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에세이 ‘단편’(斷片/短篇) 
| The Winner Takes It All
| 빼앗긴 왕관을 겨냥하는 겨울 여왕의 毒氣

 

[루키=박진호 기자] ①편에 이어...

#5
박지수는 WKBL에서 4번째 시즌을 마감했다. 리그 100경기를 넘게 뛰어, 이제는 ‘어린 선수’라는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해 WKBL 역대 최연소 통합 MVP에 올랐던 박지수는 다시 MVP 트로피를 찾아간 박혜진(우리은행)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에이스이자 여왕의 자리를 다투는 또 하나의 태양이다.

‘한국 여자농구의 미래’였던 그는 이제 ‘현재’가 됐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 “도무지 잘하는 게 없다”며 자신에게 인색하기로 소문난 박혜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여왕의 마인드는 일치하는 모습이다.

“프로에 와서 나아진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스트레스에요. 이번 시즌은 더 그랬어요. 부상은 핑계고, 저 스스로 인정해야 할 거 같아요. 뭐가 늘었는지 모르겠고, 내가 뭐를 잘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아요. 지난 4년 동안 발전과 성장은 못 하고, 정체와 퇴보만 한 것 같아요. 피벗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정은순, 정선민 선배님들처럼 득점을 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시스트가 정말 좋은 것도 아니고요... ‘그냥 이것저것 조금씩만 하는데 그냥 키가 커서 버티는 건가’ 하는 생각도 많아요.”

“프로에서 제 플레이가 만족스러웠던 경기는 10%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솔직히 수비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몸이 안 되니까, 작년까지는 따라가서 막던 것도 못 막았어요. 수비마저 이러면 대체 나한테는 뭐가 남는 걸까요? 저는 정말 듣기 싫은 소리가 ‘키 때문에 그만큼 한다’는 말이에요. 다른 선수한테 ‘내가 너만큼 크면, 너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이런 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부분인데, 그런 사람들의 말처럼 되는 것 같아서 정말 싫었죠.”

발전 없는 4년 동안의 정체. 키를 제외하면 특별한 장점이 없는 선수. 이런 표현이 현재의 박지수를 설명하는 요약일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이들의 판단이 더 객관적일 수 있기에, KB가 아닌 다른 팀, 그리고 객관적 위치에 있는 관계자들에게 박지수의 혹독한 자기 평가를 전달해봤다.

- 늘지 않았다? 신인 때 영상을 봐라. 지금이랑 다른 선수다. 슛 하나만 놓고 봐도 타이밍이나 슛 거리, 안정감이 훨씬 좋아졌다. 키만 크다? 운동 능력도 좋다. 순발력이 조금 떨어지는데, 그건 농구선수치고 조금 떨어지는 거지, 센터치고는 엄청 좋은 거다. 순발력까지 정상급이었으면 WNBA에서도 주전 뛰면서 20점씩 넣었을 거다. 리바운드랑 블록슛이 키만 크다고 되는 게 아니다. 패스는 전주원 코치도 ‘가드 패스’라고 인정한다. WKBL에 오는 지금 외국인 선수들이랑 비교해도 박지수는 최상급이다. 실력, 재능, 인성, 노력, 마인드, 모든 걸 갖춘 선수다. 대표팀에서 지수를 가르쳐봐서 아는데, 지수를 데리고 있어 본 감독은 절대로 지수를 못 버린다. 다른 팀 못 준다. 라스베이거스 감독도 박지수를 트레이드 안 시키지 않냐? 그 감독도 아는 거다. 같이 뛰어보고, 가르쳐보면 박지수가 왜 대단한지, 확실히 알게 된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는 걸 듣기만 해도 상대 팀 감독으로서는 무섭다.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

-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로, 박지수가 얼마나 좋은 선수인지 알 수 있다. 박지수는 실력이나 가진 조건도 좋지만, 경기에서의 집중력이나 투지가 정말 대단한 선수다. 훌륭한 선수를 더욱 대단하게 만드는 요소다. 지금 우리나라 최고 선수인데, 그런 선수가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코트에서 그렇게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마인드가 된 선수다. 이런 선수가 많지 않다. 박지수와 같은 마음가짐이나 자세를 갖고 경기를 뛰는 선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 (임근배 삼성생명 감독)

- 지난 시즌에 몸이 안 좋으면서 생각대로 잘 안 되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한 거 같다. 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분명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는 것도 맞다. 종종 팬들의 지적이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는데, 그만큼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박지수가 국가대표에서 보여준 모습을 WKBL에서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발전 속도가 주변의 기대에 못 미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전하고 있고, 가능성도 여전한 선수다. (김은혜 KBSN 해설위원)

