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13일생. 불혹을 꽉 채운 WKBL의 맏언니.

대략의 조건은 은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한채진이기에 어색했다. 베테랑을 넘어 노장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지만, 코트 위에서의 모습은 여느 선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세월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그에게 “체력적으로 문제 없냐”는 질문은 사족이었다.

2022-2023시즌에도 그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적 발표가 갑작스럽다. 2003년 1월 이후 21년 동안 한국여자농구가 있는 곳에 항상 존재했던 그가 이제 다음 시즌부터는 없다.

농구와 헤어질 결심
선수가 코트에서 온전히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일반적으로 40분의 플레이타임 중 평균 30분 이상을 소화하면 많은 시간을 뛰는 선수로 분류한다.

이번 시즌 WKBL에서 평균 30분 이상을 뛴 선수는 총 14명이다. 마흔 살의 한채진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이번 시즌 29경기에 나서며 평균 26분 52초를 뛰었다. 전체 20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한채진의 평균 출전시간 30분 미만이 2008-2009시즌 이후 14년 만이라는 것이다. 한채진은 무려 13시즌 연속으로 평균 30분 이상을 뛰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돌아온 친정 신한은행에서 이번 시즌 이전까지 3시즌 동안 평균 35분 이상을 출전했다.

팀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던 선수들이 은퇴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이전만큼 뛸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는 기량에 영향을 주고, 더는 이전의 자신을 보여줄 수 없는 서글픔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한채진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시즌을 마칠 때마다 은퇴와 관련된 언급이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였기에 ‘선수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늘 따라다녔다. 하지만 잠깐의 이슈가 되었을 뿐, WKBL의 선수 계약 보도자료에는 항상 한채진의 이름이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코트로 돌아왔다.

빼곡한 일정의 달력에 주중을 지나면 파란색의 토요일과 빨간색의 일요일이 있듯, ‘혹시’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한 은퇴는 한채진에게 그 파란색이나 빨간색과 같았고, 그 시기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똑같은 까만색의 시즌이 반복됐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신체적으로는 솔직히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내가 어디 수술을 크게 하거나 아픈 건 아니라서 경기를 뛰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요. 계속 준비하면 내년에도 경기 당 20분은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신적으로 지친 것 같아요. 나 스스로가 비시즌을 치르고 또 하나의 시즌을... 그러니까 그냥 나 혼자 농구를 하면 되는 건 아니잖아요. 후배들을 끌고 가는 게 버거울 수 있겠구나, 끌고 가려는 힘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퇴 이유가 담백했다.

“시즌 전부터 그런 생각은 있었어요.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시즌을 치르면서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계속 지켜봤던 거 같아요. 어디를 다쳤거나, 경기를 못 뛰었으면 빨리 결정을 내렸을텐데, 그건 또 아니니까 ‘내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애들이 워낙 말도 잘 듣고 밝고 그러니까 같이 하면서 좋은 것도 많거든요. 그러다가도 이게 맞나 싶어서 생각을 또 해보면 아닌 것도 같고... 나한테 물음표를 계속 던졌어요.”

“솔직히 ‘이래서 은퇴를 해야만 한다’는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왜’냐고 물으니까 결정에 대한 이유를 말해야 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냥 흐름인 것 같아요. 마흔 살이잖아요. 지금까지 해온 선수 생활을 마치기에 충분한 이유죠. 이미 오래하기도 했고, 결혼도 하고요. 인생에 변곡점이 생긴 거잖아요. 사실 그동안은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었거든요. 이제 결혼을 하면 한 사람의 아내로서 해야 할 것도 있는 거고... 내가 선수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돼서 은퇴를 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대기록을 앞에 두고...
2003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프로에 입단한 한채진은 21년 간 24번의 시즌을 치렀다. 597경기를 뛰었고, 총 17240분 53초 동안 코트 위에 있었다. 각각 역대 WKBL 2위와 5위에 해당하는 역사다. 그리고 단 한 시즌만 더 뛰면 그는 이 부문에서 WKBL 역대 1위에 올라서게 된다.

특히 역대 최다 경기 출전은 불멸의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 부문 1위는 우리은행의 임영희 코치가 기록한 600경기다. 한채진이 앞으로 3경기만 더 뛰면 타이를 이룬다. 현재 WKBL 한 시즌은 30경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프로에 뛰어든 어린 선수가 20년 동안 단 한 경기도 빠짐없이 뛰어야 가능한 기록이다. 사실상 앞으로 600경기를 돌파할 수 있는 선수는 나오기가 힘들다.

선수 생활의 목표가 기록 달성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록은 선수가 이 리그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역사로 남을 수 있는 대기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한은행도 이를 아쉬워했다. 한채진을 잡고자 했던 신한은행은 이전처럼 비시즌 훈련을 치열하게 하지 않아도 되고, 다음 시즌에 최다 경기 기록만이라도 달성하고 은퇴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거절한 것은 한채진이었다.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기록을 누가 마다하겠어요. 그런 거 하나라도 남기면 좋죠. 하지만 그러려면 나도 똑같이 훈련하고 준비해서 시즌을 치러야죠. 1분, 1초를 뛰기 위해서 선수들이 얼마나 비시즌에 땀을 흘리는지 잘 아시잖아요? 똑같이 노력하지 않고, 기록을 위해 그 시간을 뺏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팬들도 코트에서 어릴 때와 변함없이 계속 뛰는 제 모습을 좋아해주신 거지, 의미 없이 경기 수를 채우는 건 원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딱 3~4경기면 되는데... 당연히 아쉽죠. 저라고 아쉽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만하겠다고 결정했으면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2022-2023시즌은 한채진 선수 경력의 마지막 페이지가 됐다. 우승과 함께 은퇴를 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결말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치 있고 남다른 마침표를 찍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의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린 지난 3월 13일 인천도원체육관. 초반부터 끌려간 신한은행은 결국 우리은행의 기세를 넘지 못했다.

