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즌까지 KT의 유니폼을 입고 현역 생활을 이어가던 김영환이 은퇴를 선언했다.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2007년 드래프트에서 8순위로 지명됐던 김영환은 길었던 프로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코치로 새 출발을 알렸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코치로 KT의 팬들을 마주하게 된 김영환 코치를 <루키>가 만나봤다.
* 본 기사는 루키 2023년 9월호에 게재됐습니다 *

‘코치’ 김영환
김영환 코치는 그 유명한 2007년 드래프트 출신이다. 당시 1순위로 지명됐던 김태술을 포함해,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 등 KBL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던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던 드래프트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양희종과 김영환 코치가 은퇴를 결정함에 따라 이제 2007년 드래프트 출신 현역은 함지훈만이 남게 됐다. 그렇다면 김영환 코치가 은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계약이 1년 남긴 했었는데 선수단에 변화가 있으면서 구단에서 먼저 제안을 해주셔서 고민을 하다가 은퇴를 결정하고 지도자의 길을 가게 됐어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고민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이전부터 지도자에 대한 꿈이 있었고 다행히 좋은 기회가 주어져서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아쉬움도 남지만 모든 것을 끝낼 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1년을 더 한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지도 않을 것이고요.”
가족들 역시 김영환 코치의 결정을 반겼다. 특히 옆에서 늘 고생하는 것을 지켜본 아내가 응원을 많이 해줬다고 한다.
“와이프가 좋아하더라고요.(웃음) 선수 시절에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많이 보기도 했고... 아마 와이프가 보기에도 힘들어 보였나 봐요.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선수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또 예전부터 지도자의 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쉬움이 남더라도 그만하고 코치로 가는 것이 맞다고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가족들이 결정에 응원을 많이 해줘서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 연수를 다녀 온다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김영환 코치는 이러한 공백기 없이 곧바로 코치 업무를 시작했다.
“가장인데 쉴 수는 없죠.(웃음) 뭐 솔직히 다른 부분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조금 쉰다고 크게 리프레시가 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또 이런 기회가 쉽지 않잖아요. 쉬는 것은 작년에 벤치에서 충분히 쉬었습니다.”(웃음)
“물론 준비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해요. 그렇지만 아직은 막내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가지기보다는 감독님께서 추구하시는 농구에 대해 가교역할을 잘해서 감독님의 농구를 선수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을 더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수에서 코치로 보직이 완전히 바뀐 만큼 선수 시절과는 달라진 일과를 보내고 있는 김영환 코치다. 현재도 매일 같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며 새로운 업무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다.
“지금도 정신이 없어요. 어떤 시기에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은 확실한 판단이 서지를 않거든요. 그래도 감독님과 다른 코치님들이 배려를 많이 해주세요.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시거든요.”
“선수 시절에는 운동을 할 때는 집중을 하되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 생활을 하거나 휴식을 했는데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농구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선수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진짜 자는 시간 빼고는 온종일 농구 생각이에요.”
선수 시절에는 비시즌에도 워낙 철저히 몸 관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김영환 코치다. 그렇다면 코치가 된 지금은 이러한 부분을 다소 내려놓았을까.
“은퇴 이후 처음 2~3개월 정도는 운동을 안 했어요. 그런데 코치 생활을 하면서 선수들보다 체력이 떨어지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선수들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지친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밤에 시간이 조금 있으면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난 시즌까지 KT 선수들에게 김영환 코치는 ‘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순식간에 ‘코치님’으로 호칭이 바뀌게 된 상황이다. 선수들에게도 낯설고 어색한 상황일 수 있지만 사실 이는 김영환 코치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선수들이 처음 복귀를 하고 생활하는데 코치님이라는 말을 잘 못 하더라고요. 저도 코치님이라고 하라고 하는 것은 이상할 것 같아서 처음에는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받아들일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사실 저도 아직 코치라는 말이 입에서 잘 안 떨어져요. 지금은 선수들보다 제가 더 어색한 것 같아요.”(웃음)
선수 시절의 김영환 코치는 시즌 목표를 물어볼 때 항상 “전 경기 출전이 목표입니다”라며 다소 재미없는 대답만을 들려주던 선수였다. 그렇다면 코치가 된 지금은 다른 목표가 생겼을까. 지도자가 된 김영환 코치의 목표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저는 사실 인터뷰도 그렇고 평소 생활도 재미가 없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지도자로서도 뻔한 답인 것 같아요. 우선은 기본이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모든 것은 기본이 되어야 잘 이뤄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농구 스타일은 선수 때 했던 것에서 틀에 박히기보다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아들이고 공부해서 저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어요. 또 제가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원하기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선수들이 저를 어떤 지도자로 평가할지가 궁금한 것 같아요.”

‘선수’ 김영환
앞서 이야기한 대로 김영환 코치는 2007년 드래프트 출신이다. 고교 시절 득점 기계로 명성을 날렸고 고려대에서도 주포로 활약했다. 드래프트 당시에도 높은 순번의 지명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예상보다는 낮은 전체 8순위로 이름이 불렸다.
