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때요? 잘 어울려?”
하나원큐의 태백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지난 5월 16일. 태백고원체육관에서 웨이트트레이닝 중 눈이 마주치자 김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6년 만에 다시 입은 하나원큐의 연습복이 어색하지는 않은지, 겸연쩍은 모습이었다.
조금도 낯설지 않다. 우리은행의 화려한 영광을 함께한 베테랑이지만, 여전히 그의 역사는 우리은행보다 신세계에서부터 이어진 부천 하나원큐에 더 깊게 남아있다. WKBL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김정은이 내린 선수로서의 마지막 선택지는 ‘친정’ 하나원큐였다.
해당 기사는 <루키> 2023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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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WKBL의 4월은 뜨거웠다. FA 제도가 부분적으로 바뀐 이후 대어급 선수들의 이동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졌다. 2020년 박혜진(우리은행), 2021년 강이슬(KB), 2022년 김단비(우리은행), 신지현(하나원큐)에 이르기까지 매년 대어급 선수들의 거취 문제로 FA 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김단비의 이적과 보상으로 김소니아(신한은행)가 이동하며, 핵심 전력의 변화가 있었던 지난 시즌과 비교해 처음부터 시장이 조용했다.
내년 안혜지, 진안, 이소희(이상 BNK), 박혜진, 박지현, 최이샘(우리은행), 배혜윤(삼성생명), 김소니아(신한은행) 등이, 그 이듬해에는 박지수(KB)가 FA 자격을 획득하기에 향후 2년간은 FA 시장이 더욱 뜨겁게 타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는 이 열기 한 가운데의 골짜기처럼 조용한 시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일단 최대어인 강이슬이 일찌감치 소속팀 잔류 가능성을 직접 언급했고, 또 다른 대어인 김한별(BNK)과 김정은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적이 쉽지 않다는 평가였다. 따라서 팀 전력에 절대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선수들의 이동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FA 명단이 발표되자 뜻밖의 소문이 등장했다. 김정은이 이번 FA 시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외부 FA 영입’과 관련해 많은 구단들이 “올해는 쉬어간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1순위는 김정은”이라고 말하는 구단들이 등장했다.

“네. 알아요. 아직 연락 받은 건 없는데, 그렇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1987년 9월 7일생. 온양여고를 졸업하고 2006 WKBL 신입선수 선발회를 통해 프로에 입단한 김정은은 18년 동안 19시즌을 소화했다.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라는 말을 언제부턴가 입버릇처럼 하는 그다. 그런 김정은에게 “WKBL 역대 최다득점 기록은 깨고 은퇴하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처음에는 기록 경신을 자신했지만, 2020-2021시즌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그는 이 목표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솔직히 이번 시즌 끝나고 은퇴도 진지하게 고민했거든. 그런데 FA가 되니까 그런 얘기들이 나오네요. 고민되죠. 이적이라니... 지금 이 나이를 먹고 도전을 한다는 거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도 들고,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정말 연락이 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려고요. 어쨌든 계속 선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예전에 얘기했던 득점 기록. 그건 내가 꼭 깨고 은퇴한다. 꼭이요!”
4월 초, 김정은은 이적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은에 대한 다른 팀들의 니즈는 확고했다. 보통 여자농구 FA 시장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구단이 어느 선수에게 관심을 갖고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지만, 막상 해당 구단은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협상 과정에 대해서도 당연히 비밀이 많다.
그런데 이번 김정은의 경우는 달랐다. 하나원큐와 신한은행이 일찍부터 김정은 영입을 공식화했다.
적극적이었다. 두 팀 모두 “김정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정은과의 통화에서 조언으로 했던 말은 “FA는 반드시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농구 선수들은 FA 이적과 관련해 무엇보다 ‘명분’을 많이 언급한다.
