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에세이 ‘단편’(斷片/短篇) 
| The Winner Takes It All
| 빼앗긴 왕관을 겨냥하는 겨울 여왕의 毒氣

 

[루키=박진호 기자] 휴가 기간의 박지수는 시즌 때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평소 1cm라도 자신의 키를 줄여 말하려고 기를 쓰는 그가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났다. 땅에서부터 머리끝이 2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서 있든, 앉아 있든 그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우러러봐야 한다. 목 디스크를 인내하며 목덜미가 뻣뻣해질 때까지 경청한 대가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교복을 입고 프로 지명을 받던 때처럼 그는 여전히 웃음이 많았다. 판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는 돌연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함축할 수 있는 단어로는 ‘결연함’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서글서글한 대화 속에도 살벌한 독기를 감추지 않았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프롤로그
2000년대 중후반 이후, WKBL의 역사는 ‘독주’(獨走) 로 정리할 수 있다. 화려함의 절정을 자랑했던 신한은행은 ‘레알’이라는 이름을 달고 6년간 리그를 호령했다. 피폐한 꼴찌로 내던져졌던 팀은 ‘레알 신한’의 참모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후, 역성혁명을 완성했다. 그들은 ‘우리은행 왕조’로 새로운 깃발을 들어 다시 6년의 독재를 이어갔다. 신한은행은 정상에 있던 6년간 210경기에서 171승을 챙겼고, 뒤를 이은 우리은행 역시 6년간 같은 210경기에서 167승을 수확했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독주의 역사는 12년을 끝으로 ‘일단 멈춤’을 선언했다. 2018년 이후 전쟁의 역사는 달라졌고, 코로나19를 빌미로 외국인 선수를 없앤 WKBL의 전투방식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1
영웅신화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그들은 항상 난세에 존재하며, 일찍부터 시대를 바꿀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박지수도 그랬다. 성인 대표팀의 부름을 받기 전인 중학생 시절부터 ‘한국 여자농구의 미래’라는 수식어가 함께했다. 

2016년. 드디어 그가 WKBL에 입성했다. 그해 신입선수 선발회는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를 차지하고자 했던 6개 팀의 간절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군가는 새벽기도를 갔고, 누군가는 108배를 올렸다. 행사장에 가장 먼저 단상을 깔아야 1순위를 잡을 수 있다는 미신에 의한 경쟁도 있었다.

역사는 영웅에게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박지수도 그랬다. 14.3%의 확률밖에 없던 KB가 1순위 지명권을 획득했다. KB의 안덕수 신임감독은 박지수를 선발한 뒤, 단상에서 큰절을 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마치 새롭게 보위에 오르는 것을 선언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이후, 박지현(2019년, 우리은행)과 허예은(2020년, KB)이 4.8%의 확률을 뚫고 ‘구슬 1개의 기적’을 연출해 14.3%를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선수의 위력과 존재감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드래프트 쇼크’의 파급력은 2016년의 박지수가 정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입성과는 달리 ‘한국 여자농구의 미래’에게 정상은 여전히 ‘미래’의 일이었다. 이전 4년간 리그 위에 군림했던 우리은행은 새로운 영웅이 입성했던 그해, 보란 듯이 ‘역대급 압살’을 시전하며 WKBL을 초토화했다. 35경기 33승 2패, 승률 0.943.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를 바꾼 대기록이 작성됐다. 압도적인 위력을 내뿜은 독재자의 위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린 영웅은 그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듬해, 왕조의 주축이었던 트로이카 중 양지희가 은퇴했지만, 김정은이 가세하며 우리은행의 제2차 3두 정치(임영희-김정은-박혜진)가 펼쳐졌다. 루키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을 겪은 후, 눈물을 흘렸던 소녀는 챔피언결정전 무대에 처음 섰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단 3경기. 한 번의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굳건한 왕조 앞에 무너졌다.

그리고 프로 3번째 시즌. 소녀는 드디어 영웅 신화의 성공기를 썼고, WKBL 역사에 가장 어린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한국 여자농구 전통의 명문 구단이면서도 WKBL 출범 후 유일하게 우승과 인연이 없던 팀 KB는 여왕의 대관식과 함께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신한은행의 6년 왕조를 무너뜨린 우리은행 왕조도 6년으로 그 막을 내렸다. WKBL 왕조의 6년 주기설이 언급됐다. 대관식에 선 어린 여왕은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세운 6년 연속 우승 그 이상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2
새로운 여왕과 함께 리그를 점령한 노란색 물결에는 적수가 없어 보였다. 과거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위용도 압도적이었다. 다른 5개 팀의 수장들조차 정상을 탐하면서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강력한 대항마는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전 왕조’ 우리은행. 오랫동안 팀의 대들보였던 임영희가 떠나면서 트로이카는 해체됐다.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은 MVP 기록을 가진 박혜진이 확실한 팀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이제 리그는 ‘두 개의 태양’이 자웅을 겨루는 시대로 돌입했다. 

