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Offense sells Tickets, Defense wins Championship)”
1913년에 태어난 폴 브라이언트 미식축구 감독이 남긴 오래된 격언으로, 단체 구기 종목에서는 마치 성경 구절처럼 여겨지는 말이다.
신한은행의 포워드 유망주 이다연은 이런 통념으로부터 감독을 시험에 들게 하는 선수다. 얼마 전 은퇴한 베테랑 3&D 한채진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기회를 받고 있지만, 아쉬운 수비 집중력으로 번번이 매치업을 놓치며 상대에게 흐름을 내주기 일쑤인 선수.
하지만 신장에 비해 7cm나 긴 매력적인 윙스팬, 더불어 드래프트 컴바인 6개 부문 중 절반인 3개 부문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여자농구에서 흔치 않은 운동 능력, 그리고 올시즌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 성공률인 47%의 3점슛까지. 코트를 밟을 때마다 이다연은 벤치를 향해 기록지로 질문을 적어 보낸다.
저기요. 이래도 저 안 쓰실래요?

지난 1월 18일 밤, BNK와 부산 원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이다연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77-62로 신한은행이 승리를 거둔 이날 경기에서 이다연이 코트를 밟은 시간은 1분 33초. 종료 3분여를 남기고 가비지 타임에 투입됐으나, 그마저도 반만 뛰고 다시 교체돼 벤치로 돌아왔다.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요.” 이다연이 멋쩍게 웃으며 그날을 회상했다. “그 1분 30초를 정말 많이 복기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제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까? 첫 공격에서 투맨 게임을 하고, 수비로 돌아왔는데 이때 수비가 스위치였나? 내가 혹시 약속을 까먹었던 건가?하면서 반성도 하고, 기도도 해보고, 울기도 하면서… 그날은 진짜 잠을 거의 못 잤어요.”(웃음)
잠 못 드는 그날로부터 1주일 뒤, 이다연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홈에서 열리는 4위 하나원큐와 맞대결, 3경기 차로 뒤처진 5위 신한은행에게 올시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전. 그러나 치열하게 전개되던 3쿼터 초반, 홀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던 에이스 김소니아가 이른 시간 4번째 반칙을 범하며 신한은행은 비상에 걸렸다.

“농구를 카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요.”
'일타 강사' 신한은행의 구나단 감독은 경기를 이렇게 복기한다. “가뜩이나 줄부상으로 꺼낼 패가 많이 없는데, 소니아까지 파울 트러블… 비상이었죠.(웃음) 그 상황에서 공격을 주도적으로 풀 수 있는 카드는 딱 한 명이었어요. 만약 농구를 카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요. 진짜 마지막 패이자 겜블이었던 거죠. (이)다연이가요.”
점수는 38-42로 뒤져 있고 3쿼터 종료 3분여를 남긴 상황, 구 감독은 김소니아를 빼고 이다연을 투입했다. 12월 29일을 마지막으로, 2024년 전 경기에서 득점이 없었던 가비지 타임 끝자락의 선수, 이다연을 경기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처음으로 투입하는 겜블.
그러나 현실은 청춘 만화가 아니었다. 교체 후 첫 포제션. 이다연은 매치업 정예림을 완벽히 놓치며 오픈 찬스를 내줬고, 정예림의 슛은 야속하게도 림을 갈랐다. 코트를 밟고 정확히 14초 만에 3점슛을 헌납한 치명적인 실수.
거 봐, 수비 안 되는 선수는 안 된다니까?
그리고 여지없이 불린 작전타임 버저. 이다연에게 벤치로 돌아가는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교체될 줄 알았어요. 3점만 맞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맞고 왔으니까… 그래서 벤치로 돌아가서도 ‘바뀌겠지? 내가 앉아도 되나? 어차피 교체될 것 같은데 뒤에 서 있을까?’하고 엉거주춤 있었거든요.”

그러나 구나단 감독의 겜블은 14초짜리 숏츠가 아니었다. 이다연이 3점슛을 맞고 온 작전타임, 구 감독이 그린 작전판의 패턴에는 이다연이 중심에 있었다. 3번이 베이스라인으로 컷하는 척 들어가다가 두 개의 스크린을 타고 위로 올라와 슛을 쏘는 3점슛 패턴. 신한은행은 이 패턴을 쓰리라고 부른다.
“직전 포제션에서 수비 실수로 자신감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겠구나 생각은 했어요.” 구 감독이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패턴을 짜주면, ‘여기서 못 넣으면 나한테 다음 기회는 없다’라는 간절함이 들지 않았을까 싶어서 패턴을 줬는데, 해내더라고요.”(웃음)
구 감독의 겜블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여기서 시작이었다. 이다연을 조커로 내세운 작전명 ‘쓰리’, 신한은행은 이 똑같은 패턴을 3쿼터 남은 3분 동안 무려 4번이나 가동하며 하나원큐를 무너뜨렸다.
첫 번째 ‘쓰리’는 이다연의 3점슛, 두 번째 ‘쓰리’는 이다연의 투맨 게임으로 전환, 세 번째 ‘쓰리’에서는 이다연의 백도어 컷, 네 번째 ‘쓰리’는 다시 이다연의 투맨 게임. 신한은행이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3점슛 성공률 47%의 조커는 자신을 위해 깔린 판 위에서 무수한 변주로 칼춤을 췄다.
그렇게 겜블은 통했고, 구 감독의 조커 이다연은 3분 34초 동안 야투율 100%로 7득점을 기록하며 판을 뒤집었다. 이다연이 춤을 추기 전 38-45로 지고 있던 신한은행은 단 3분 만에 3쿼터를 48-47로 역전한 채 마쳤고, 결국 이날 경기를 59-57 승리로 장식한다. 전반기 단 2승에 그치며 끝없는 터널을 걸었던 신한은행이 후반기 4경기에서 3승을 거두며 희망의 불씨를 점화한 것이다.
“저희 팀의 올해 모토가 ‘Do or Die’거든요.” 구 감독이 말한다. “선수들한테 진짜 죽을 각오로 해보자고 했는데, 오늘 경기가 올시즌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어요. 정말… 기분 좋네요.”
남은 경기는 10경기. 플레이오프 막차와 승차는 2경기. 신한은행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겜블 개봉박두.
아, 3점슛 성공률 47%의 예리한 조커와 함께.

사진 = 이현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