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r. irrelevant.”
한국어로 ‘미스터 무관심’, ‘관심받지 못한 사나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미국 프로 풋볼 NFL에서 생겨난 말이다.
1936년부터 시작돼 매년 4월 열리는 NFL 신인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 가장 끝자락에서 호명되는 선수. 대중의 관심을 가장 못 받는 마지막 드래프티를 미국에서는 ‘Mr. irrelevant’, 미스터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2022년 NFL의 ‘Mr. irrelevant’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브록 퍼디였다. 262번째로 지명돼 드래프트 문을 닫고 들어온 퍼디는 그야말로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전력 외 선수였다. 심지어 퍼디의 포지션은 풋볼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쿼터백으로 팀에는 이미 쟁쟁한 경쟁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던 상황.
그러나 개막 후 퍼디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팀의 주전 쿼터백이 시즌 시작도 전부터 부상으로 낙마하고 2순위 쿼터백마저 2경기 만에 발목 부상으로 시즌아웃. 샌프란시스코는 하는 수 없이 퍼디를 주전으로 기용했는데 ‘미스터 무관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Mr. irrelevant' 출신 최초의 기록을 수도 없이 써내려가며 미국을 뒤흔들었다.

퍼디와 달리 드래프트 1라운드에 뽑힌 행운아지만, 윤원상은 이번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의 'Mr. irrelevant'였다. 54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25분을 뛰었던 지난 시즌과 달리 올시즌은 18경기에 출전 시간은 고작 평균 10여 분에 그치며 전력 외 선수가 된 까닭이었다.
“개막 전 필리핀 전지훈련 때까지만 해도 몸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고 나서 갑자기 발목이 붓기 시작하더니..." 윤원상이 말했다.
“그런 와중에 (유)기상이가 입단했는데, 오자마자 뛰는데 정말 잘하더라고요. 후배인데도 농구에 대한 자세나 배울 점이 많았어요. 포지션 경쟁자였지만 미워할 점이 없더라고요. 오히려 계속 배울 것만 보이고 그러면서 제 경기는 계속 안 풀리고... 참 힘든 시기였어요. 사람이 이렇게 힘들 수가 있나 싶었어요. 누구를 만나기도 싫었고.”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를 4강부터 시작한 창원 LG의 봄 농구에서도 윤원상의 자리는 없었다. 창원에서 열린 1차전과 2차전 모두 윤원상은 어깨 너머로 팀원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야말로 무관심 사나이.
“경기를 밖에서 보면서 참 부럽더라고요. 저 안에서 뛰는 게, 그 많은 팬분들 앞에서 뛰는 게 너무 재밌어 보였어요. ‘재밌겠다...’하고 보고 있으니 (이)재도 형이 계속 다독여 주시더라고요. 룸메이트거든요. 재도 형이 계속 ‘너는 우리 팀에 없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시리즈 중간에 언제라도 기회가 올 테니 실망하지 말고 몸 잘 만들면서 기다리고 있어’라고 얘기해 줬는데...”

