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농구가 처음 전해진 것이 1907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농구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화려하게 빛나며 농구를 발전시켰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찬란했던 선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NBA에서 누가 진정한 G.O.A.T.(Greatest Of All Time) 인지를 가리는 것만큼 소모적이고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시대 최고의 농구 스타를 말한다면 ‘이상민’이라는 이름을 접어놓을 수는 없다.

‘전설’의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KBL 출범 초기까지 이어진 이상민의 인기는 곧 KBL의 전성기를 의미했고, 정규시즌 MVP 2회, 플레이오프 MVP 1회, 베스트5 4회를 차지하며 실력과 인기의 정비례 그래프를 그렸다.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 농구대잔치 우승, 트리플더블,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그가 남긴 화려한 족적은 9년 연속 올스타투표 1위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으로 이어졌다.

해당 기사는 <루키> 2023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0

지난 6월 26일, 전주 KCC 이지스는 이상민 전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을 코치로 영입했다. KCC는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로 2024-2025시즌까지 KCC 우승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민 코치는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삼성의 감독을 맡았다. 젊은 지도자였지만, 역대 삼성에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감독이다. 감독 출신의 지도자가 다른 팀의 코치로 복귀한다는 것, 그 팀이 현역시절 자신의 친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이상민이라는 것은 모두 이슈의 정점에 부족함 없는 소식이었다.

사실 ‘농구인 이상민’은 인터뷰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다. 사석에서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카메라 앞에 서거나 인터뷰 요청을 하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다. 월간지 게재가 우선이어서 인터뷰 일정을 7월 6일로 넉넉히 잡았는데, 그의 부임 이후 인터뷰 당일까지 수없이 쏟아지는 다른 인터뷰를 접할 수 있었다.

 

#1

“아마 이 인터뷰가 마지막일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찾지 마. 다른 거 많이 봤을 테니까, 오늘은 색다른 것 좀 물어 보세요~.”

시작부터 난관이다. “인터뷰도 안 좋아하시는 분이 이번에는 정말 많이도 하셨더라”라고 오랜만의 인사를 건네자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이런 답이 돌아왔다. 색다른 질문이라니...

연세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스타로 떠올라 선수 시절은 물론, 감독일 때도 ‘선수보다 팬이 더 많다’는 말을 들었던 그의 인기는 거의 30년간 유지됐다.

농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아 대중의 시선이 꾸준히 그를 쫓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농구, 특히 KBL이라는 단어를 놓지 않았던 이들에게 그는 감독 사임 이후 1년 반 정도의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팬들에게 노출되었던 인물이다. 코치 부임 후 열흘 간 쉬지 않고 보도된 인터뷰 역시 결국 비슷한 질문과 흐름을 유지했다.

그런데 ‘색다른 질문’이라니... 색다른 무언가를 던지기에 ‘이상민’ 자체가 너무 색다르지 않은 인물 아닌가!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숱한 인터뷰에 꾸준히 단련된 그다. 현장 복귀 인터뷰의 마지막임을 공언하며 그동안의 인터뷰와 차별화를 요구하는 장난기 어린 그에게 칩거했던 지난 시간에 대해 물었다.

“그동안 안했던 걸 쉬는 동안 많이 해본 것 같아요. 여행도 다녔고... 농구를 하면서 여기저기 많이 다니고 해외도 가봤지만, 그때는 일을 하러 가는 거라 다른 느낌이 없었거든요. 이번에는 여행을 좀 다녔어요. 여러 곳을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큰 애 졸업식이 있어서 겸사겸사 미국도 다녀오고 일본도 한두 번, 그리고 태국도 갔다 왔어요.”

그는 지난 해 1월 26일, 오랫동안 이끌었던 삼성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몇 년째 좋지 못했던 전력으로 인해 성적도 따르지 못했고, 팀에서 음주 운전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는 스스로를 ‘실패한 감독’이라고 했다. 지금은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부담과 스트레스 속에 놓여있었다. 오히려 감독에서 물러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이 더 좋아 보인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만 전해졌다.

“선수를 시작한 이후로 지도자까지 하면서 처음으로 휴식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감독을 그만두고 나서는 몸이 안 좋았어요. 대상포진에 한두 달 동안 몸이 좀 그랬거든. 그 시기를 지나면서 친구들이 많이 불러줬고, 잘 쉬면서 취미였던 골프도 치고, 개인적인 여가를 조금 즐겼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여행도 다녔고. 뭐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나갔네요.”

