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에 이어...
십자인대파열, 그리고 극복

선수에게 닥치는 가장 큰 위기 중 하나가 부상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 부상이다. 하지만 평생을 부상 없이 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몸 관리를 다부지게 해도 어느 때, 갑자기 불쑥 찾아올 수 있는 것이 부상이기 때문이다.

김진희도 그랬다.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아시안게임에 다녀온 뒤 김진희에게도 조금씩 기회가 주어졌다. 비주전급 선수들,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우리은행에서 힘든 경쟁을 이기고 1군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2018-19시즌 총 11경기 출전. 평균 출전 시간은 4분 46초였다. 

확실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었지만 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김진희의 가능성을 확인한 위성우 감독은 새 시즌에 김진희의 활용폭을 더 가져가겠다는 구상을 했다. 드디어 김진희에게도 확실한 기회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불의의 부상이 김진희를 덮쳤다.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릎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처음에는 내측 연골이 조금 다쳐, 3주 정도 재활하면 나아진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재활 후에도 경과가 좋지 않았다.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지만 넘어지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 다시 찾은 병원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기 중에 갑자기 파열된 것도 아니었고, 재활 후에 몸이 안 좋다는 느낌이 있어서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 때문인지, 그렇게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어요. 제가 잘하다가 다쳤으면 좌절도 했겠지만, 보여준 것도 없이 다치기만 했으니까 위기감이나 절망감이 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수술 후, 재활을 거치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여자농구에서 가장 강도가 높다고 정평이 난 우리은행의 팀 훈련과 체력 훈련을 거치면서도 특별히 울어본 기억이 없다는 김진희는 재활 때는 운적도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큰 부상을 겪고 복귀한 선수들은 재활 과정이 정상 훈련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김진희 역시 그런 시기를 거친 것이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훈련은 몸이 고되지만, 재활은 정말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뛰어다니고 점프해야 하는 농구 선수가 발을 딛는 것도 제대로 못하니까, 불안감이 커질 수 밖에 없죠. ‘복귀할 수 있을까?‘, ‘다시 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움직여진다 싶으면 몸도 힘들어져요. 나중에 유산소 훈련을 시작하면 육체적으로도 정말 힘들거든요.”

정신적으로 무너질 뻔 했던 시기. 김진희에게는 베테랑인 김정은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때 재활을 (김)정은 언니랑 같이 했거든요. 언니는 정말 멘탈이 강한 것 같아요. 옆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좋은 얘기도 많이 해줬고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고, ‘넌 결코 여기서 쓰러질 애가 아니’라고 많이 북돋아줬어요. 힘들어 할 때마다 언니가 제 자존감을 높여주면서 용기를 주고, 힘을 내게 해줬죠.”

재활의 과정은 결국 김진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김진희는 자신이 인생경기를 펼쳤던 순간 보다, 부상 복귀 후 시즌을 준비했던 과정이 더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한다.

“모든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어요. 훈련은 힘들죠. 힘든 건 당연하죠. 그런데 다시 두 발로 뛸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거든요. 힘들 수 있다는 것조차 고마웠어요.”

그렇다면, 다가오는 이번 비시즌 체력 훈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을까?

“아니요! 그건 내려놓고 있어요. 그 훈련은 매년 해도 어쩜 할 때마다 새롭고 계속 적응이 안 될까요? 그냥 다 내려놓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김진희의 2020-21시즌
처음 언급했던 지난 시즌으로 돌아가자.

개막전에서 25분 남짓을 뛴 김진희에게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의 (박)혜진이가 계속 뛰었다면 오히려 경기를 내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진희가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했고, KB도 진희에 대해서는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보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며 25분 동안 무득점에 그친 선수를 추켜세웠다.

김진희는 5일 뒤 열린 신한은행과의 경기에도 교체로 출전했다. 1쿼터에 3점슛 2개를 성공했고, 30분을 넘게 뛰었다.

데뷔 후 3년 동안 총 52분 32초 출전에 그쳤던 김진희는 2020-21시즌, 두 경기 만에 이전 출전 시간을 뛰어넘었다. 다음 경기였던 BNK와의 경기부터는 주전 가드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에이스 박혜진이 빠졌지만 우리은행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빠르게 궤도에 올라섰다.

“‘(박)혜진 언니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너는 너의 역할을 하면서 너의 자리를 뛰는 거지, 혜진이의 자리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경기를 뛰면서 혜진 언니를 대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생각이었죠.”

박혜진이 갖고 있는 득점력과 지배력, 그리고 해결사 본능. 분명 김진희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김진희는 조용하고 꾸준하게 팀의 리딩 가드 역할을 했다. 자신의 부상으로 기회를 얻어 묵묵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후배 김진희를 보며 박혜진은 “솔직히 조금도 놀랍지 않다. 연습 때도 항상 느꼈던 부분인데, 진희는 원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렇게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며 믿음을 나타냈다.

여전히 1군 무대가 낯선 듯한 모습도 있었다.

