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오랫동안 찬란하진 못했을지언정...

부상이 전염병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이 부상을 당하면 연쇄적으로 부상이 일어나는 불운이 반복되는 것도 사실이다. 부상 리포트를 펼쳐놓고 보면 뜻밖의 당황스러운 점이 발견될 때도 있다.

지난 시즌 삼성생명이 그랬다. 주전으로 낙점됐던 앞선의 3명(윤예빈, 이주연, 키아나 스미스)이 모두 부상으로 낙마했다. 공교롭게도 3명 모두 무릎 부상이었다. 이들 모두 이번 시즌 복귀가 예정되어 있다.

삼성생명은 무릎 관리가 필요한 선수들이 많다. 지난 시즌의 3명은 물론, 김나연과 김한비도 무릎 부상에서 복귀했고, 주장인 배혜윤도 무릎 관리가 필요하다. 현역 뿐이 아니다. 끝내 은퇴를 선택해야 했던 선수도 있었다.

해당 기사는 <루키> 2023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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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쉽죠. 정말 선수 생활의 정점에 오르는 딱 그 시점이었거든... 그 부상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강이슬(KB)하고 리그 최고 2~3번을 다투고 있지 않았을까 해요.”

그의 이름을 꺼내자 임근배 삼성생명 감독에게서 애잔한 아쉬움이 전해졌다. 자신과 함께 하며 그림자의 시간을 걷어내고 리그 최고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 중이었던 선수. 길어지는 재활 중에도 팀을 위해 출전을 자청했고, 항상 발전을 위한 욕심이 넘쳤던 선수. 선수 생활을 하면서 임근배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을 여러 차례 전하기도 했던 그는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서 “우승을 하면 감독님께 큰 절을 올리겠다”고도 했고, FA 재계약 당시에도 “내가 어떻게 감독님을 저버리겠냐”며, “감독님을 믿고 가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결국 지난 해 그는 은퇴를 선택해야 했다. 정규리그 377경기 평균 35분 42초 출전 8.2득점 2.5리바운드 1.6어시스트. 그가 남긴 프로 14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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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은 과연 강팀인가?

‘강팀’의 기준은 당연히 성적이다. ‘레알 신한은행’ 시절과 ‘우리은행 왕조’ 시절, 그리고 ‘박지수 강점기’를 거치며 과거의 명성만큼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삼성생명은 플레이오프의 단골손님이고, 2020-2021시즌에는 WKBL 최초로 정규리그 4위 팀의 챔프전 우승을 달성했다. 지난 시즌에는 주전들의 줄부상에도 정규리그 3위를 차지했고, 현재도 두터운 선수층과 많은 유망주를 보유하고 있다.

전력을 놓고 볼 때 삼성생명이 리그 상위권의 팀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6팀 중 4팀이 진출하는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 자체만을 두고 ‘강팀’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성적 외에 무엇을 더 넣을 수 있을까? 상대를 압도하는 힘과 꾸준함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삼성생명은 냉정하게 ‘강팀’이라고 분류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WKBL에서 현재 이런 조건을 오롯이 충족하고 있는 팀은 우리은행이다. 2012-13시즌 이후 11년 동안 2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11시즌 동안 우리은행은 359경기에서 283승 79패, 승률 0.788로 리그를 압도했고, 팀을 구성하는 선수들 역시 코트 위에서 상대에게 강한 위압감을 발휘했다. 지고 있어도 이길 것 같고, 앞서고 있어도 느슨함이 없다.

KB는 2년 연속 정규리그 7관왕을 차지한 박지수를 앞세워 이러한 모습을 갖추는 듯 했지만, 지난 시즌 박지수의 부재와 더불어 ‘강한 KB’의 이미지를 꾸준히 가져가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은행과 더불어 강팀의 면모를 가장 압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팀임은 틀림없다.

이런 면에서 삼성생명은 아직 부족함이 있다. 좋을 때는 최강 전력의 팀을 상대로도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지만, 이어진 경기에서 리그 최하위권인 팀에게 맥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꾸준함이 부족하고 기복이 심하다.

삼성생명 관계자도 “‘강팀’보다는 ‘도깨비팀’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직은 성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임근배 감독은 “배혜윤을 제외하면 선수들 중에 경험이 많은 선수들이 부족하다. 분위기나 고비를 넘기는 힘은 아직 보완해야 한다”고 짚었다.

독기(毒氣).