 

#2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 출연이 쏟아지는 시대다. 레거시 미디어는 물론 유튜브와 다양한 채널에 많은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농구 인기의 전성기를 살았던 주역들도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정점에 존재했던 이상민이라면 더욱 그렇다. 블루칩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제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 관심을 갖고 연락을 주신 분들이 계셨죠. 그런데... 아시잖아요? 제가 잘난 것도 아니고, 카메라에 대한 울렁증도 좀 있고, 말 주변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뭘 많이 먹는 스타일도 아니라 먹방을 할 일도 없고... 어떤 캐릭터가 없어요.”

사실 이런 건 섭외하는 관계자나 제작자 쪽에서 고민할 일이지 게스트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캐릭터 역시 본인보다 주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뭐 여러 명이 어디 가는 콘셉트의 방송에서도 연락이 왔었고... 또 낚시하는 프로그램에 나가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난 낚시를 못하거든? 그런데 거기 나오는 분들이 낚시 못하는 사람을 좋아한대.(웃음) 고맙게도 그렇게 관심을 보여준 분들이 계셨지만, 진짜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고사했어요. 솔직히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걸? 그나마 농구는 내가 그동안 해왔던 거라 이렇게 이야기라도 하지만, 다른 건 정말 카메라 앞에 설 자신이 없더라고.”

그렇다면 농구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 아닐까? 해설도 괜찮다! 그런데 그것도 고사했단다. 말주변이 없어서 안 된다는 자체판단이다. 중계를 보는 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데, 입에 붙은 현장의 은어만 툭툭 던지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함께 농구했던 후배들의 해설은 어떤 느낌인지 물어봤다.

“솔직히 별 생각 없이 보고 듣고 있는데, 다들 자기만의 컬러가 있고,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추)승균이는 감탄사 많이 하고, (신)기성이는 ‘이것이...’ 였나?(웃음) 자기 스타일이 있잖아요. 그걸 불만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신 거 같은데, 그게 자기만의 표현이고 생각의 전달이기 때문에 ‘만날 그것만 한다’고 하지 마시고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해요. 전체적으로 게임을 읽고, 판단하고, 거기에 맞게 평가를 하면서 말을 하는 게 사실 쉬운 게 아니거든요. (이)규섭이는 미국에 가서 1년 좀 넘게 코치생활을 했기 때문에 전문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요즘에는 젊은 팬들이 NBA를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3

방송을 피하는 것 같으니 뉴미디어 쪽으로 몰고 가보자. SNS와 유튜브, 포털사이트에도 독립적인 영상 콘텐츠가 넘친다.

“유튜브는 거의 안 봐요. 스포츠 보는 건 좋아하니까 주로 하이라이트 필름이나 보지, 다른 건 뭐... 아! 여행... 빠니보틀, 곽튜브 같은 프로그램... 이번에 부르마불(지구마불 세계여행) 보면서 ‘여행을 하면서 저렇게 찍고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드디어 하나 걸렸다. 쉬는 동안 새롭게 여행이라는 취미가 생겼으니 여행과 관련된 콘텐츠나 프로그램이면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취미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운동 외에 다른 무언가가 생긴 거지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난 운동 때문에 초등학교 이후로 소풍, 수학여행, 졸업여행, MT, OT 같은 걸 한 번도 못해봤거든요. 전지훈련만 하다 보니 온통 운동에 대한 목표밖에 없었던 거예요. 대학 처음 갈 때는 하숙생활에 대한 로망도 있었거든. 대학 캠퍼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던 것들... 그런데 막상 가니까 4년간 합숙 생활 딱! 뭐 사실 운동선수 합숙이면 군대나 마찬가지죠. 그렇게 살아와서 취미라는 것도 골프 외에는 딱히 없어요.”

“그리고 여행 유튜버들이 나오는 거는 볼 게 있고 재밌잖아요? 나는 아니라니까.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예를 들어 파리를 갔어.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도 가고 와이너리 투어도 해야 하잖아? 그런데 안 그래요. 돌아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냥 쉬다가 맛있는 거 먹고, 지나가다가 뭐 있으면 살짝 보는 거지. 찾아서 어디 가고, 사진 찍고, 그림 보고, 이런 거는 안 해요. 그러니까 나는 편하죠. 쫓기는 게 없잖아. 대신 남들한테 보여줄 건 없어요.”