새 시즌이 시작되자, 박혜진의 우리은행이 무섭게 반격했다. 잃어버린 왕좌를 다시 차지하기 위한 설욕은 첫 맞대결부터 무시무시한 전투력으로 나타났다. 

시즌 중반 이후 발동을 거는 것이 습관처럼 된 KB는 세 번의 맞대결을 내리 내준 뒤부터 힘을 냈다. 3연패 후 2연승을 달렸다. 하지만 마지막 맞대결에서 내상이 큰 역전패를 당했다. 설상가상, 리그는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조기 종료를 선언했다. 플레이오프도, 챔피언 결정전도 없었다. 반격과 설욕의 기회도 없이 KB의 시즌은 끝났다.

정규리그 우승은 우리은행. 그러나 챔프전 트로피의 주인공은 없다. ‘시즌의 왕’을 선포하는 WKBL 챔피언 자리는 현재 공석이다. 다만, 정규리그 정상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우리은행은 왕조의 자존심을 다시 세웠고, KB로서는 성공의 역사가 너무 일찍, 쉼표 앞에 정지하게 됐다. 

#3
2020년 3월 5일 아산. 어쩌면 2019-20시즌 정규리그 판도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경기. 몇 년째, 정상 전쟁의 정점에 선 KB와 우리은행이 다시 맞붙었다. 

흐름은 KB 쪽이었다. 주득점원 카일라 쏜튼이 고전하고 있었지만, 3쿼터까지 박지수가 19점을 득점한 KB는 47-38로 앞선 채 마지막 4쿼터를 시작했다. 쏜튼의 득점으로 11점 차까지 달아났다. 

하지만 결과는 역전패. 이 경기를 우리은행이 이기면서 정규리그 우승의 향방이 사실상 결정 났다. KB의 정규리그 2연패가 좌절된 경기였다.

“져서 아쉽거나, 힘들다기보다는 저 스스로한테 화가 너무 많이 났어요. 진 것도 그랬고, 그렇게밖에 못했다는 것도 화가 났죠. 끝나고 기록지를 보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저희 그날 4쿼터에 4점 넣었어요. 그 4점도 (카일라) 쏜튼 혼자요. 저는 경기 중에 우리가 그렇게 농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왜 그렇게 정신이 없었을까요? 아니,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고 경기를 했는지... 정말 화가 나요.”

경기의 흐름은 4쿼터 초반에 요동을 쳤다. 박지수가 4번째 파울을 범한 것. 

KB는 파울트러블에 걸린 그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박지수가 빠졌던 2분 20초 동안,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KB는 다섯 번의 공격을 연달아 실패했고, 우리은행은 점수 차를 5점으로 좁혔다. 그가 다시 코트로 들어왔지만, 바뀌어버린 경기의 흐름은 요지부동. 결과적으로는 박지수가 없었던 4쿼터 초반의 시간이 KB에는 치명상이 됐다.

“저는 파울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프로에 와서 그게 깨진 것 같아요. 파울트러블에 걸려도 끝날 때까지 퇴장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한 번 퇴장을 당한 뒤로는 계속 같은 상황이 나오는 거 같아요. 그래서 감독님도 제 파울에 민감하세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에게 그토록 아쉬웠던 4쿼터와 파울트러블. 하지만 김은혜 KBSN 해설위원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파울이 아니었어도 박지수를 빼는 게 맞았다는 것. 