“주위에서 앞 순위에 뽑힐 것이라고 하기도 했고 저도 자신이 있었어요. 사실 그때는 화가 많이 났어요. 남 탓을 하기도 하고 핑계거리를 찾기도 하고요. 어렸죠.(웃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맞다고 인정이 되더라고요.”
김영환 코치를 처음 지명한 구단은 오리온스다. 실제로 드래프트 당시 사진을 보면 오리온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김영환 코치다. 그러나 사전 지명권 트레이드로 실제로는 전자랜드에 입단한 김영환 코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KTF(현 KT)로 트레이드가 되며 결국 데뷔는 KT에서 했다.
“그때 오리온스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바로 인사는 전자랜드로 가서 드렸어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드가 됐는데 사실 그때는 워낙 팀에 짧게 있다 보니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그때는 바로 합류를 하던 시기가 아니라서 팀 훈련을 많이 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제 가치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김영환 코치의 드래프트 지명 순번을 밀리게 한 원인 중 하나는 무릎 부상에 대한 우려다. 실제로 2번째 시즌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방문한 병원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무릎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좋지 않았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재활이 잘 되어 있거나 하던 시기도 아니었고 아프면 엑스레이 찍어보는 정도였어요. 제 생각에는 아마 그때 연골을 다쳤던 것 같은데 또 코치님이 무서우니까(웃음) 아프다고 말하기도 힘들더라고요. 그 이후에 계속 그런 것들이 누적이 되어서 나중에는 정말 커졌던 것 같아요.”
“병원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한다는 3군데를 갔는데 다들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재활하다가 안 되면 은퇴를 하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들었어요. 그때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고생해서 이제야 원하던 프로에 왔는데 못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많이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당시 추일승 감독님께서 독일 쪽을 알아봐 주셔서 거기서 수술을 받았는데, 거기서는 100% 회복은 힘들어도 노력을 하면 80~90%는 회복이 될 수 있다고 희망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거기서 희망을 많이 받고 이겨냈던 것 같아요. 또 아들이 프로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을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고요.”
이후 KT에서 조금씩 가능성을 선보이던 김영환 코치는 2012-2013시즌을 앞두고 LG로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났다. 이후 늘어난 역할을 적극 활용하며 수준급 포워드로 성장한 김영환 코치는 2016-2017시즌 도중 다시 KT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김영환 코치의 트레이드 대상은 ‘조선의 슈터’로 불리던 조성민 KGC 코치였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던 조성민 코치를 떠나 보낸 KT의 결정에는 엄청난 비난이 따라왔다.
“LG에서 주장을 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코치님에게 전화가 와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트레이드 마감일이 다 되었을 시기라 ‘누가 트레이드 되나? 주장이라 먼저 알려주시나?’ 생각하고 갔는데 코치님이 제 눈을 못 보세요.(웃음) 분위기가 싸한 상태에서 앉았는데 제가 KT로 트레이드가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구랑 됐냐고 물어보니까 (조)성민이 형이라는 거예요. 이거 큰일 났다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상대가 성민이 형이라 욕을 많이 먹기도 했고, LG는 또 아쉬움보다 만족하는 분위기더라고요. 쓸쓸하기도 했고 힘들었던 시기에요.”
이후 LG를 상대로는 유독 더 좋은 활약을 펼쳤던 김영환 코치다. 특히 트레이드가 된 후 첫 창원 원정을 방문해서는 종료 직전 KBL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버저비터를 꽂아 넣으며 LG에게 비수를 꽂았다.
“아무래도 그 슛은 기억에 많이 남죠. LG에서 팬들의 함성을 많이 받으면서 농구를 했는데 거기서 뜻하지 않게 그러다 보니 기쁘기도 하고 씁쓸한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 감정이 복합적으로 많이 왔던 것 같아요. 넣었을 때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끝나고 보니까 응원해주셨던 팬들에게 죄송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슛을 넣은 김영환 코치는 순식간에 반대편 코트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엄청난 점프를 선보이며 림을 잡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그거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뭔가 아쉬움이나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짜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표현된 것 같아요.”
‘주장’이라는 단어 역시 선수 시절 김영한 코치를 대표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LG 유니폼을 입은 2012-2013시즌부터 2019-2020시즌까지는 무려 8년 연속 주장을 맡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제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자리가 주장이라는 자리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선배들이나 주장을 봤을 때 솔선수범하고 열심히 하는 분이면 한마디를 해도 와 닿는 것이 있었는데 반대의 경우에는 반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일찍 주장을 맡으면서 저도 모르게 솔선수범해야 하는 상황이 됐더라고요.(웃음) 그러다 보니 농구에도 더 집중하게 되고 몸 관리에도 더 신경쓰고 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스트레스도 많고 힘든 자리지만 그래도 그 자리가 있었기에 제가 지금까지 몸 관리를 잘하면서 성장해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김영환 코치는 이제는 선수가 아닌 코치로 만나게 될 팬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많이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팬분들의 응원을 많이 받았어요. 팬분들이 계셔서 그런 것들을 이겨낼 수 있었거든요. 정말 많이 힘이 됐어요. 그 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제 또 체육관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고 공부도 열심히 할테니 코치 김영환도 많이 응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 = 강정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