틈도 없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철벽이다. 하지만 본인의 철저한 디펜스에도 불구하고 농구인들이 과거 인기를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소환된다.

문경은 KBL 경기본부장은 “처음에는 내 인기가 괜찮았는데, 이상민이 들어오면서 절반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우지원이 들어와서 남아있던 거에 절반을 가져갔다. 나는 인기가 매년 줄어드는데 이상민이는 자기 인기를 다 지키고 있더라”라고 회상했다. 농구대잔치 시절의 인기를 언급하던 다른 선수들도 “이상민 외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한다.

“그러게. (문)경은이 형이 진짜 탑이었거든. 그런데 매년 인기가 조금씩 줄었어.(웃음) 나랑 (우)지원이가 갉아먹었나봐. 그리고 다들 방송에 나오면 마지막에는 내 얘기로 끝내더라고. 아니, 방송에 안 나가더라도 그렇게 내 이름 언급했으면 출연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정도면 나간거지 뭐.”

‘선수 이상민’의 인기는 2013년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도 잘 나타난다. 주인공 성나정(고아라 분)이 학창시절 가장 열광했던 인물이 선수 이상민이었다. 당시 드라마에 문경은, 우지원, 김훈은 카메오로 출연했지만, 이상민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고맙기도 했고, 농구가 많이 침체됐는데 그걸로 농구 인기가 조금이라도 부활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죠. 결국 농구 인기가 떨어진 데에는 우리들 책임도 있었으니까요. 나가지는 못했지만, 작가 분들이 STC(삼성트레이닝센터)에 다 오시기도 했고, 섭외도 가장 먼저 들어왔었어요.”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원래 재미있게 봤었는데, 우리 얘기가 나오니까 더 특별한 마음이 들기도 했죠. 팬한테도 연락이 왔어요. 드라마 안에 붙어있는 제 사진 같은 것들, 자기가 싹 다 줬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에 안 나오냐고 해서 농담 삼아 ‘서태지도 목소리만 나왔잖아’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면 이상민이 드라마에 등장했던 적이 있긴 있다. 1994년 방영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이상민은 당시 연세대학교 선수들과 함께 등장한다. 만화 <슬램덩크>와 더불어 당시 농구 인기에 불을 지폈던 <마지막 승부> 마지막회에 이상민은 주인공들(장동건, 손지창)과 함께 국가대표 연습경기를 하는 모습으로 짧게 출연했다.

“맞네. 내가 방송을 안 나간 게 아니네. 나 드라마만 두 편이잖아. 많이 나왔네!”

 

#4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농구를 내려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북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았고, 2010년 은퇴할 때까지 27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이후 2년간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2012년 삼성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4년 4월부터 2022년 1월까지, 7년 10개월간 감독을 맡았다. 39년 동안 쉬지 않고, 농구 외길만 걸었다.

“선수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도자로서는 실패한 감독이잖아요. 성적도 못 내고 하위권만 계속 맴돌았으니 실패한 거죠. 그래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그 다음의 삶에 대해서 다시 농구를 계속 한다는 생각은 안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주위에서 한번 쯤 다시 우승을 해봐야하지 않겠냐는 말은 했는데, 당연히 우승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특별히 지도자 복귀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1년만 쉬어도 몸이 근질근질 거릴 거라고 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가 지도자를 그만둔 직후부터 그의 복귀 루머는 끊이지 않았다. 특정팀 복귀와 관련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그러니까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상한 이야기가 들리고 소문이 도니까 스트레스도 받고 짜증도 나는 거예요. 그냥 내가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결국 복귀를 선택했다. 야인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전창진 KCC 감독이 전화를 했다. “쉴 만큼 쉬었으니 나랑 재미있게 놀아보자”며 현장 복귀를 제안했다.

“와서 코치를 하라고 하셨으면 정중하게 고사를 했을 거예요. 며칠만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뭘 생각해? 월요일에 나와’라고 하시더라고요. 생각을 해봤어요. 다른데도 아니고 내가 프로생활을 시작한 팀이니까... 그리고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었잖아요.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한 번 코트로 돌아간다면 어디로 복귀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 거죠. ‘그렇다면 그건 KCC가 맞지 않을까’라고요. 또 나 스스로가 지도자로서는 실패를 했는데, 예전에 전창진 감독님과 대표 때 좋은 추억도 있었고, 감독님 밑에서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했어요.”