김 위원은 “그 시점에 박지수는 분명 체력적으로 부침이 느껴졌다. 벤치에서도 (박)지수를 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용감하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KB는 박지수가 나간 후, (르샨다) 그레이와의 미스매치를 이용해서 오히려 외곽에 오픈 찬스를 만들었는데, 그중 1개만 들어갔어도 경기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늘 후회해요. 결국 제 욕심이라 고치고 싶은 것 중 하나거든요. 경기를 뛰다 보면 스스로 지쳤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뛰어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도저히 나 스스로 경기를 못 놓는 거죠. ‘힘들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 감독님은 바로 교체해주시거든요. 그런데 내가 내 욕심에 그 말을 안 했어요. 힘들다 싶을 때는 경기 상황과 관계없이 나와서 쉬었다가 들어가는 게 팀에도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지난 시즌 박지수의 평균 출전 시간은 32분 33초.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을 고려할 때, 출전 시간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혹사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출전 시간이 길 때는 힘든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제가 다른 팀이었으면 이렇게 안 뛰었을까요? 솔직히 ‘저 팀이었으면 그냥 40분 다 뛰었겠다’ 싶은 팀도 있는데요? 출전 시간 자체보다는 필요할 때 쉬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다행히 저는 30초든 1분이든, 잠깐만 쉬어도 회복이 빠른 편이거든요.”

“제가 굳이 35분 이상을 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 팀 언니들, 선수들을 믿거든요. 다 능력 있고, 잘하는 선수들이에요. 오히려 제가 뛰는 시간에 밀려서 더 할 수 있는 걸 못하는 건 아닐까요? 제가 뛰느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그래도 필요하다면 뛸 수 있어요. 힘은 들겠지만 그게 무리라거나 혹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평균 35분? 쉬는 시간만 잘 조절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4
2019-20시즌은 코로나19로 인해 조기 종료되면서 플레이오프가 열리지 못했다. 우리은행은 자력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리그 중단 시점의 성적을 기준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때문에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2년 만의 정규리그 우승을 축하하자, “우승이 아니라 1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이 남는 결말이었다. 특히 2연패를 위해 플레이오프를 벼르고 있던 KB의 허탈함은 유독 두드러졌다. 안덕수 KB 감독은 리그 종료 후,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은 정말 자신 있었다”며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 우리은행의 반응은 이상했다. 위성우 감독과 팀의 핵심인 박혜진은 “플레이오프가 정상적으로 열렸으면 KB가 우승했을 것 같다”고 했다. KB의 패기, 그리고 우리은행 특유의 엄살이 복합적으로 얽힌 이유일까?

그런데 이들 뿐이 아니다. 본지 칼럼니스트인 여자농구 해설위원 중 대부분이 KB의 우승 가능성에 손을 들어줬다. 2007 겨울리그 이후 13년 동안, 정규리그 우승팀이 모두 챔프전 우승을 가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이토록 다른 의견이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위성우 감독은 시즌 초부터 KB에 대해 “뒤로 갈수록 좋아지는 팀”이라고 평가했다. WNBA 시즌을 치르고 합류하는 박지수의 몸 상태와 컨디션 회복 문제, 그리고 국가대표가 가장 많아 정상적인 팀 훈련 완성도를 비시즌에 높이기 어려운 점 등을 언급하며, “KB는 시즌을 치르면서 경기력과 완성도가 올라가는 팀이라 뒤로 갈수록 더 강해진다”고 했다. 시즌을 마친 후에도 이러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위 감독은 “KB는 작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 김정은의 몸 상태가 챔프전에서 3경기 이상을 연속으로 버티기에 무리라는 점, 예년과 달리 플레이오프와 챔프전 일정 사이에 여유가 있어서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KB가 체력적인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추가됐다. 

또한 위 감독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그레이가 박지수와의 매치업에서 한계를 보였다”며, “챔프전을 치렀으면 그레이가 박지수한테 공격에서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수의 생각은 어떨까?

“그레이는 힘도 세고, 거칠고, 정말 상대하기 힘든 선수죠. 그런데 경기를 계속하면서 점점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사실, 저도 플레이오프를 했으면 우리가 잘했을 거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당연히 경기는 힘들었겠죠. 우리은행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디스크 3개 정도에 문제가 있어서 허리 통증이 심했거든요. 3월 5일 우리은행 전이 끝나고 나서부터 플레이오프 대비로 들어갔으니까, 저는 2주 정도를 쉬었어요. 그리고 팀 훈련에 복귀했는데, 정말 분위기가 좋았어요. 팀 운동량도 그때가 가장 많았고, 선수들 몸도 가장 좋은 상태로 올라오고 있었거든요. 팀 분위기도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뭔가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그래서 기대가 컸고, 자신감도 있었어요. 취소 결정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플레이오프를 못 하고 마친 건 정말 아쉬운 것 같아요.”

②편에서 계속...

사진 = 박진호 기자 ck17@rook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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