지고 싶은 선수는 없다. 하지만 코트 위에 서있는 것만으로 ‘죽어도 지기 싫다’는 아우라를 보여주는 선수들은 많지 않다. 투쟁심과 호승심, 그리고 어떻게든 승부를 승리로 마감하고야 말겠다는 독기를 보여주는 선수. 우선 KB는 주축인 박지수와 강이슬이 ‘죽어도 지기 싫다’는 것을 표정으로도 나타내는 선수들이다.

10년 넘게 이기는 농구를 이어온 우리은행 선수들도 마찬가지. 박지수-강이슬과는 결이 다르지만 주축 멤버들 모두가 무섭게 상대를 괴롭힌다. 핵심 멤버들의 이런 모습은 팀 전체에 퍼지고, 상대를 진절머리 나게 만드는 팀 컬러로 무장된다. 삼성생명을 쉽게 강팀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이런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020-21시즌 정상에 올랐던 삼성생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갔다. 챔프전 MVP였던 김한별을 내보내는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객관적으로 리그 2연패를 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라는 냉정한 자체 평가와 더불어, 팀의 미래를 위해 리빌딩의 시점이라는 단호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2021-22시즌. 삼성생명은 WKBL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디팬딩 챔피언이 됐다. MVP였던 김한별의 이적이 컸다는 평가가 많았다. 과연 그럴까?

김한별의 부재는 우승 실패의 원인으로는 어울린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탈락의 원인과는 맞지 않다. 오래 전부터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렸던 김한별은 정규리그 전체에 꾸준함을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삼성생명은 이미 김한별을 장기 레이스에서는 중요한 경기와 결정적인 흐름 위주로 활용했고, 플레이오프 이후에 폭발력을 가져가는 쪽으로 방법을 찾았다. 정규리그 내내 꾸준히 팀과 호흡하며 전력을 다져가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삼성생명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자체는 김한별보다는 김보미와 박하나의 대안을 찾지 못한 게 더 컸다.

김보미와 박하나는 김한별과 더불어 삼성생명의 투지와 독기를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2021-22시즌, 삼성생명은 은퇴(김보미), 이적(김한별), 부상(박하나)으로 이들을 활용할 수 없었다. 주장 배혜윤이 있었지만, 전력에서 사라진 이들이 코트 위에서 기량은 물론 무형의 모습으로도 보탰던 힘의 소실은 쉽게 복원할 수 없었다. 여전히 삼성생명은 이런 부분에서는 아직도 채워야 할 부분이 많다.

#2
박하나가 본격적으로 출전 기회를 가져간 것은 프로 4년차였던 2011-2012시즌이었고, 팀의 주축으로 올라선 것은 삼성생명으로 이적한 이후였다. 그렇다고 박하나를 대기만성의 예로 볼 수는 없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박하나는 2009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신세계 쿨캣에 입단했다. 박혜진(우리은행)에 이어 두 번째로 지명된 박하나는 어려서부터 유망주였고, 데뷔 시즌부터 17경기에 출전했다.

꾸준히 경기 수와 출전 시간을 늘려갔고, 2011-12시즌부터는 정규리그 전 경기에 출전했다.

신세계 해체와 하나원큐 창단의 진통을 겪었던 2012-13시즌, 당시 팀을 이끌던 조동기 감독은 박하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려줄 수 있다는 게 조 감독의 판단. 하지만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박하나는 2012-13시즌 평균 5.97점, 2013-14시즌에는 6.14점을 올렸다.

하지만 조동기 감독의 기대는 여전했다.

조 감독은 박하나에 대해 “성격도 밝고 긍정적이고, 농구에 대한 이해력도 좋다. 신체능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 선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크고, 외모를 보면 스타성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박하나가 터진 경기는 모두 이겼다. 박하나가 되면 우리 팀도 함께 살아난다는 것”이라며, 당시 팀의 “대반격 시나리오의 마지막 퍼즐이 박하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FA 자격을 획득한 박하나가 이적을 선택했다.

“아시다시피, 전 정말 욕심이 많은 선수였잖아요. 픽앤롤도 하고 싶고, 드라이브인도 하고 싶고, 다양한 플레이를 하고 싶었는데, 하나원큐 시절에는 저한테 슛 위주의 요구가 많았어요. 어려서부터 캐치 앤 슛을 주무기로 한 선수들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조금 더 다양한 걸 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플레이 롤이 슛으로 한정된 것. 신세계에서 하나원큐를 거치는 동안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이유 역시 그것이었을까?