KCC는 지난 시즌부터 FA 시장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허웅과 이승현을 영입했고, 이번에도 최준용과 이호현을 잡았다. 선수 면면의 화려함은 KCC를 바로 슈퍼팀으로 끌어올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코치 이상민까지 영입한 것이다.

“깜짝 놀랐어요. 뉴스를 보기는 하니까... (최)준용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일본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었고... 갑자기 KCC로 간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 입단 인터뷰에서 어쨌든 준용이가 또 SK를 상대로 설전을 시작했고... 먼저 오셨던 기자분들이 올해 챔프전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지금 그림이 이렇게 그려졌으니, 다음 시즌에 KCC랑 SK가 챔프전에서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5

오랫동안 한국 농구는 침체기에 있었다. 원인에 대한 진단은 일찌감치 나왔다. 스타 부재와 경기력 하락, 국제 경쟁력 약화 등이 지적됐다. 하지만 대안이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했지만 부침이 계속됐다. 그러던 가운데, 반등의 기운이 감지됐다.

허웅이 이상민 이후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난 시즌에는 리그의 흥미도 높아졌다.

이규섭 해설위원이 “선수, 코치, 해설위원으로 지켜본 지난 20년 KBL 중 최고의 시즌”이라고 할 만큼 치열한 순위경쟁과 볼거리가 등장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캐롯의 분전이 펼쳐졌고, 챔프전에서는 안양 KGC인삼공사와 서울 SK 나이츠가 연일 관중 기록을 새로 쓰며 7차전 혈투를 펼쳤다. 마지막 경기는 연장까지 치르는 드라마를 썼다.

“6차전이었나? SK가 10점 넘게 앞서고 있어서 우승하는 줄 알았어. 잠깐 다른 거 하다가 봤더니 KGC가 따라잡고 뒤집더라고. SK가 힘들겠구나 싶었지. 정말 재미있게 했던 거 같아요. 양 팀 다 멤버가 워낙 좋았고, 경기도 잘했어요. 기자분들도 다 그러시더라고. 정말 오랜만에 예전의 농구 열기를 느껴본 거 같다고. 계속 팬들이 그렇게 즐기고 좋아하실 수 있도록 해야죠. 그게 우리들의 책임이고, 또 그렇게 해야 농구에 희망도 있고요.”

스타의 부재에 대해서는 이제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허웅이 이상민 이후 공백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이상민과 허웅 중 누구의 인기가 더 압도적이었냐는 이야기가 오갈만큼 허웅은 지금 시대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다. 3년 연속 KBL 올스타 투표 1위를 지키고 있다.

오랫동안 농구 현장을 지킨 이들은 절대적인 인기 자체만 따진다면 이상민의 아성이 우위라고 한다. 한 사무국장은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학교 이상민의 인기는 스포츠 선수 중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스타 중에 1위였다. 이상민이 인기 경쟁을 펼쳤던 상대는 서태지였다. 지금으로 치면 농구 선수가 BTS와 인기 경쟁을 했다는 것”이라고 회상한다.

실제로 당시 10대~20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잡지들의 인기 순위에서 ‘선수 이상민’은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을 모두 제치고 정상을 지켰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당시와 지금의 분위기가 동등 비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의 폭이 넓지 않았던 당시와 비교해 지금은 너무 많은 볼거리와 선택지가 있어서 스타가 확고한 영향력을 독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전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허웅이 보여주는 스타성은 당시의 이상민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이다. 코치 이상민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우리 때는 콘텐츠가 많지 않았어요. 심지어 지방에는 SBS도 안 나오던 시절이야. 지금 같은 인터넷도 없었죠. 기존 방송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던 시대잖아. 그런데 농구는 정규 방송에서 중계를 했고, <슬램덩크>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 10대, 20대 중에 <슬램덩크> 안 본 사람이 없었잖아요. 그리고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대박이 나. 거기에 또 우리가 나갔어. 나 3학년 때 인기가 정점으로 올라서기 시작해서, 4학년 때는 진짜 대단했지. 나는 그런 세대예요. 그런데 지금은? 콘텐츠가 너무 많아. 유튜브 잘 안 보는 나도 아까 말한 여행 콘텐츠 하는 사람들을 알죠. 페이커(프로게이머)는 세계적인 스타잖아. 외국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은 몰라도 페이커는 다 알 정도니까... 우리 때 ‘e스포츠’라는 말을 상상이나 했어요? 프로게이머라는 건 생각도 못한 직업이지. 그냥 오락하는 거였잖아. 지금은 아시안게임에 ‘e스포츠’가 포함되는 시대고, 그들이 국격을 높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콘텐츠가 너무 다양해. 이런 시대에 허웅이가 이만큼 끌고 온 거야. 난 이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농구와 선수들이 소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꾸준하게 노출이 되어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누구보다 미디어 노출을 회피했던 이의 입에서 노출의 중요성이 등장했다.