4월 20일, 이재도의 말은 현실이 됐다.
LG가 홈에서 시리즈 1승 1패로 아쉬운 결과를 갖고 수원으로 올라온 3차전, 조상현 LG 감독은 윤원상을 호출했다.
12월부터 정규리그가 끝나는 날까지 3개월 동안 1군에서 단 5경기만 뛰었던(평균 6분 58초 2.4득점) 'Mr. irrelevant'가 팀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2쿼터 접전 상황에서 교체로 들어간 윤원상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비에서는 매치업 허훈을 물고 뜯었고, 공격에서는 침착하게 3점슛을 성공하며 남은 시간을 자신의 출전시간으로 물들여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흘러간 경기는 어느새 4쿼터를 맞았고, LG의 73-71 살얼음판 리드 속에서 KT가 작전타임을 불렀다. 남은 시간은 63초.
“사실 그 공격에서 (허)훈이 형이 마무리할 줄은 몰랐어요.” 윤원상이 KT의 마지막 득점을 회상했다. “KT가 많이 쓰는 패턴은 아니지만, 처음 쓰는 건 또 아니었거든요. 팀 훈련을 하면 제가 항상 상대 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패턴을 알고는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
사이드라인에서 정성우가 포스트의 하윤기에게 패스를 하는 사이, 허훈은 베이스라인에서 탑으로 올라가 패리스 배스와 교차한다. 기민한 움직임을 통해 수비에 균열을 내고 골밑에서 이를 지켜보던 하윤기가 허점이 나는 곳에 공을 뿌리는 KT의 스플릿 액션.
그러나 KT의 이번 액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정규리그 KT의 스플릿은 허훈이 스크린을 타고 멀어져 3점 라인으로 가서 슛을 던지거나 혹은 배스가 림으로 컷해서 마무리하는 빈도가 높았다면 이번에는 허훈이 3점 라인이 아닌 스크린을 끼고 돌아 골밑으로 침투, 기가 막힌 변주로 LG에게 펀치를 날렸다.
“아는 패턴이었는데도 훈이 형이 직접 골밑으로 가서 마무리할 줄은 몰랐어요. 미끼 역할만 하고 배스가 안으로 갈 줄 알았거든요. 훈이 형이 갑자기 스크린을 타고 도는 순간 '아차' 싶었죠. 알고 있던 거라 더 아쉽기도 하고.”
그렇게 동점이 된 경기. LG의 조상현 감독은 마지막 타임을 불러 벤치의 선수단을 내려다 바라봤다. 어쩌면 시즌 전체가 걸린 클러치타임.
팬들이 1옵션이라 부르는 감독은 라인업의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고민한다. 시즌 내내 믿고 중용했던 신인왕 유기상? 사이즈가 좋은 저스틴 구탕? 아니면 미스터 무관심 윤원상?
“(원상이) 구탕이랑 바꿔 줘. 아니야... 아니야... 원상이 껴.” 윤원상에게 교체를 지시했다가 이내 다시 마음을 바꾼 조상현 감독의 이 한 수는 정확히 1분 뒤, LG 프랜차이즈 플레이오프의 역사를 바꾼다.

서로 공격을 한번씩 실패하며 점수는 여전히 73-73 동점. 종료 15초를 남기고 포인트가드 이재도가 탑에서 공을 잡았다.
“결국 마레이나 제가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재도가 마지막 공격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원상이 쪽 패스를 본 건 아니었고 골밑의 마레이 쪽을 봤어요. 윤기가 앞에서 수비 자리를 잡고 있으니 마레이가 뒤로 넘겨 달라고 하더라고요. 천천히 보고 넘겨주려고 하는데, 오른쪽 코너에 성우의 스텝이 헬프를 나오려는 스텝이었어요. 그래서 성우의 움직임을 보고 길게 패스를 준 것까진 맞았는데, 제가 생각보다 너무 늦게 줬더라고요.(웃음) 저는 한 4~5초라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2초 밖에 없었더라고요? 그런데...”
공이 이재도의 손을 떠나 정성우를 넘어 윤원상에게 아슬아슬하게 도달하기까지 걸린 길디긴 시간. 윤원상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저희가 지고 있던 게 아니라 동점이었거든요.” 윤원상이 말했다. “'재도 형이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공이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고, 꼭 던지고 끝내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에 공이 날아오더라고요.(웃음) 보통 그렇게 공이 오면 받는 사람도 좀 어렵게 받게 되는데, 이상하게 공이 한번에 안겼어요. 성우 형이 점프 뛰는 걸 보고 1초 정도 시간이 있겠다 싶어서 거리를 벌렸고 슛을 쐈는데... 공이 손에서 빠지자마자 ‘들어갔다’라고 확신이 들더라고요. 혼자 체육관에서 연습할 때 던지는 것처럼 세상이 조용해지고 정말 가볍게 손에서 날아갔거든요.”
시즌 내내 아무 관심도 못 받았던 사나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렇게 조용히, 가볍게 날아 포물선을 그리며 그대로 그물을 통과했다. 76-73. LG의 역전승. 정규리그에서 한 차례도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던 윤원상이 시즌 첫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만큼 기분 좋고요. 그냥 오늘처럼, 그리고 시즌 내내 혼자 연습하면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어요.” 3차전 당일, KBL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수훈 선수가 말했다.
“뭐든 다 할 거예요. 상대를 물라면 물어야죠. 제가 지금 뛰고 있는 이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못 뛰어보고 은퇴할 수도 있는 그런 무대잖아요? 저도 그럴 뻔했고요.”
웰컴 Mr. Relevant. 관심 받는 사나이.

사진 = KBL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