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기온은 23도. 썩 덥지는 않았지만, 앞뒤로 비 소식이 있었기에 습도가 높아 불쾌하기 딱 좋은 날씨. 이제 고작 스트레칭이 끝났을 뿐인데 입술 위로 자꾸 짠내가 느껴진다. 트랙 아래로 보이는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일까 아니면 내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 땀 눈물일까.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려는 찰나 옆에서 들려오는 코치님의 불호령. “본격적인 트랙 훈련 전에 70% 속력으로 한 바퀴 먼저 뛰고 시작한다!” 휘슬 소리와 함께 스타트를 끊은 순간, 선수들이 아득히 멀어진다. ‘70%라면서요…’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내의 설움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이 ‘현장 학습’ 코너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바쳐 조회 수에 이바지했던 이 코너의 주인공 모 선배 기자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자연스레 ‘현장 학습’ 코너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장고를 거듭한 회사 데스크는 본지 기자들에게 “이 코너를 포기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유인즉슨 지난 시즌 기사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기 때문. 여자농구를 사랑하는 팬들은 물론 구단 관계자와 연맹, 심지어 동료 기자들까지도 관심을 가졌던,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킬러 콘텐츠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알렸다. 

그래, 포기 못 할 수도 있지. 그런데 대체 왜 다들 저를 쳐다보고 있나요? “아무래도 이런 것은 막내가 해야 그림이…” 침묵을 깨는 팀장님의 한마디. “반대하는 사람 없지?” 다시 싸늘해지는 회의실. “그럼 이번 여름 현장 학습은 막내가 하는 걸로.” 언제부터 우리 회사 기획 회의가 이렇게 일사천리였습니까. 

그러나 세습 과정이 다소 비민주적이고 억울했을 뿐, 사실 훈련 체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했고, 비록 체대는 아니지만 H대학교 국제스포츠레저학부 출신으로 어느 정도 체력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태권도(초등학교 1학년, 1품)와 검도(초등학교 4학년, 4급) 경력과 군 시절 조교로 복무(예비군 조교)하며 다져진 몸. 최근에도 주말만 되면 집 근처 신월동 야구장과 화곡동 스트리트 풋살파크를 종횡무진 누비며 꾸준히 운동에 나서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원석연의 현장 학습>은 그렇게 탄생했다.

삼천포 가는 길

체험기의 첫 번째 주인공은 부천 KEB하나은행 여자농구단이었다. 6월 5일부터 14일까지 삼천포에서 열리는 국내 체력훈련을 하루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걱정과 설렘을 안고 출발한 삼천포 가는 길. 가는 과정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서울로부터 5시간이 소요되는 장거리, 편집장님의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서로 맞지 않는 음악 취향이 문제였다. 

이문세와 이승환의 발라드까지는 나도 OK. 그런데 편집장님, 갑자기 소방차라니요. 
“편집장님. 지금 나오는 노래들도 좋지만, 요새 대세 아이돌 노래 <라비앙로즈>도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노래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 
‘아이즈원’의 공식 팬클럽 위즈원인 내가 조수석에서 용기를 내 물었다. 
“오, 네가 그 노래를 알아? 나도 좋아하는 노래다.” 
의외로 쿨하게 노래를 바꿔 주시는 편집장님. 그러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놀랍게도 ‘아이즈원’의 그것이 아닌 1946년 나온 에디트 피아프의 <라비앙로즈>였다.

30cm 남짓한 짧은 거리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어마어마한 세대 차는 그렇게 좁혀지지 않은 채로, 우리는 약속의 땅 삼천포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때. 하나은행 이훈재 감독은 외국인 선수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가느라 자리에 없었고, 김완수 코치와 이시준 코치가 우리를 맞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훈련 일정에 대해 간단히 들은 뒤 숙소로 향했다. 베란다 앞으로 펼치진 남일대 해수욕장의 고즈넉한 바다 풍경. 이불 위로 감아 도는 따뜻한 에어컨 바람. 삼천포에서 첫날밤은 평화롭게 저물었다.

 

오전 트랙훈련 그리고 본색

알람과 함께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더 잘 시간이 있었지만, 전날 훈련 브리핑 때 훈련 체험은 꼭 선수들과 같은 일과를 보내야 한다며 일찍 일어나 조식부터 함께 하라는 김완수 코치의 지시에 따라 졸린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조식. 2013년 군 생활을 마치고 6년 동안 먹어본 기억이 없는 그것. 선수단은 이미 내려와 밥을 뜨고 있었는데, 평소에 내가 알던 하나은행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식사 시간이 조용했다. 식당 안은 간간이 숟가락과 접시의 마찰음만 울려 퍼질 뿐,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몇 시간 뒤 내게 닥칠 훈련의 강도가 어렴풋이 느껴졌던 것이. 

