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6일 용인체육관의 원정팀 라커룸은 싸늘했다. 만년 꼴찌였던 하나원큐가 ‘무려’ 개막전에서 시즌 첫 승을 따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그러나 원정팀은 종료 3초를 남기고 그 기회를 허공에 날리고 온 참이었다.
“그 경기에서 이기면 ‘아 올시즌 뭔가 될 것 같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양인영이 그날을 회상했다. “(김)정은 언니가 코트 위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저희를 불러 얘기했어요. ‘얘들아. 꼭 이겨야 돼.’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꼭 이기라고 하면서 나갔는데, 40초를 못 버티고 지고 라커룸에 들어가니까… 언니를 볼 면목이 없더라고요.”
4쿼터 종료 43초 전. 경기를 66-65로 리드하던 하나원큐에 문제가 발생했다. 수비의 핵심이자 보컬 리더 김정은이 이해란과 부딪히며 앞니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경기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고, 하나원큐는 종료 3초 전 신이슬에게 통한의 역전 레이업을 내주며 패했다.

“솔직히요? 그냥 너무 아팠어요.”
김정은이 아직 붓기가 남은 입가를 어루만지며 말한다. “그런데 그 아픈 와중에 일어나면서 시계가 먼저 보이는 거예요. 한 40초 남았더라고요? 애들한테 ‘나는 괜찮으니까 제발 이기고 오라’고 했죠. 라커에서 응급 처치를 하면서도 트레이너한테 계속 물어봤어요. ‘이겼어? 어떻게 됐어?’ 계속 보채니까 힘없이 대답하더라고요. ‘누나. 졌어요.’ 그전까지 사실 그렇게 아픈 줄 모르고 있다가 그때부터 고통이 밀려오는데 어찌나 아프던지…”(웃음)
그렇게 3초를 남기고 리드를 날린 다음날 아침, 김정은은 의료진으로부터 확인 사살을 받아야 했다. 회복까지 최소 한 달이 필요하다는 소견. 그러나 김정은은 소견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부천으로 가는 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러진 곳이 관절이 아니라 치아인 것에 대해 감사했죠.” 김정은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오래 보셔서 아시잖아요? 무릎 안 좋고, 발목은 양쪽 다 수술했고, 목이랑 허리에는 디스크 하나씩 달고 있고. 몸에서 그나마 단단한 게 이 하나였는데, 이거마저 다쳤네하고 웃었죠 뭘. 불쌍해하지 마세요. 선수들 원래 이 나이 되면 다 이러고 뛰어요."

그러나 김정은의 이런 투혼에도 현실은 차가웠다. 부상으로 놓쳤던 삼성생명전 패배를 시작으로 우리은행전 패배, BNK전 패배 그리고 KB전까지 패배하면서 어느새 개막 4연패.
두 시즌 연속 꼴찌팀이 개막전 4연패하는 거 대수롭지 않다고? 아니, 올 시즌의 하나원큐는 달라야만 했다. 미래 지명권을 내주고 김정은과 김시온을 영입하며 체질 개선을 공표한 하나원큐는 이맘때쯤 달라져 있어야 했다. 외부의 시선은 ‘그럼 그렇지’ 정도였지만, 사실 이 시기 하나원큐는 내부적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여름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정은 언니도 왔는데, 왜 여전히 우린 다른 팀들의 한 끼 식사지?
그렇게 하나원큐를 휘감았던 위기감이 마침내 폭발한 것은 11월 17일 청주체육관의 라커룸이었다. KB스타즈의 에이스 박지수는 18점 15리바운드를 올리며 일찌감치 가비지 타임으로 조기 퇴근했고, 하나원큐의 에이스 신지현은 5반칙 퇴장으로 조기 퇴근하며 무기력하게 4연패를 벤치에서 지켜본 그날이다.
김정은은 경기 후 코칭스태프와 미팅을 마치고 신지현, 양인영, 김시온 이 세 명의 고참을 그대로 라커룸에 남겼다.
“한 시즌에 6번을 만나는 우리 리그에서는 전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투지. 이 투지에서 한번 밀리면 그 뒤로는 계속 얕보이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날 경기에서는 우리 고참 선수들이 입 한번을 안 벌리고 뛰더라고요. KB한테 전력이 밀리는 거? 누가 봐도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뭐라도 해보려는 투지가 있어야지 이렇게 지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어린 선수들은 보내고 고참들한테만 쓴소리를 했어요. 문화를 만드는 건 이 고참들인데, 그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도 제가 지금 하는 이런 역할을 하기를 바랐거든요. 쓴소리는 누구나 싫어하지만, 또 누군가는 해야 되는 게 쓴소리거든요. 이미 다 큰 선수들한테 미안하긴 했지만, 많이 뭐라고 했어요.”

김정은의 진심은 통했다. 다음 경기였던 신한은행전, 마침내 79-65로 4쿼터를 마치며 개막 첫 승을 거둔 것이다. 직전 경기 5반칙 퇴장을 당했던 신지현은 이날 17점 9어시스트로 시즌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양인영은 시즌 하이 3개의 블록슛을 기록했고, 김시온은 7리바운드로 팀 내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경기가 끝나고 (신)지현이가 방송 인터뷰를 준비하는데, 다른 애들이 와서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김정은이 말했다. “물 뿌리는 세리머니를 해도 괜찮겠냐고요. ‘그게 왜?’하고 물었더니, 우리 애들 하는 말이 저 물 뿌리는 세리머니를 한번도 안 해봤대요. 맨날 6라운드에만 이겨서 저럴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우리가 TV로 일주일에 몇 번씩 보는 저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
“신인으로 이 팀에 입단했을 때도 좋았고, 우리은행으로 이적해 우승하던 시절도 행복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방식의 행복이 있어요.” 여자농구 통산 득점 2위 김정은이 말한다. “제가 2년 계약을 했잖아요? 이 남은 기간에 ‘내가 그동안 배운 것들을 어떻게 알려줘야 애들이 더 빨리 배울 수 있을까’하면서 고민하거든요. 애들이 워낙 말을 잘 듣기도 하고, 아무래도 친정팀이니까 더 그런 것도 있고…”

멘토링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김정은은 가장 김정은다운 방식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기로 했다. 안전모를 꺼내 들고 코트 위에서 직접 보여주는 것.
김정은이 지난 시즌 우리은행에서 기록한 리바운드는 3.9개. 그러나 한살을 더 먹어 36살이 된 그는 하나원큐에서 5.0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있다. 지난 시즌 0.4개에 그쳤던 블록슛은 올시즌 0.9개로 늘었다. 1.5개였던 경기당 자유투 시도는 올시즌 2.5개로 크게 늘었다. 코트 옆에서 팔짱을 끼고 말로만 지시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안전모의 턱끈을 채우고 직접 시범을 보이는 것이 김정은의 방식이다.
“언젠가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있으세요.” 김정은이 부천 체육관 천장의 선수단 배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난 시즌 매일 연패하실 때, 어느 날 경기를 하러 양복을 입는데 그 옷 입기가 정말 힘들었다고요. 옛날 하나외환 시절 김정은이었다면 그 말을 이해 못했을 텐데, 이제는 그 말이 뭔지 좀 알 것 같아요.”
김정은은 오늘도 낡은 몸을 이끌고 코트로 나선다. 한 손에는 안전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어린 선수들의 손을 꼭 잡고서. 그게 김정은이 지난 여름, 꼴찌팀 하나원큐라는 굳이 고된 길을 택한 이유다.

사진 = 이현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