- 박지수의 장점은 그냥 키가 큰 게 아니라, 그런 가운데 신체 밸런스도 정말 좋다는 거다. 키만 큰 선수가 아니라, 큰 키와 함께 많은 장점을 갖고 있고, 또 발전하는 선수다. 보통 신장에 약점이 있는 선수들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단지 키가 작아서’라고 핑계를 댄다. 자기가 ‘지금의 운동 능력과 신체 밸런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박지수만큼 키가 자란다면’이라고 가정을 한 건데, 키가 점점 자랄수록 운동능력과 밸런스를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 한계가 얼마나 크고, 그걸 극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까 감히 그렇게 말 하는 거다. 박지수에게 키에 대해 말한 선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키만 자란다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단호하게 말해주고 싶다. (정진경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6
자칭 ‘4년간 발전이 없었던 선수’는 스스로가 지적한 정체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리그 개막이 불확실한 WNBA 무대를 한 시즌 쉬기로 한 것이다. 이번 여름, 박지수는 미국행을 택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KB의 비시즌 훈련에 동참한다.

“우리가 1위를 놓친 가장 큰 이유는 저죠. 저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염)윤아 언니도 부상이 있었지만, 리그 휴식기랑 부상으로 빠진 시기가 겹쳤잖아요? 실제로 결장한 경기 자체는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중요한 시점에 빠지면서, 팀에 큰 피해를 줬어요.”

지난 시즌 박지수는 완전하지 못한 몸 상태의 한계를 절감했다.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WNBA 리그를 마친 뒤 귀국한 후, 짧은 휴식기를 가지며 팀 동료들과 같은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 완벽한 준비를 마치지 못한 채 시즌을 시작했다. 많은 관계자들이 박지수의 몸 상태에 대해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런 가운데, 시즌 중 대표팀 일정도 겹쳤다.

시즌 도중 부상으로 경기에 결장하기도 했다. WKBL 무대에 데뷔한 이후, 박지수가 부상으로 장기간 결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시즌에 임한 것도 부상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즌을 제대로 치르기 위한 비시즌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연히 미국에 가고 싶죠. 그런데, 이번에 진짜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정말 크게 느꼈거든요. 몸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프로 와서 비시즌 훈련은 신인 때 딱 한 번 해봤는데, 몸은 확실히 그 시즌이 가장 좋았어요. 진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할 거예요. 몸을 제대로 만들어서 시즌 개막을 준비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미국에 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훈련을 하더라도, 저한테는 손해일 게 없어요. 오히려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해요.”

몸을 만드는 것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문득, 박지수에게 언더슛과 훅슛에 대해 이야기를 던져봤다. 

“어려서부터 점프슛이 더 익숙하고, 처음에 몇 개 안 들어가다 보니까 팀에서도 수비를 달고 쏘는 걸 더 많이 하라고 주문하셨어요. 안 들어가도 꾸준히 시도해야 하는데, 팀이나 저나 여유가 없었죠. 사실, 개인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국제대회나 WNBA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몸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골 밑에서의 다양한 슛 기술을 장착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했는지 모른다. 박지수는 지난 2년간, 리그 개막이 임박했을 때 팀에 합류했다. 필요한 개인 훈련에 매진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연마할 시간은 부족했다. 미국에서도 어려움은 마찬가지. 한국에서처럼 지도자가 꾸준히 붙어서 세세하게 살펴주는 문화와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비시즌은 다르다.

“저도 스텝을 이용하고, 언더슛이나 훅슛을 할 줄 아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걸 하면 더 좋은 선수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할게요. 할 거예요. 다음 시즌에 바뀌어 볼게요.”

지난 시즌 하반기에 눈길을 끌었던 3점슛도 다음 시즌에는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창 시절 곧잘 3점슛을 던졌던 박지수는 WKBL 입성 후 최대한 3점슛을 자제했다. 신장의 압도적인 우위를 활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WNBA는 달랐다. 라스베이거스의 빌 레임비어 감독은 박지수에게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 있게 슛을 시도하라고 주문한다. 박지수는 라스베이거스 선수들끼리 3점슛 내기를 할 때도 아무 위화감 없이 탑에 서서 미션을을 성공하곤 했다.