김정은에게는 ‘친정 하나원큐로의 복귀’라는 명분과 ‘절친 이경은과 신한은행에서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는 명분이 모두 존재했다. 그러나 이적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김정은은 과거 박혜진이 FA 자격을 획득했을 때, 먼저 자신의 연봉을 양보해서 잔류를 도왔고 지난해에는 김단비의 우리은행 이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후배들을 불러 놓고 막상 본인은 떠난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김정은이 잔류보다는 이적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고, 결국 그는 하나원큐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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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서 낭만을 찾는 것은 시간 낭비지만, 적어도 김정은의 선택은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 향수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우리은행은 리그 정상을 다투는 팀이며, 위성우 감독이 다져 놓은 시스템 농구가 정교하게 돌아가는 팀이다. 6년 전 우리은행으로 이적한 후 적지 않은 부침이 있었지만, 김정은은 빠르게 우리은행의 시스템에 적응했다.
지난 시즌 통합우승을 차지한 우리은행은 다음 시즌에도 강력한 우승후보다. 가장 강하고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한 우리은행이지만, 위성우 감독은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배려와 예우 역시 확실하다.
김정은이 선수생활 말년을 가장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곳도 당연히 우리은행이었다. 샐러리캡의 여유가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조건을 볼 때 가장 안정적인 선택은 잔류였다. 그러나 많은 고민 속에 김정은은 지금이 우리은행을 떠나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양)희종 오빠(KGC)의 은퇴 기사를 보고 정말 많이 공감했어요. ‘내가 뛰는 20분 보다, 후배들이 뛰는 20분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인데, 이전부터 나도 항상 생각하던 부분이었거든요. 은퇴를 고민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거였어요. 위(성우) 감독님은 내가 팀에 남는다면 분명 내가 뛸 시간과 자리를 만들어 주셨을 거고 내가 WKBL 최다득점 기록에 도전한다고 하면 그 기회도 주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 시간을 내가 뛰는 것 보다는 어린 선수들이 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은행을 떠나겠다는 결정이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였다. 우리은행 이적 첫 해 위성우 감독의 혹독한 조련에 바닥까지 주저앉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수 김정은을 거듭나게 했던 것이 바로 그 시기였다.
평생 플레이오프가 목표였던 김정은이 통합 우승을 하고 MVP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도 좋은 팀, 좋은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우리은행 역시 김정은의 영입은 ‘신의 한 수’였다. 통합 우승의 역사를 함께 썼던 센터 양지희의 은퇴, 그리고 초특급 외국인 선수였던 존쿠엘 존스가 떠난 자리에 김정은이 들어오면서 우리은행은 철옹성 같은 조직력과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은행 부임 후 위성우 감독은 코트 위에서 항상 3명의 구심점을 구성했다.
‘박혜진-임영희-양지희’를 시작으로 ‘박혜진-임영희-김정은’을 거쳐 ‘박혜진-박지현-김정은’까지 이어진 우리은행의 주축 라인에 작년에는 김단비가 합류했다. 연속 우승을 마치면 성적이 수직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여자농구에서 우리은행이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KB와 정상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근간에도 김정은이 있었다.
“많이 힘들었고 울기도 했지만, 위 감독님은 저한테 은인 같은 분이에요. 늘 감사해요. 감독님, 그리고 전주원 코치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었어요. 이적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도 감독님한테 너무 죄송했어요. 팀을 나올 때도 ‘가서 너무 무리하다가 다치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얼마 전 스승의 날에 전화를 드렸는데 아픈 데 없냐고 걱정해주셔서 울컥했어요.”