“프로 적응이 문제였죠. 일단 신체적인 부분에서 많이 부족했어요. 그때는 제가 좀 왜소했고, 몸싸움에서 신체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리고 프로 입단 무렵에는 17~18살 많은 언니들도 계시다보니 부담도 컸고요. 언니들 눈치도 많이 봤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그러면서 부담도 많이 느꼈어요. 제가 욕심도 많고 적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언니들한테 먼저 다가가서 살갑게 구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더 어려웠죠. 제가 나중에 언니가 되고 생각해보니까 참 밉상이었겠더라고요. 욕심 많고 달려들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붙임성이 있거나 살갑게 굴지는 않고, 또 감독님이나 코치님은 신경을 써주고 하니, 별로 예뻐할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리고 같은 팀은 물론 상대 팀 현역에도 어마어마한 언니들이 많았을 때잖아요. 전주원 코치님, 정선민 감독님이 계셨고, 저희 팀에도 (김)지윤 언니, (양)정옥 언니도 계셨으니까...”

 

박하나의 이적은 당시 상당한 이슈가 됐다. 엄청난 오버페이 논란이 일었다. 직전 시즌 연봉 7500만원이었던 박하나가 삼성생명으로 이적하며 2억 1100만원의 ‘FA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이미선(삼성생명, 2억 7000만원), 신정자(KDB생명, 2억 5000만원), 양지희(우리은행, 2억 2000만원)에 이어 2014-15시즌 WKBL 연봉 4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24세였던 박하나는 20대 선수 중 최고 연봉자가 됐고,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변연하(KB, 2억원), 김정은(하나원큐, 2억 1000만원), 김단비(신한은행, 2억원)보다도 높은 순위에 올랐다. 2013-14시즌 박하나의 성적이 35경기 평균 26분 7초 출전, 6.1점 2.0리바운드 1.1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21.9%였음을 고려하면 오버페이 논란은 어쩌면 당연했다.

삼성생명은 박하나 영입 2년 전, 우리은행에서 고아라를 FA 영입하는 과정에서도 예상치 못한 규모의 계약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삼성생명은 2011-12시즌 6천만원의 연봉을 받고 33경기에서 평균 17분 24초를 뛰며 6.3점 3.4리바운드 1.1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19.2%를 기록했던 고아라를 FA 시장에서 1억 9천만원에 잡았다. 이 역시 오버페이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소 다른 기조를 가져갔던 삼성생명의 생각은 확고했다.

당시 삼성생명 관계자는 “현행 WKBL FA 제도는 각 팀의 에이스급 선수들의 이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트레이드가 활성화되어 있는 리그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 상승을 위해 선수 영입을 노리는 팀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선수에게 많은 비용을 투입해 영입하는 것뿐이다. 당연히 ‘오버페이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리스크가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라면 성과를 내기 위한 투자는 당연한 것 아닌가? 이렇게 영입한 선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때는 그에 맞는 기준으로 단호하게 협상할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이적 첫 해, 직전 시즌과 비교해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던 고아라는 연봉이 47.4% 삭감됐다.

하지만 여론은 좋지 못했다.

‘박하나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단호한 입장은 물론 ‘삼성생명이 정상급으로 반등하지 못하는 이유가 부풀려진 선수들의 몸값’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심지어 당시 삼성생명이 대규모 인원감축에 나서며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을 언급하며 ‘모기업은 인건비를 줄이며 근로자를 내보내는데, 농구단은 흥청망청 지출한다’는 지적까지 이어졌다.

야심차게 이적을 선택한 박하나에게는 당황스런 분위기였다. 당시 그는 의연하게 “신경 쓰지 않고, 구단에서 선택해준 만큼 거기에 보답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했지만 주변의 날선 반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부담됐죠. 처음에는 진짜 모든 게 신경 쓰였어요. 그때는 뉴스에 댓글 창이 닫히기 전이었잖아요. 원래 저는 기사나 댓글도 잘 봤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댓글 보는 것도 무서웠어요. 그리고 외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보다보니 우리 팀 안에서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부담됐고,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삼성생명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언니들이 많았거든요. (최)희진 언니, (박)태은 언니, (고)아라 언니, (배)혜윤 언니... 해서 다들 3살 안쪽 정도 차이었는데, 이 언니들이랑 같이 맞추면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팀의 리더는 (이)미선 언니였고, (김)계령 언니, (허)윤자 언니도 있었는데, 이 언니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사실 제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존의 다른 언니들이 하던 롤을 가져와야 하는 부분도 필요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고, 미선 언니의 은퇴 시점과도 맞물리면서 제가 해야 하는 역할도 늘어났고요.”

