생각보다 체중이 빨리 안 올라오네요. 원래 잘 찌는 체질인데...”

WKBL 전인미답의 고지인 정규리그 7관왕을 2년 연속으로 차지한 박지수는 남들보다 늦게 이번 시즌을 시작했다. 13경기를 먼저 결장해, 남은 경기를 모두 뛰어도 개인상과 관련해서는 어떤 순위에도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농구화 끈을 고쳐 맨 시점의 박지수는 이전과 같은 목표를 전했다.

“상황이 힘들다는 건 알지만 목표는 당연히 플레이오프에요. 플레이오프에 나가면 이기고, 또 챔프전에 나가서 우승하는 게 목표죠. 미국 도전도 마찬가지에요. 시즌을 마치면 손가락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즌 후의 일정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은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좌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욕심이 워낙 많아서 속상하긴 하겠지만,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욕심만으로 닿을 수 없는 영역도 있다는 걸 이번에 느꼈거든요.”

 

안타깝게도 이런 박지수의 목표는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 1일 하나원큐와의 경기에서 손가락을 다치며 박지수는 다시 전력에서 제외됐다. 좌측 중지 탈골에 의한 인대 손상이 확인 되어 수술대에 올랐고, 결국 시즌 아웃됐다. 원래 부상을 안고 있던 곳을 다친 것이다. 이번 시즌을 마치면 수술을 할 예정이었는데, 결국 일정을 앞당기는 결과가 됐다.

박지수의 부상과 더불어 마지막 힘을 내던 KB의 플레이오프 도전도 막을 내렸다. 김민정도 부상을 당하며 전력에서 제외됐다.

KB는 1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디펜딩 챔피언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는 지난 해 삼성생명에 이어 WKBL 역대 두 번째다. 박지수와 KB에게 부침이 많았던 2022-23시즌도 이제 한 경기만을 남겨놓고 있다. 승부욕이 강한 그에게, 그리고 통합 우승으로 지난 시즌 왕좌에 올랐던 KB에게 자존심 상한 결과다. 하지만 박지수는 실패에도 좌절이 아닌 도전을 말한다.

“지난 연말에 나이키 행사를 가서 선수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때 정말 제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걸 느꼈어요. 지소연(여자축구, 수원FC 위민) 언니를 만났는데 정말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언니는 해외리그를 뛰면서 성공도 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마지막에 우리나라 리그로 돌아와서 뛰고 있잖아요? 언니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어요. 해외에서 겪은 언어적인 부분이나 문화의 차이, 생활의 문제나 차별 같은 것들이 제 상황이랑 비슷하더라고요. 그런데 언니는 다 이겨낸 거죠.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A급과 B급이 또 이렇게 나뉘는구나’, ‘내가 많이 모자라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 사실 미국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꿈의 무대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한테는 좋은 기억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소연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부족했다는 걸 느꼈어요. 언니는 힘든 상황에서도 실력으로 증명을 했고, 그걸 통해 그 나라 선수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잖아요. 그들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하고 그들이 나한테 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내가 한참 멀었다는 걸 다시 느꼈죠. 다시 미국에 가게 된다면 그것도 다시 도전하고 싶어요. 전과 다른 한 해, 한 시즌을 보냈지만 목표는 다르지 않습니다. 늘 그랬듯이 똑같이 도전할게요.”

프로 데뷔 후 가장 짧은 한 시즌이었다. 하지만 박지수에게는 가장 길었던 한 시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프로 데뷔 후 정말 가장 긴 비시즌이 다가온다. 시간의 물리적인 길이만 다를 뿐, 그에게는 똑같은 계절일 수 있다.

휴식과 함께 진료와 상담은 계속될 것이다. 재활과 몸 만들기, 그리고 컨디션 찾기도 필요하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대표팀에도 박지수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늘 그랬듯, 그는 그를 필요로 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제는 전보다 더 밝은 미소와 행복이라는 단어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얼굴로, 코트 위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박지수가 되기를 기대한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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