이제 ‘우리은행 김정은‘은 없다. 지난 시즌 단독 1위를 질주하는 중에도 위성우 감독의 머릿속에는 ‘박지수의 복귀’라는 변수만 존재했다. 박지수가 복귀하는 KB는 우리은행이 챔피언 자리를 지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힘과 관록으로 박지수를 제어하던 김정은이 없다는 점은 그런 면에서 우리은행에게 아쉬움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은행에 내가 없다는 게 티가 날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위 감독님은 어떻게든 김정은 역할을 하는 선수를 만들어 내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형태를 만드시겠죠. 제가 ‘팀을 떠난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제가 없어도 다른 선수들이 충분히 모든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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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원큐와 신한은행이 김정은을 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관록과 경험, 그리고 리더십이다. 김정은을 제외하면 모든 선수들이 20대인 하나원큐, 그리고 피지컬의 강점을 앞세워 투지로 밀어붙이는 신한은행 모두 코트에서 선수들을 이끌 수 있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정신적인 부분도 다잡으며 코트 안팎에서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베테랑이 절실했다.
김정은은 고민 끝에 하나원큐를 택했다.
김정은은 하나원큐의 전신인 신세계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WKBL 역대 최고의 신인’으로 평가받는 김정은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하위권으로 떨어진 신세계를 홀로 지켰던 소녀가장이었으며 에이스였다. 팀은 하위권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고군분투하며 팀을 이끌었다.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후 가비지 시즌을 치를 때면 “경기장으로 오는 길이 너무 힘들다”며 괴로움을 토로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팀에 헌신했다. 2006 겨울리그부터 2016-2017시즌까지 13시즌을 뛰며 정규리그 367경기에 출전했다. 평균 34분 20초를 뛰며 16.0점 5.0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15-2016시즌 이후, 하나원큐에는 변화가 생겼다. 본격적인 리빌딩을 시작했고, 강이슬이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염윤아, 백지은 등 대기만성의 성공신화도 등장했고, 기대주 김이슬과 신지현이 신인상을 수상했다.
반면 김정은은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조금씩 페이스가 떨어졌다. 2년 연속으로 정규리그 20경기를 소화하지 못했고, 평균 득점은 이전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잔부상이 많았던 김정은이 서른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빨리 에이징 커브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2016-2017시즌을 마치고 김정은은 FA 자격을 획득했다. 여러 조건과 상황을 떠나 재계약은 할 것으로 보였다. FA 제도 변경 전이었던 이 당시는 1-2차 자격 구분 없이 원소속구단이 연봉 상한선인 3억원을 제시하면 선수는 무조건 잔류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김정은의 원소속구단 협상 결렬은 누구도 예상치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당시 하나원큐 실무진은 김정은의 가치를 이전과 동일하게 보지 않았다. 팀의 무게 중심은 자연스럽게 젊은 유망주들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김정은은 더 이상 에이스의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고 봤다. 그는 더 이상 팀의 에이스도, 주장도 아니었다.
13시즌을 헌신했던 김정은에게는 상처가 컸던 협상이었다. 계약 조건을 떠나 협상 과정에서 실망감을 많이 느낀 김정은은 하나원큐와의 협상을 접었다. 하나원큐 역시 김정은을 강제로 묶어두기 위한 최고액을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하나원큐 관계자는 “무릎과 허리에 고질적인 부상이 있어서 예전처럼 활약하는 건 힘들다. 이제는 팀의 변화에 맞춰갈 필요가 있다. 부상 리스크가 있고 나이도 있기 때문에 FA 시장에 나가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여러모로 부담이 큰 상황인데 어느 구단이 데려가려 하겠나? 김정은도 이런 현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우리 팀에 헌신을 했던 선수인 만큼 3차 때 돌아와도 1차 때 제시했던 금액을 삭감하지 않고 계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소속구단과의 협상(1차)이 결렬된 선수가 타구단과의 협상(2차)에서 새 소속팀을 찾지 못하면 다시 원소속구단과 3차 협상을 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3차 협상에서는 1차 협상 당시 제시액에서 20%까지 삭감이 가능했다. 하나원큐는 ‘당연히’ 3차 협상으로 돌아올 김정은에게 삭감 없는 금액을 제시해서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배려를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하나원큐 제공
②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