“빌 레임비어 감독님은 제가 정말 슛이 좋다고 생각하시거든요. 안덕수 감독님도 지난 시즌에는 슛을 적극적으로 던지라고 하셨어요. (다미리스) 단타스처럼 팝 아웃해서 쏘라고도 하셨는데, 제가 만약 그걸 놓치면 리바운드까지 뺏길 거 같아서 적극적으로 못 했어요. 그래도 그전 시즌보다는 늘었잖아요? 내년에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7
프로에 와서 자신의 플레이에 만족한 경기가 10% 정도라고 혹평한 박지수에게 만족의 기준은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만족은 스탯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매 경기 더블더블을 한다고 만족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족하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기가 어떤 거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어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일단은 무조건 이겨야겠죠? 진 경기는 의미 없어요. 무조건 이겨야 해요! 제가 공격력이 좋은 건 아니니까...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저 스스로 만들어서 성공하는 득점이 최소 3개는 나와야겠죠. 받아먹는 거 빼고요. 수비는 제가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경기를 해야 해요. 공수에서 이런 플레이를 기본적으로 해야 하고, 볼을 빼주는 것도 패스를 받은 선수들이 바로 득점으로 올라갈 수 있게 줘야겠죠.”

‘스탯과 만족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말은 리바운드와 블록슛 1위 자리를 이미 예약해놓은 입장에서 나오는 여유일지도 모른다. 개인 기록에 욕심이 없다면서도 박지수는 “언젠가 꼭 한 번, 득점상을 받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중학교 이후 득점상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란다. 하지만, 박지수가 가장 욕심을 나타낸 상은 윤덕주상. 가장 공헌도가 높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박지수는 2017-18시즌 이후 2년 연속으로 이 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는 이 부문 5위에 그쳤다. 부상으로 인한 결장에 발목을 잡혔다. 윤덕주상은 평균 공헌도가 아닌 공헌도 총점을 기준으로 한다. 박지수의 지난 시즌 경기당 평균 공헌도는 외국인 선수를 포함해도 전체 1위였다. 그러나 박지수는 평균 공헌도에는 의미를 두지 않았다.

“MVP보다 더 받고 싶은 상이예요. 윤덕주상은 꾸준해야 받을 수 있는 상이니까, 평균은 의미 없어요. (박)혜진 언니처럼 꾸준히 뛰는 게 좋은 선수의 가장 큰 조건이잖아요. 그것만큼은 누구한테도 밀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부상으로 못 뛸 거였으면, 결장했더라도 다른 선수들한테 지지 않을 만큼 공헌도가 높았어야죠. 그게 아니라면 아프지 말아야 했고요. 제가 부족하다는 증거예요.”

 

#에필로그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standing small beside the victory. That's her destiny.’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4인조 그룹 아바(ABBA)가 1980년 발표한 곡이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주크박스 뮤지컬’ <맘마미아>의 넘버인 ‘The Winner Takes It All’의 가사 일부다. 

곡을 발표하기 전, 아바의 동료 멤버이기도 한 비요른 올바에우스와 이혼을 선택했던 아그네사 펠트스코크가 무대에서 느낀 감정, 그리고 <맘마미아>에서 도나 셰리던이 토로하는 심정이 지금의 박지수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영광은 승리자의 것이며, 2등조차도 패배자의 초라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야말로 2019-20시즌이 박지수에게 준 처절한 교훈이기에, 메시지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승이요. 죽어도 우승해야 해요. 우승을 못 하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요. 다른 어떤 성과도 용납이 안 돼요. 개인적인 걸 다 이뤄도 우승을 못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진짜 이 악물고 꼭 우승하고, 스스로한테 ‘수고했다’ ‘잘했다’라고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저를 인정할 수 있는 시합을 많이 하고요. 처음으로 그런 시즌을 치렀으면 좋겠어요.”

WKBL은 다음 시즌을 외국인 선수 없이 치르기로 했다. 팀 전력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외국인 선수 제도가 사라지며, 어느 정도 지각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박지수다. 인사이드에서 대항마가 없는 박지수의 위력이 더욱 배가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이전까지 국내 선수만 뛰던 2쿼터에 KB는 물론 박지수 또한 압도적인 강점을 보이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오히려 KB가 수세에 몰릴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과 이전에 확실한 것은 ‘리그의 지배자’ 중 한 명인 박지수가 예년과 달리, 비시즌 훈련을 통해 오롯이 WKBL 시즌만을 겨냥한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주축 선수들의 늦은 합류로 인해 시즌을 치르며 경기력을 끌어올려야 했던 KB가 이번에는 개막 시점에 선수들의 컨디션을 맞춰 시즌을 준비한다는 것도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다. 

우승을 하고 싶었던 소녀는 꿈을 이뤘다. 화려한 대관식을 통해 겨울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에 너무 일찍 균열이 생겼다. 그는 꿈의 무대였던 미국에서의 한 시즌을 양보했다. 이제 그에게 우승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절실함의 깊이가,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졌다. 

여왕이 던진 한마디, ‘오로지 우승’은 결국 ‘모든 것을 갖겠다’는 선언이다. 양보 없이 모든 걸 소유하고자 하는 박지수가 독을 품고 맞이하는 치열한 여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The game is on again. The winner takes it all.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ck17@rook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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