“나는 성격적으로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니까요. 우리 때는 대학갈 때, 특기생들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잖아. 내 전공이 왜 체육교육이 아닌 줄 알아요? 교생 선생님들이 중고등학교에 오면, 항상 교단에서 자기소개를 하더라고. 난 죽어도 저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체육교육과를 안 갔어요. 그나마 대학 4학년 때 성격이 조금 바뀌어서 지금 이 정도라도 하는 거야. 학교 다닐 때 소개팅, 미팅도 많이 못해봤어요. 나가면 뭐해? 말 한 마디 못하고 바보처럼 있는데...”

그는 자신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들 농구 외에 다른 걸 하라고 하면 죽어도 안 했어. 그런 면에서 지금 선수들이 우리 때보다 훨씬 낫지. 개인 유튜브도 하고, 미디어에 나가서도 열심히 하잖아. 스타성이 있어요. 우리 때 이런 게 있었다면 내가 과연 했을까? 아니,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니야. 방송 나가서 뭐 하는 거, (현)주엽이도 안 하려고 했어. 서장훈은 더 대단하지. <마지막 승부> 보면 농구하는 장면에 (서)장훈이 안 나오잖아. 그런 거 절대 안 한다고 끝까지 안했어. 지금 방송하고, 심지어 긴 머리가 가발 쓰고 나오는 거는 상상도 못했어. 연세대 선수들 중에서는 방송 쪽 출연에 관심이 있었던 건 지원이 정도였고, 나머지는 방송 노출 같은 거 진짜 싫어하고, 시켜도 정말 말 안 들었어.”

실제로 <마지막 승부>의 해당 장면을 살펴봤다. 서장훈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표팀 유니폼을 받는 장면은 나오지만, 이후 선수들이 함께 연습 경기를 뛰는 장면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싫대. 자기는 그런 거 죽어도 안 한다고 끝까지 안했어."

팬서비스도 마찬가지. 올스타 투표 9년 연속 1위를 하면서도 선수 이상민은 팬들에 대한 낯가림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살갑게 팬들을 대하는 요즘 선수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나도 그래도 친한 팬들이 있잖아.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인기 있는지 몰라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방송에도 안 나오고 잘 보이지가 않으니까 질리지가 않는대. 지금도 SNS 안 하고, 농구장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하더라고. 내가 일부러 그런 콘셉트를 잡은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대.”

올해 초, 이상민과 허웅의 인기를 비교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사실, 큰 의미가 없는 화두다. 한 두번 언급하면 그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걸 분석해야 하는 게 이 직업이기도 하다.

어떻게 기사를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두 시대를 지켜본 남자의 시선에서 이상민과 허웅의 공통점은 인기가 많은 것에 대해 도무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인기가 많다는 것’이라고 적어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기사창을 본 동료들은 ‘문장 하나로 이응사(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와 허웅의 팬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겠다는 기개있는 선택’이라며 “꼭 그렇게 기사를 마무리하라”고 뜻밖의 응원(?)을 보냈다. 얼른 문장을 지웠다.

“재밌네. 나도 기대된다. 이번 기사에는 꼭 그렇게 써 봐요.”

과거를 회상하던 이상민 코치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그때 그 문장을 지운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 같다.

 

#6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KCC는 FA 시장에서의 적극적인 영입으로 스타급 선수들을 대거 보유한 슈퍼팀이 됐다. 리그 MVP(최준용, 송교창), 외국선수 MVP(라건아), 플레이오프 MVP(이승현) 등 최우수 선수의 타이틀을 안았던 선수만 4명에 리그 최고의 스타 허웅까지 있는 팀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일 수 있다.

