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깜짝 등장이었다.

2020-21시즌의 개막전이었던 청주 KB스타즈와 아산 우리은행의 경기. 오랫동안 리그의 양강으로 군림하던 두 팀이 청주에서 맞붙었다.

우리은행의 통합 6연패에 마침표를 찍고 창단 첫 우승을 달성했던 KB는 2019-20시즌이 코로나19로 인해 조기 종료되며, 챔피언결정전에서 승부수를 던져보지도 못한 채, 우리은행에게 정규리그 1위를 내주고 시즌을 마쳤다. 이후, 대회 타이틀스폰서로 공식 개막전의 주인공이 된 KB는 파트너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우리은행을 지목했다.

정규리그 2연패에 실패한 KB는 와신상담, 팀의 핵심인 박지수가 WNBA 리그를 한 해 쉬며 칼을 갈았고, 주장 강아정도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비시즌을 보내 자신감이 높았다. 반면, 우리은행은 주장이자 팀의 중심인 박혜진이 족저근막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며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경기 시작 4분 45초가 지났을 때, 결국 사단이 났다. 발바닥 통증을 느낀 에이스 박혜진이 코트에서 물러났다. 위성우 감독보다 우리은행에 오래 있었던 유일한 현역 선수 박혜진이 더 이상 뛸 수 없는 상태였다. 박혜진을 대신해 투입된 선수는 김진희. 우리은행 팬들에게도 낯설었을 23살의 김진희는 프로 데뷔 후, 가장 이른 시간에 코트를 밟는 경험을 하게 됐다.

25분 6초를 뛰며 무득점. 슛 4개를 시도해 모두 실패.

하지만 2개의 리바운드와 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김진희는 무리 없이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펼쳤고, 6-9로 끌려가던 우리은행은 끝내 승부를 뒤집으며 71-68로 개막전을 이겼다.

한 시즌을 마치면,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정리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주인공들도 등장한다. 매년 새롭게 떠오르는 선수들에게 우리는 ‘신데렐라’라는 표현을 쓴다.

나름의 고난과 역경을 딛고, 프로의 높은 벽을 뛰어 넘어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새로운 스타들. 우리은행 김진희는 WKBL 2020-21시즌, 이런 과정을 거쳐 스스로를 각인시킨 선수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이색적인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취준생 김진희, 대학을 거치며 거듭난 유망주
여자농구 선수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프로에 입단한다. 개인적인 선택으로 대학을 거치는 선수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프로에 갈 수 있는 실력이 아니어서 대학을 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김진희는 대전여상을 졸업한 후 광주대를 선택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취업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프로에 갈 실력도 아니었고, 대학가서 농구하는 것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광주대 국선경 감독님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대학 졸업장은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셔서, 그래서 대학을 갔어요. 처음엔 대학 졸업하고 취업할 생각이었죠.”

김진희 역시 그의 동기들이 프로 무대에 도전하던 시절에는 함께 이름을 올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잔인하게 잘라 말하자면 프로에 뛰어들기에는 실력 미달이었다는 이야기다.

김진희의 동기들은 2015년 드래프티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드래프트를 통과한 선수 중 현재 프로에 남아있는 것은 안혜지, 김진영(이상 BNK), 이하은(하나원큐). 김연희(신한은행) 등 단 4명뿐이다. 고3시절 김진희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있게 이름을 내밀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구 선수로서의 목표보다 장래를 위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해 광주대를 향한 김진희의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됐다. 김진희 입단 후, 광주대는 대학 무대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대학리그 사상 최초의 전관왕을 달성했고, 패배를 모르는 질주를 이어갔다.

농구공을 내려놓고 취업을 생각했던 168cm의 가드는 졸업도 하기 전, 3학년을 마치고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2017~18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우리은행에 지명됐다.

“일단 우리은행이 저를 지명했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대학 때 프로팀이랑 연습경기를 하면서, ‘프로 지원해도 되겠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사실 우리은행이랑은 연습경기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뽑혀도 KB나 하나원큐, 아니면 신한은행에서 뽑아주시지 않을까 했는데 우리은행이 저를 선택해서 정말 의외였어요.”

우리은행의 선택이 뜻밖이었을 뿐, 그 외에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는 김진희. 다만 자신이 우리은행에 지명된 후, 다른 선수들이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다소 남달랐다고 한다. 앞서 선발된 선수들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는 것.

“뭐랄까... 약간 ‘잘 가라, 친구야’하는 느낌으로 웃더라고요. 왜 그러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딱 숙소에 들어오는 날 알았죠. 아... 다르구나... 라고... 제 기억이 맞으면 팀 숙소에 처음 들어온 날이 청주에서 KB한테 졌던 날이었을 거예요. 버스 안이 정말 조용했어요. 숨소리가 다 들릴만큼... 진짜 적막하다고 해야 하나? 저희 대학교때는 정말 시끄러웠거든요. ‘프로는 완전히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프로도 프로지만, 특히 우리은행 특유의 진지함과 묵직함이 다른 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언제 깨달았을까?

“아. 바로 알았죠!!! 얼마 안 걸렸어요. 다른 친구들, 지인들이 다른 팀에 있으니까 저도 듣는 게 있잖아요. 바로 알았어요! 하하.”

 

3X3국가대표
프로에 입단한 김진희는 1군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기도 전에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지금까지 하던 일반적인 농구가 아닌 3X3이었다.

김진희는 2018년, 제18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3X3 농구 여자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프로 입단 후, 정규리그에 단 1경기도 나서지 못했던 김진희가 국가대표에 먼저 가게 된 것이다.

“대표팀에 뽑히니 좋았죠. ‘보여준 게 없는데 어떻게 뽑힌걸까‘ 같은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그때 1군 경기는 못 뛰어도 3X3 경기는 자주 나갔거든요. WKBL에서 하는 트리플잼도 있었고... 그런 경기를 (최)규희랑 많이 뛰었기 때문에, 그래서 뽑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진희는 당시 팀 동료였던 최규희(은퇴), 김진영(BNK), 박지은(KB)과 함께 3X3 대표로 선발됐고, 대만에게 패하며 4강에 오르지 못했다.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확실히 3X3이랑 제가 하던 농구는 차이가 있었어요. 3X3도 재미있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저는 지금 하는 농구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아시안게임 때 김화순 선생님이 감독으로 가시면서 훈련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결과는 아쉬웠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여자농구 3X3도 많이 활성화되고 있다. 은퇴 후 3X3 농구를 하는 선수들도 속속 등장한다.

일반인들도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이는 남자 3X3과 달리 여자농구는 여전히 선수 출신들이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3X3 농구도 3X3만의 매력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고 말한 김진희도 나중에 은퇴한 후, 3X3 농구를 할 생각이 있을까? 김진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은퇴하면 농구 안 할 겁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②편에서 계속...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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