논란의 쓰나미를 견뎌낸 박하나는 결국 삼성생명에서 결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적 첫 시즌, 처음으로 평균 10득점 이상을 올렸다. 어시스트, 스틸, 3점슛 성공률도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이러한 박하나의 반등은 반짝 활약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하나의 성적은 삼성생명 이적 전과 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적 후 매년 자신의 영역과 활용 가치를 높여갔다. ‘슈터’의 이미지 속에 1~2번을 오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던 박하나는 삼성생명 이후 확실한 득점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수비 적극성도 높아지며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역할을 해주는 선수가 됐다.

삼성생명 이적 후, 3점 야투상과 자유투상을 수상하기도 한 박하나는 결국 2018-19시즌, 생애 처음으로 WKBL 베스트5에 선정됐다. 국가대표에 뽑혀 2017 FIBA 여자농구 아시아컵,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2018 FIBA 여자농구 월드컵에 출전했다. 한국 여자농구와 WKBL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3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수확의 계절을 누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발단-전개-절정-결말’로 가장 단순하게 구분하는 소설의 구성 단계에서도 절정은 가장 짧다. 삶도 그렇다. 전성기는 길지 않다. 영원할 것 같은 절정의 기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박하나에게 이 전성기는 가혹할 만큼 짧았다. WKBL 베스트5에 선정되며 자신의 프로 인생 중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던 바로 그 해, 뜻하지 않은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은퇴한 박하나의 현역 그래프를 놓고 볼 때, 그의 전성기는 2017-18시즌과 2018-19시즌이다. 하지만 부상이 아니었다면 전성기 기간은 물론, 그 성과 역시 현재 남겨진 것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수 있다.

임근배 감독은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였고,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리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서는 과정에 있었다”고 회상한다.

2019년 8월, 도쿄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로 소집됐던 박하나가 부상으로 명단에서 제외됐다. 통증이 있었던 왼쪽 무릎이 좋지 않았고, 대표 소집 후 상태가 악화됐다. 처음에는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큰 부상은 아니다, 수술을 해야 하지만 무릎 수술치고 큰 수술은 아니다. 경과가 좋으면 다음 시즌을 치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박하나는 대표팀에서 돌아온 뒤,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진행 중인 강원도 속초를 방문해 삼성생명 선수단을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상과의 전쟁은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반대쪽인 오른쪽 무릎도 문제가 생겼다. 무릎 부상과의 사투가 이어졌고, 정상적인 컨디션도 유지할 수 없었다. 2019-20시즌에는 11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그 다음 시즌도 19경기 출전에 그쳤다. 선수 생명을 걸고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2021-22시즌에는 결국 코트에 서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고, 2022년 5월, 은퇴 소식이 전해졌다.

“더 이상 코트에서 뛸 수 없다는 건 정말 슬펐죠. 왼쪽 무릎 때문에 부상이 시작됐는데, 오른쪽까지 다쳤잖아요? 왼쪽은 그냥 연골 제거만 하고 불편함을 안고 뛰었는데 오른쪽 무릎은 그런 불편함을 없애도 완벽하게 가려고 수술을 한 거였거든요. ‘그때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원래는 일본에서 수술을 하려고 했어요. 같은 부상으로 수술을 했던 (이)경은 언니(신한은행)도 그걸 추천했고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나가서 수술 받는 게 쉽지 않았어요. 국내에서는 많이 하는 수술이 아니어서 조금 실험적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면 뼈에 구멍을 뚫어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 방법을 택했거든요. 예후가 좋지 않았고, 구멍을 뚫는 수술까지도 다시 하게 됐으니, 그때의 선택이 많이 아쉬워요. 수술을 하지 않고, 왼쪽 무릎처럼 제거만 했어도 계속 뛸 수 있었을텐데...”

마지막까지 선수로 돌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은퇴 후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프로에 올 때 2순위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성장은 더딘 편이었잖아요. 어쨌든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해요. 베스트5를 받은 때가 2018-19시즌이니까 진짜 10년이 걸린 거죠.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부상을 당했고 바로 떨어졌잖아요. 결국 몸 관리를 잘못한 제 잘못이지만 모든 게 원망스러웠어요. 이렇게 어렵게 했는데...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는데...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에 머무는 시간조차도 너무 짧았으니까요.”