“그것도 우리 때와 차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코칭스태프의 강한 리더십이 먹히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다르죠.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선수들이 많아요. 예전보다 개인주의가 강해졌죠. 그런데 이게 KCC만의 문제일까? 난 아니라고 봐요.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종목, 그리고 일반 회사도 그렇다고 생각하거든. MZ세대 이야기들 하잖아요. 다 같은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아들이 있지만 다 똑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이 더 강해진 거고, 그걸 갖고 ‘우리 때는 안 그랬다’고 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 상도 받고 그랬는데 대학에 왔더니 슛을 던지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때는 그런대로 너무 좋았거든. 당대 최고의 스타 문경은이 있었고, 포스트에 주면 한 골인 김재훈, 정재근... 나중에는 서장훈이 왔지. 가장 확률이 높은 농구를 했던 거죠. 그런데 지금 이런 확률로 맞춘다고 ‘너는 이거 하지마, 너는 이것만 해’라고 할 수는 없어요. 60% 확률의 2점슛 위주로 농구하는 게 30% 확률도 안 되는 3점슛을 던지는 것 보다 낫다는 판단이나 농구 철학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거든. 하지만 그런 것들과 지금의 변화들을 잘 맞춰서 조화를 이뤄야죠.”

그는 흐름에 따른 유연한 변화를 강조했다.

“학생 때 우리는 슬리퍼 신고 못 다녔어요. 감독님한테 혼났지. 그런데 자매결연 맺은 미국 브리검영 대학에 갔는데 운동화를 신은 학생들이 한 명도 없는 거야. 더운 것도 이유였겠지만, 다들 슬리퍼를 신더라고. 키가 210cm인 애가 전등을 달고 있어서 뭐하냐고 물었더니 용돈 벌려고 아르바이트 한대. 수업 들어갈 거 다 들어가고 운동해. 심지어 1/3이 껌 씹으면서 운동하고 게임까지 뛰네. 껌을 씹으면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 우리하고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감독님이 슬리퍼 신으라고 하고, 껌 씹고 싶은 사람은 씹으라고 하셨어. 그러면서 문경은, 김택훈이 껌 씹으면서 한 거에요. 마인드가 조금씩 오픈되어 간 거죠.”

KCC의 사령탑은 KBL 지도자 중 가장 연배가 높은 전창진 감독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시대와 흐름의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최준용의 건의로 오후 훈련을 축구로 대체했고, 이튿날은 전준범과 이호현의 건의로 단체 영화 관람을 하기도 했다. 금쪽같은 비시즌 훈련을 두 번이나 양보하는 건 ‘호랑이’ 전창진 감독에게 이전에는 없던 모습이다.

“예전에는 축구도 못하게 했죠. 난 농구 시작한 이후로 축구를 해본 적이 없어. 괜히 하다가 다치기라도 해봐. 쓸데없는 짓 한다는 소리나 듣지. 우리 감독님도 이틀 연속으로 오후 훈련을 빼주시는 건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닌가 해요. 예전처럼 강압적으로 코칭스태프가 전달해서 하는 것과 어느 정도 자율성을 주면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며 만들어가는 것의 균형을 잘 맞춰야죠. 서로 소통하고 이해해주면서 다 잘되면 좋은데, 그게 안 되면 결국 상황이 돌고 도는 거니까.”

선수들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를 나타냈다. 그는 농구 전성기를 살았던 자신의 현역 시절보다 지금의 선수들이 훨씬 고급 농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기본기를 더 탄탄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킬이나 드릴을 보면 지금 선수들이 훨씬 낫지. 우린 그렇게 못해요. 안 해봤으니까. 비하인드 패스하면 할렘 농구한다고 혼나던 시절이에요. 그나마 나는 대학 3학년 때부터 하고 싶은대로 해도 안 혼나긴 했어요. 어려서부터 스킬이나 드릴을 배운 지금 선수들이 그런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나아요. 더 고급 농구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피봇 같은 거는 약해요. 훈련 때도 하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해. 농구의 기본적인 부분이 잘 다져지지 않은 거죠. 슈터들을 봐도 그래. 슛은 좋아요. 그런데 슛을 쏘려면 자리를 잡아야 할 거 아니야? 가장 기본인데 그런 부분이 부족해요. 예전에 (문)경은이 형이 완벽한 찬스를 잡았는데도 내가 패스를 못 주잖아? 그러면 경은이 형은 바로 다른 찬스를 보러 뛰어요. NBA의 레지 밀러도 그랬잖아. 물고기라고 불렀잖아요. 그게 슈터의 기본적인 움직임이기도 하고, 또 가드들도 그냥 바로 다시 돌렸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많이 부족해요. 우리 선수들도 보면 45도 지점에서 멈추고 코너까지는 안 뛰어요. 거기 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본적인 부분을 조금 더 연습하고 익숙하게 만들면 훨씬 좋아질 거예요.”

