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①편에 이어...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오후 훈련

점심을 먹고 시작된 오후 훈련. 오후에는 먼저 실내에서 펑셔널 트레이닝을 소화한 뒤, 지옥의 트랙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펑셔널 트레이닝은 케틀벨이나 밴드 등의 기구를 이용해 신체의 기능성을 기르는 훈련이다. 보기만 해도 무지막지해 보이는 서킷 트레이닝과 달리, 소품(?)들이 꽤 아기자기해 보인다. 그래서 만만히 봤다가 아주 큰코 다쳤다. 

특히 스케이트를 타듯 옆으로 미끄러지는 운동인 ‘슬라이드보드’는 선수들의 자세를 흉내 내기조차 쉽지 않았다. 보다 못한 후미오 기타모토 체력 트레이너가 다가와 이리저리 자세를 교정해줬지만, 나는 끝내 미끄러지지 못했다. 곁에 있던 훈련친구 박주희는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연신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이럴 땐 차라리 웃어주는 게 덜 창피한데….

펑셔널 트레이닝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트랙훈련 시간. 애초 계획은 태백 선수촌 앞 고지대 트랙을 뛰는 것이었지만,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로 인해 장소가 체육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트랙훈련은 장소와 구단을 불문하고 언제나 힘들다. 이날의 목표량은 고깔이 놓여 있는 체육관의 임시 트랙 14바퀴를 한 세트로 해서, 총 3세트 42바퀴를 뛰는 것. 지난 하나은행과 훈련에서 체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헬스장에 다니면서 체력 증진에 힘썼던 나는 이번 훈련에서는 진지하게 중위권을 목표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나 체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느는 것이 아니었다. 한 두 바퀴까지는 어느 정도 속도를 맞췄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6바퀴쯤부터는 재활조마저 아득히 나를 앞서갔다. 실전은 헬스장과 달랐다. 이번 트랙훈련 역시 압도적인 꼴찌였다.

트랙훈련 뒤에도 운동은 계속됐다. 이영현 코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트랙훈련을 마치고 이제 좀 쉬는가 싶었는데, 이 코치의 호출이 떨어졌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살면서 언제 또 프로 코치에게 1:1 특강을 받아보겠어’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코트로 나갔다. 한 시간 동안 기초적인 드리블부터 시작해서 레이업, 점프슛, 자유투 속성 강의가 이어졌다.

이 코치의 입에서 이따금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특훈의 효과는 확실했다. 다음 날 오전 열린 농구 훈련, ‘놓고 온다’는 이 코치의 조언을 떠올리며 가볍게 레이업에 성공했다. 두 번째 시도 역시 연거푸 성공. 선수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더불어 전날 림도 맞추기 버거웠던 왼손 레이업도 깔끔하게 넣자 먼발치서 지켜보던 안덕수 감독도 엄지를 세웠다. 칭찬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이영현 코치에게 물었다.

“코치님. 제가 늦게 시작해서 그렇지, 이 정도면 역시 감각이 있는 편이죠?”

이 코치는 대답 대신 어깨만 두드릴 뿐이었다.

11.4km

그러나 태백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12박 13일 체력훈련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대망의 산악 마라톤이다. 함백산 아래 위치한 국도 제31호선 고개 화방재에서 출발해 해발 1,330m의 만항재를 찍고 태백 선수촌으로 내려오는 11.4km 로드워크. 

해마다 태백에서 전지훈련을 하는 KB에게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특별한 훈련으로, 이 마라톤에는 선수단뿐만 아니라 감독과 코치진 나아가 농구단 업무를 총괄하는 단장과 부단장도 모두 함께한다. 

11.4km. 쉬지 않고 달려도 한 시간 반이 소요되는 코스이며, 산 중턱부터는 걸어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가파른 오르막. 출발 전, 진경석 코치가 다가와 “선수들에게도 쉽지 않은 코스다. 뛰다가 힘들면 그냥 차를 타고 올라오라”고 말했지만, 이미 1박 2일간 선수단과 함께 훈련하며 한 배를 탄 몸. 비장한 각오로 “코치님. 기어서 들어갈지언정 절대 차를 타고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우렁찬 화이팅과 함께 시작된 마라톤. 출발 5분여 만에 선수단의 모습은 아득히 멀어졌다. 그래도 홀로 페이스를 잘 유지하면서 쉬지 않고 뛰어 왔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코스 중간에서 양 갈래 길이 나온 것이다. 선수단과는 이미 멀어진 상황. 핸드폰도 차에 두고 내린 터라 내비게이션을 찍을 수도 없었다. 난감해 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다행히도 저 멀리, 천천히 뛰어오는 KB 부단장의 모습이 보였다.(꼴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기다렸다가 같이 갈 수도 있었지만, 1초라도 빨리 선수단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에 300m쯤 떨어진 거리에서 소리쳤다.

“부단장님!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요?”