김진희는 지난해 11월 30일, 삼성생명과의 경기에서 종료 1분 36초를 남기고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득점을 성공했다. 승리를 확신한 팀 동료 김소니아가 달려와 세리머니를 펼치며 포효했고, 위 감독은 작전타임을 위해 벤치로 들어오는 김진희를 안아줬다. 그러나 김진희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뭘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플레이가 아니었거든요.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었고 그냥 플레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였어요. (김)소니아 언니가 달려와서 몸을 부딪치는 데 솔직히 놀랐죠. ‘어? 이 언니 왜 이래’ 하는 생각이었어요. 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저도 놀라지 않고 같이 세리머니를 할 수 있을텐데, 그 후로는 그럴 기회가 없었네요. 하하. 감독님이 안아주셨을 때도 많이 놀랐죠. 그런데, 제가 그 장면을 나중에 다시 봤는데, 그렇게 소름끼치게 잘 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해서 그렇게 반응하신거지, 혜진 언니나 (김)정은 언니가 했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을 거 같아요.”

1군 무대에 적응을 마친 김진희는 BNK와의 4라운드 경기에서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한 달 여 뒤, 신한은행과의 6라운드 경기에서도 또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김진희는 이전 두 시즌 동안 기록적인 도움 행진을 펼친 안혜지(BNK)와 어시스트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BNK와의 맞대결에서 8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하며 경기당 5.47개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주축 멤버로 처음 이름을 올린 시즌에 타이틀 홀더로 우뚝 섰다.

“너무 감사한 시즌이죠. 처음에는 경기당 5분만 뛰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많은 기회를 받아서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요. 제 인생에 잊지 못할 한 시즌이에요. 저희 체육관에 우승기가 많이 걸려 있는데 그 중에 제가 같이 뛰면서 이룬 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드디어 하나가 생겼네요.”

 

또 한 번의 발전을 꿈꾸며
만족스러웠지만 아쉬움도 있다. 김진희는 2020-21시즌을 행복한 시즌이라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부족하다는 걸 너무 많이 느껴서 여러 감정이 왔다갔다 했다”고 되짚었다.

김진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정확했던 야투율이다. 김진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지만 여러 차례 슛 폼 교정을 시도하면서도 야투율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특히 3점 성공률은 19.3%에 머물렀고, 자유투도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47.7%)

“마음고생이 심했죠. 수비가 저를 버리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대놓고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너무 철저히 버리니까, 심리적으로 더 흔들리더라고요. 결국 시즌 끝날 때까지 극복을 하지 못했어요.”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2020-21시즌. 김진희에게 남은 아쉬움은 정규리그에서 우승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떨어졌던 아픈 기억, 그리고 상처가 될 만큼 트라우마를 안겼던 야투 부진이었다.

“우승하고 싶죠. 당연히 목표에요. 그런데 그걸 제 개인 목표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우승하고 싶다고 팀을 우승시킬 수 있는, 그런 선수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고, 그 부분을 완벽하게 잘하고 싶어요.”

지난 시즌 우리은행은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최이샘을 시작으로, 박혜진, 김정은 등 주축 선수들이 돌아가며 결장했다. 김진희가 단번에 주전으로 올라서서, 많은 시간을 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이 정상적으로 복귀한다면, 김진희의 출전시간은 지난 시즌에 비해 크게 줄어들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진희는 상관 없다는 입장이다. “출전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김진희는 여전히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야투 능력을 키워야죠. 가드가 패스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슛이 연습만으로 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연습도 많이 하면서 자신감도 가져야 하는데, 자신감을 갖는 게 쉽지 않네요. 제가 참 자기애가 많은 편인데, 유독 농구를 할 때는 그게 없어져요. 하하.”

그래서 새 시즌 목표는 명료하다. 더 이상 ‘진희는 놔두라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겠다는 것. 적어도 경기당 1.5개 정도의 3점슛은 꾸준히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0경기를 모두 출전에 평균 1.5개의 3점슛을 성공한다면 시즌 3점슛 개수는 총 45개. 리그 6-7위 권에 드는 성적이다.

성공률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섰다. 25% 정도를 목표로 하겠단다. 김진희의 프로 통산 3점슛 성공률이 20%에 못 미치고 있긴 하지만, 25%라는 목표도 결코 높은 수치는 아니다.

“저도 더 잘하고 싶죠. 그런데 한 번에 확 좋아진다는 건 너무 욕심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씩 꾸준히 계속 발전하는 선수가 되려고요. 그렇게 매년 좋아지면 나중에는 훨씬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겠죠? 일단은 상대가 아예 저를 버리고는 갈 수 없을 만큼 확률을 올리는 것부터 하고 싶어요. 떨어지더라도 손은 들어줄 수 있는... 그 정도... 랄까요?”

지나치게 소박한 목표일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선수 김진희가 성장해 온 길이자 방법일지도 모른다.

고교시절, 프로 무대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수가 일련의 시간을 보내며 정규리그 우승팀의 한 축으로 올라섰다. 김진희에게는 길고도 험했던 시간이었겠지만, 성장폭을 감안할 때 결코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고 할 수 없다.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그렇게 자신의 목표를 한 발 한 발 높여나간 김진희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다음 시즌, 또 한 번의 도약과 함께 해피앤딩으로 향하기를 응원한다.

사진 = 이현수 기자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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