 

#7

친정으로 돌아온 이상민 코치는 이제 다음 시즌, 오랜 만에 전주체육관의 홈 라커로 들어가게 된다. 원정팀의 자격으로 방문했던 전주에 다시 홈팀의 일원으로 입성하는 것은 2007년 이후 무려 16년 만이다.

“떨릴 것 같아요. 여기(용인 마북동 KCC 체육관) 들어올 때도 떨리고 설레더라고. 그런데 단장님, 감독님, 코치님 만나고 다시 봤더니 전부 그대로더라고. 건물을 증축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보면 내가 있을 때랑 다 똑같아. 심지어 지금 앉아있는 이 소파도 똑같아요. 이거 30년 됐어. 저쪽에 있는 어항도 앞에 있던 게 뒤로 간 것뿐이지 똑같아. 사실 내가 삼성으로 이적했을 때는 어색함이 있었거든요. 처음 보는 시설에,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아는 사람은 (이)규섭이가 유일했는데, 규섭이는 대표팀에서 막내였다보니 나를 어려워했거든. 그런데 여기는 낯선 게 없더라고.”

그러나 경기장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다.

“KCC를 떠나고도 전주체육관을 많이 갔죠. 그런데 이제는 내가 어웨이가 아니라 홈 벤치로 다시 가는 거잖아. 확실히 설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팬들의 반응도 신경이 쓰이죠. 오랫동안 다른 팀에 있었잖아요. 당연히 싫어하는 팬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전주로 왔다고 다 좋아하나? 그래도 KCC에 다시 돌아온 만큼 홈 팬들이 환영해주셨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어요.”

바라보는 성적은 당연히 우승이다.

KCC 체육관에는 그들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승 배너가 걸려있다. 통합우승 2회(97-98, 98-99), 챔프전 3회(03-04, 08-09, 10-11), 정규시즌 3회(99-00, 15-16, 20-21) 등 찬란했던 그들의 족적이 남아있다. 선수 이상민이 함께한 우승의 역사도 여기에 함께 녹아있다.

“내가 뛰면서 걸린 우승 배너가 딱 절반이더라고요. 어쨌든 선수로서는 우승 배너를 달았는데, 감독이나 코치를 하면서는 한 번도 우승을 못했잖아요. 지도자로서 다시 팀에 왔기 때문에 코칭스태프의 일원으로 우승 배너를 하나 더 다는 게 당연히 목표일 수밖에 없고 바람이에요.”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낸 스타 선수는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젊은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최근의 추세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오히려 유연하고 상황 대처에 빠르다. 이상민 코치와 같은 시절을 보낸 전희철 감독(SK)은 지휘봉을 잡은 후 바로 통합 우승을 차지했고, 2년 연속 챔프전에 올랐다.

물론 지도자의 성과를 현역 시절의 활약과 연결하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현역 시절, 얼마나 훌륭했는지 여부보다 얼마나 지도자로서 많은 준비와 경험을 했는지가 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선수로서 가장 화려한 길을 걸었던 이상민은 지도자 연수와 코치를 거쳐 감독을 역임했고, 재충전의 시간을 마친 후 현장으로 복귀했다. 스스로 ‘실패한 지도자’라고 수차례 언급한 것은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일수도,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자조일수도 있지만, 결국 다시 출발선에 올라 달릴 준비가 됐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뜨거운 함성이 다시 농구장을 채우고 있다. 전주는 팬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모아 터뜨릴 준비를 마쳤다.

KCC가 전주로 연고를 옮기고 처음 챔피언에 올랐던 2004년. 정점에서 정상의 축포를 쏘아 올렸던 플레이오프 MVP는 ‘선수 이상민’이었다.

정규시즌 MVP만 두 번 차지했던 이상민의 마지막 MVP이자, 유일한 그의 플레이오프 MVP 활약은 전주에 첫 트로피를 선물했다. 16년 만에 돌아오는 이상민의 이번 행보가 전주에 어떤 선물을 안겨줄지, 팬들의 기대는 더욱 높아만 갈 것이다.

사진 = 이현수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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