부단장이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왼쪽 길로 빠져 10분여를 뛰었는데, 길의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 한참을 뛰었는데도 중간 중간 보여야 하는 지원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분명 산 중턱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고 들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내리막길이다. 아스팔트였던 길은 비포장도로가 된 지 오래고, 나무는 점점 우거져서 대낮인데도 햇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호각 소리가 나는 듯해서 열심히 뛰어봤는데, 호각 소리가 아니라 방울 소리였다. 어떤 무속인이 허름한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다. 영화 곡성의 현실판인 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려고 하는 그때, 차 한 대가 도로에서 내려온다. 

“아이고~ 원 기자님! 혼자서 얼마를 내려온 거야? 부단장님한테 완전히 속으셨네. 여기 완전 반대 길이에요. 얼른 타세요.”

KB 김병천 사무국장이 차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아뿔싸, 당했다. 김 국장에게 들어 보니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은 박상용 부단장은 만항재 로드워크가 처음인 내게 일부러 반대 방향을 알려주고 유유히 오른쪽으로 갔단다. 

사무국장의 차를 타고 반대로 올라가다 보니 열심히 뛰고 있는 부단장의 모습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부단장과 걸음을 맞춰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신고식! 원래 처음 뛰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한 번씩 갔다 오고 그래야 진짜 KB인이 되는 거야.”

KB인이요? 그러면 KB에서 월급을 주셔야... 

아무튼 부단장의 대답을 듣자 몸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느낌이 든다. 말로만 듣던 아드레날린인가. 그렇게 부단장에게 뜻밖의 기운을 얻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중턱에서 시작된 오르막길은 명성대로였다. 도저히 뛰기 힘들어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 올라갔는데, 정말 걷기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선수들은 이 코스도 모두 달리기로 통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땅만 보고 뛰다 보니 어느새 만항재에 도착했다. 훈련친구 박주희는 출발 전, 만항재부터는 오르막 코스는 더 없고, 태백 선수촌을 따라 쭉 뻗어진 평지로만 가면 된다고 했다. 이제 정말 다 왔다는 생각에 마지막 스퍼트를 내서 다시 힘차게 달렸다. 

그러자 오르막길을 달릴 땐 보이지 않던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릇한 녹음, 이름 모를 야생화, 길을 건너는 청설모. 자연에 한껏 취해 달리는데 어째 보여야 하는 선수촌은 안 보이고, 웬 닭 백숙집이 나타났다. 백숙집 뒤로 보이는 한 표지판. <정선 야생화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보이는 선명한 문장 <태백 선수촌 ← 4km>.

그렇다. 야생화와 청설모에 정신이 팔려 길을 또 반대로 왔다. 고지를 눈 앞에 두고 엉뚱한 길로 4km나 어긋난 것이다. 

어쩐지 극심한 내리막길이더라. 로드워크를 할 때는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분명히 내리막길은 뛰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꾸 내려가기만 하더라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는 더 뛸 힘도 없다. 뒤를 돌아 패잔병의 걸음으로 터벅터벅 왔던 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때 반대편 도로에서 낯익은 차가 내려온다. 편집장의 차다. 

“타라.”

조용히 차에 탔다. 차는 표지판에 적힌 4km 길을 그대로 올라 태백 선수촌에 도착했다. 선수단은 이미 모두 도착한 지 오래. 단장과 부단장 역시 진작에 골인 지점을 통과하고 아이싱까지 마쳤다.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문득 출발 전 진경석 코치와 대화가 떠올랐다.

‘코치님. 기어서 들어갈지언정 절대 차 타고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두 번의 이탈. 11.4km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뛰었음에도 선수단에게 나는 그저 ‘차 타고 들어온 낙오자’일 뿐이었다.

바나나우유

마라톤을 마친 우리는 사우나로 향했다. 함께 뛴 안덕수 감독, 진경석 코치, 이영현 코치, 성채현 단장, 박상용 부단장 그리고 기타모토 트레이너까지 모두 조용히 탕에 몸을 담갔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먼저 나갔던 부단장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바나나 우유였다.

“원 팀(one team).”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사과 방식이었지만, 사람은 누구나 11.4km를 함께 뛰고 나면 서로 애틋해진다.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1박 2일 동안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사실, 이번 로드워크의 마지막 주자로 완주를 한 부단장은 내가 두 번째로 길을 잘 못드는 장면도 똑똑히 보았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숨이 턱턱 막혀서 부를 힘도 없었다는 핑계를 댔다. 괜찮다. 바나나우유를 마셨으니 원망도 없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태백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나나 우유의 여운이 깊어서였을까. 감성에 젖어 대뜸 운전 중인 편집장에게 말했다.

“지난번 하나은행은 유격 훈련을 다녀온 느낌이면, 이번 KB는 기나긴 행군에 다녀온 느낌입니다. 발도 붓고 몸은 힘들어도 여운이 남습니다.” 

그가 답했다.

“그럼 우리은행은 어떤 느낌일까?”

...

다음 일정이 잡혔다.

사진 = 박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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