WKBL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관계자들은 아직도 숙명여고 박하나를 기억한다. 고교생 박하나는 WKBL이 주최하는 엘리트 캠프에서도 유독 적극적이고 발전 의지가 높았던 선수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낯가림과 수줍음이 많았던 당시 세대에서 박하나는 항상 손을 번쩍 들고 시범과 교육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적극성과 열정, 그리고 잘하고자 하는 욕심이 눈에 띄었던 선수였다.

“우승도 한 번 하고 은퇴하기는 했지만, 그 시즌에는 제가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에 뛰지 못했잖아요. 우승은 정말 감격스럽고 좋은 기억이죠. 하지만 그래도 몸이 괜찮았을 때 뛰었던 기억들이 더 좋게 남아있어요. 그때는 정말 농구가 재미있었거든요. 나는 이제 농구가 재미있고, 뭔가가 보이는 것 같고, 코트 안에서나 밖에서나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었고, 더 잘하고 싶었고, 더 올라가고 싶었어요. 시상식에도 더 많이 가고 상도 더 받고 싶었는데, 몸이 안 되니까 정말 힘들도 속상하고,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어요.”

 

#4
박하나는 은사이자 자신이 정말 많이 의지했던 임근배 감독, 그리고 자신의 전성기를 이뤄냈던 삼성생명에도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삼성생명은 박하나의 무릎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며 경기 출전이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박하나는 불규칙적으로 경기에 나섰다.

임근배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본인 의지가 강해서 조심스럽지만 출전을 시킨다. 출전 시간은 10분~15분 정도로 조절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경기에 나서면 임 감독이 사전에 밝힌 것 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하나가 부상 속에 치른 마지막 두 시즌은 모두 평균 출전 시간이 20분대다.

“저만 생각했다면, 그때 뛰지 않는 게 맞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선수다보니까 뛰고 싶은 마음은 늘 있죠. 게다가 팀이 정말 힘들 때였거든요. 부상 때문에 우리만 외국인 선수 없이 경기를 뛰는 상황도 있었어요. 성적도 안 좋았지만 선수들이 정말 힘들어했어요. 언니들이 ‘5분만 코트에 서 있어만 주면 안 되냐’고 할 정도였거든요. 저도 어떻게든 돕고 싶었고요.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서 뛰면 출전 시간이 조금씩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나중에는 그 시간이라도 조절을 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원망도 생겼죠. 구단에서 많이 배려하고 챙겨주셨지만, 마지막 시즌 마치고 재계약을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서운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다 원망스러웠고, 다 힘들었죠.”

하지만 은퇴 후 빠르게 마음을 정리했다. 미련이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프로잖아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도 감독님 만나서 제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고, 좋은 팀에서 좋은 동료들이랑 즐겁게 농구했잖아요. 저보다 어머니가 ‘선수 박하나’를 보내는 걸 더 힘들어 하셨어요. 은퇴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제 현역시절 영상을 보시더라고요.”

“박하나는 욕심쟁이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뭘 하든 다 잘하고 싶었어요. 그 욕심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고요.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코트에서 플레이할 때 이걸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욕심과 나쁜 욕심을 빨리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어요.”

앞서 언급했듯 임근배 감독은 박하나가 성장을 이어가며 팀에 남았다면 강이슬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2~3번을 다투고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가 경기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지금 삼성생명의 앞선이 괜찮잖아요? 키아나 스미스도 정말 잘하더라고요. 젊은 선수들이 많이 뛰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제가 지금 팀에 있어도 그 선수들 백업이지 않을까요? 교체 멤버로 뛰면서 베테랑이 필요할 때 들어가서 해야하는 역할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또, 코트 밖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거 같아요. 저는 유망주로 들어와서, 더디게 성장했고, 부침도 겪었고, 거의 10년차 즈음에 전성기를 맞았으니까 팀에 있는 대부분의 동생들과 공감할 수 있고, 그 시기에 대해 조언도 해 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만약 부상 없이 2018-19시즌 이후의 상승세를 꾸준히 이어왔다면 어땠을까?

“아... 그랬다면... 제가 주전으로 뛰어야겠네요. (윤)예빈이랑 (이)주연이는 제가 조금만 더 데리고 뛰어줘야죠. 리그 최고 2번 놓고, (강)이슬이하고 경쟁도 해야죠.”