엄습하는 불안감과 함께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숙소로 올라가 환복을 했다. 기사도 기사지만 영상 촬영이 함께 되는 이번 콘텐츠, 시청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출발 하루 전 거금을 들여 맞춘 N사의 러닝 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양말 세트. 외출 전 거울을 보니 제법 체육인 느낌이 난다. 이제 이날을 위해 준비한 A사의 러닝화만 신고 나가면 완벽하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당도한 신발장.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새 옷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러닝화를 집에 두고 온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김완수 코치에게 도움을 청했다. 
“코치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신발을 집에…” 
자초지종을 들은 김완수 코치, 실소와 함께 방에 들어가더니 자신의 러닝화를 건넸다. 280mm. 이 글을 보고 있는 김완수 코치의 팬이 있다면 외워 두세요. 그의 발 사이즈는 280mm입니다. 참고로 기자의 발은 250mm였기에 김완수 코치의 호의는 마음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오전 훈련이 진행되는 육상 트랙은 잔디 트랙이었다. 마음씨 고운 몇몇 선수들이 남는 러닝화를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소싯적 운동회 때 계주의 기억도 떠올릴 겸 그냥 맨발로 뛰기로 했다. 이시준 코치는 족저근막염을 걱정했지만, 쿨하게 괜찮다고 웃어넘겼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로들과 함께 훈련한다는 설렘과 오랜만에 맡는 잔디 냄새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트레칭은 하나은행의 ‘지염둥이’ 가드 김지영 옆에서 동작을 따라 했다. 
“기자님, 몸 잘 푸셔야 돼요. 저희도 뛰다가 근육 올라오는 선수들 많아요.” 
이시준 코치에 이어 김지영의 걱정 어린 충고.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김지영의 충고를 들을 때만 해도 ‘혹시 내가 여기서 1등으로 들어오면 어떡하지? 선수들이 창피해하지 않을까?’하며 속으로 피식 웃기도 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김완수 코치와 이시준 코치 그리고 트레이너들이 각자 트랙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호루라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호각 소리와 함께 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훈련 시작했으니 원 기자도 똑같이 선수로 취급한다. 요령 피울 생각 하지 마라.” 
잠시만요. 코치님.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라며 다정다감하셨던 분이…

 

그러나 그들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본격적인 트랙훈련 전에 70% 속력으로 한 바퀴 먼저 뛴다.” 
그래, 70%면 할 만하지. 그러나 내 계획은 곧바로 울린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무참히 깨졌다. 김지영, 강계리와 함께 같은 조로 편성된 나는 시작부터 크게 뒤처졌다. 그들이 말한 70%는 일반인 기준이 아닌 대한민국 여자농구선수의 70%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뛰고 나니 내 옆에 있는 김지영과 강계리가 새삼 달라 보인다. 고작 한 바퀴 뛰고 마라톤을 하고 온 것처럼 가쁜 호흡을 내쉬는 나와 달리 그들은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70% 워밍업을 마친 뒤 이제 본격적인 100% 트랙 훈련. 오늘 뛸 거리는 무려 15바퀴란다.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다시 한 번 울려 퍼진 호각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선수들과 발을 맞춰 100% 속력으로 한 바퀴를 뛰어 봤다. 곧바로 종아리에 쥐가 올라왔다. 엄살이 아니라 선수들은 한 바퀴 뛸 때마다 심박 수와 시간을 함께 재는데, 이 기록을 줄이기 위해 정말 빠른 속도로 뛴다. 15바퀴를 조깅하듯 뛰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일반인의 스프린트 수준으로 뛴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잠깐씩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진행되는데, 그 쉬는 시간마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든 훈련이다.

“코치님, 저 쥐 났는데요.” 김완수 코치에게 울상을 지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몰차다. 심하게 나면 트레이너와 같이 풀어 줄테니 엄살 부리지 말고 계속 뛰란다. 사실 못 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그렇게 성치 않은 발로 총 목표량인 15바퀴 중 11바퀴를 뛰었다. 완주에 실패했지만, 함께 뛴 훈련친구 김지영과 강계리는 ‘그게 당연한 거다’라며 애써 위로를 건넸다. 이후 스트레칭과 함께 오전 트랙 훈련은 마무리. 한 달 치 운동량을 단 세 시간 만에 몰아친 나는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숙소로 복귀했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박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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