스포츠에서, 아니 인생에서, 가장 부질없는 것이 과거에 대한 ‘만약’이라는 다른 가정이다. 하지만 결과를 바꿀 수 없을지언정, 추억이고 의미이며, 하루하루의 보상은 될 수 있다. ‘부상 없이 건강한 34살의 베테랑 선수 박하나’를 상상하며, 그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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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나는 현재 유소년 농구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충북 충주의 삼성 리틀 썬더스 농구단 코치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작년 6월 1일부터 시작해 어느덧 1년이 됐다.

“특별히 일이 있을 때는 오전에 출근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오후에 나와서 밤 9시까지 가르쳐요. 9시 퇴근이니까 선수 때랑 시간 사이클은 큰 차이가 없네요. 농구를 잘 보지 못하는데, 경기 시간이랑 아이들 가르치는 시간이 겹쳐서 시간이 잘 안 나거든요. 주중과 주말 하루씩, 1주일에 이틀을 쉬는데, 최근에는 저희 농구교실이 준비하는 게 있어서 조금 바쁘고, 주말에는 대회가 많아서 쉬는 날이 거의 없는 거 같아요.”

유소년 지도자는 박하나가 현역 시절부터 은퇴 후 생각했던 진로였다. 그는 유소년 지도자가 아니면 필라테스 강사를 생각했다고 한다. 프로나 엘리트 지도자는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트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건 뭔가 그들의 인생을 제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담스러웠어요. 그리고 프로팀 지도자는 그 스트레스를 정말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요. 유소년 농구도 대회에 나가고 승패가 갈리니까 경기에 따른 스트레스가 있고 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있지만, 선수로서 또 프로 지도자로서 받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게 훨씬 낫죠. 저는 지금이 좋아요.”

처음에는 고향에서 유소년 농구교실을 열 생각이었다. 마침 현역시절 친구였던 조준희(전 삼성 썬더스)가 충주에서 삼성 리틀 썬더스 농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기 위해 센터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은퇴하자마자 아무것도 모른 채, 농구교실을 열고 무작정 가르치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당초 운영하는 방법과 여러 사안들을 배우고 고향 쪽에 농구교실을 차리고자 했지만, 잠깐 보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고 마침 충주에 자리가 있어 코치로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연고가 없었던 충주에 자리를 잡고 1년째 아이들을 지도 중이다. 농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코트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하고, 선수가 되고 싶은 의지와 재능을 갖춘 아이들이 엘리트 코스로 진학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고 있다.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농구를 즐겁게 하지는 못했거든요. 신나고 즐거운 농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농구를 하면 여러 장점이 있잖아요? 운동을 하면서 늘게 되는 신체 능력과 건강은 당연하고, 사회성과 협동심도 있는데, 그런 장점을 즐겁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저는 뭐, 어려서부터 욕심을 길렀지만,(웃음) 아이들에게 이런 좋은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고 싶죠.”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점도 많다.

“제 성격 아시죠? 저는 부모님들이 계실 때도 아이들한테 지적할 부분이 있으면 목소리도 높이고 혼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들이 집에서 ‘하나 선생님이 그렇게 혼내면 안 무섭냐’고 물어보면 ‘혼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배운다고 생각한다’고 한대요. 저는 어릴 때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이들이 정말 놀랍고 신기한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신경을 많이 쓰고,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이렇게 놀랍고 신기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농구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고,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지난 시즌, 박하나는 서울 삼성 썬더스의 홈 경기 이벤트로 아이들을 이끌고 잠실체육관을 찾았었다. 기자석에서, 코트 사이드에 서있는 박하나를 한동안 바라봤다. 이제는 코트의 주인공이 아닌 모습의 박하나를 농구 경기장에서 보는 것이 어색했다. 아이들 인솔에 여념이 없는 박하나의 뒷모습에 익숙한 숫자 1번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이 낯선 그림이 용인체육관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스타’ 박하나의 현재이고, 그가 설계하는 인생 2막이다. 팬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그는 농구인으로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투혼으로 코트를 누볐던 그의 넘치는 욕심은 이제 어린 아이들을 향하고 있다.

여전히 ‘선수 박하나’가 그립지만, 그가 전해준 ‘즐거운 농구’를 통해 새롭게 코트 위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게 될 미래의 선수들에게 ‘하나 선생님 이야기’를 머지않아 듣게 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보자.

사진 = 박진호, 이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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