최이샘의 3점슛이 꽂히며 55-70이 된 종료 20.9초 전. 신한은행 벤치에서는 한채진을 준비시켰다. 그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벤치에서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은행도 화답했다.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한채진이 공을 잡자 선수들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승부가 결정난 상황에서 한채진이 코트로 들어온 이유를 너무 잘 아는 위성우 감독도 그의 마지막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것이다.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던 김소니아는 우리은행 수비가 물러서자 바로 3점슛을 성공했다. 그러자 우리은행은 다시 볼을 한채진에게 내줬다. 박혜진이 턴오버 하나를 추가하며 한채진 바로 앞에 볼을 투입하며 슛 기회를 제공했다. 슛이 불발되자 리바운드를 잡은 김단비가 다시 한 번 한채진에게 패스했다. 연이어 상대 선수들이 한채진에게 볼을 투입했다. 끝내 한채진의 마지막 슛은 림을 가르지 못했다. 하지만 WKBL 플레이오프 역사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존중과 배려, 그리고 커리어를 마치는 선수에 대한 헌사였다.

“엄청 울었어요. 막 눈물이 났다니까. 카메라에서는 안 잡혀서 내가 우는지 몰랐겠지만, 벤치에서부터 울고 있었어요. 몸도 바들바들 떨렸어요. 그렇게 들어갔는데 위 감독님이 벤치에서 지시하시더라고요. 제 앞에 (노)현지가 있었던 거 같은데, ”떨어져“, ”그냥 둬“라고 하셨어요. (김)소니아가 그 상황을 이해 못해서 3점슛을 넣었는데 바로 (박)혜진이가 나한테 주고, 슛이 안 들어가니까 또 (김)단비가 잡아서 주고...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넣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눈물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요. 위성우 감독님, 전주원 코치님에게도 감사해요. 선수는 어렸을 때 배우는 게 중요해요. 프로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프로 초년생 때 코치였던 위 감독님이 잘 가르쳐주셔서라고 생각해요.”

“저는 운이 좋은 선수였어요. 상복도 많았고 기록상도 많이 받았어요. 3점슛도 받았고, 2점슛도 받았고, 스틸로도 받았어요. 기록 외에 모범상도 두 번이나 받았잖아요. 농담으로 리바운드 빼고는 다 받아본 것 같다고 해요. 선수로서 충분히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한채진은 프로 커리어 통산 3득점상 2회, 3점야투상 2회, 2점 야투상 1회, 자유투상 1회, 스틸상 2회, 우수수비선수상 1회, 모범상 2회, 그리고 특별상을 수상했다.

치열하게 버텨온 21년
신한은행의 전신인 현대 하이페리온으로 입단한 한채진은 2007-2008시즌까지 6년간 신한은행에서 활약했다. 122경기를 뛰었다. 하지만 한채진의 이름이 더 인상 깊게 남은 곳은 KDB생명(금호생명)이었다.

이적과 동시에 주전으로 올라선 한채진은 당시 ‘레알 신한은행’이라 불리던 친정팀을 가장 괴롭히던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경은, 김보미, 신정자, 조은주, 정미란, 곽주영 등과 팀을 이루어 맹렬하게 코트를 누볐다.

하지만 KDB생명의 역사는 해피엔딩이 되지는 못했다. 끝내 신한은행을 넘지는 못했다. ‘레알 신한은행’ 시대의 강력한 2인자로 급부상했던 KDB생명은 신한은행이 우리은행에게 패권을 넘겨준 시점부터, 신한은행보다 더 빠르게 무너졌다. 2012-13시즌 이후로는 플레이오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역사를 마감했다.

“욕심낸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빨리 배운 거 같아요. 제가 3점슛 상을 받을 때도 받겠다고 욕심 부려서 받았던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런 욕심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바라는 대로 다 된다면 저도 우승하고 은퇴해야죠. 그런 면에서 (김)보미(WKBL 경기운영부장)는 정말 최고의 은퇴를 했죠. 하지만 저도 좋은 은퇴를 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경기를 한 날이 마침 제 생일이었고, 우리 팀은 물론, 상대팀 감독님까지 그렇게 배려를 해주셨잖아요. 저처럼 은퇴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한채진의 농구 인생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전성기 시절, 소속팀은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다.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에, 팀을 따라다니는 구설도 많았다. 게다가 어느 시점부터 팀 운영의 의욕을 잃은 KDB생명은 프로팀을 운영할 자격을 상실한 불성실함으로 일관하다가 팀을 제대로 매각도 하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농구단을 정리했다. 연고지인 구리시 역시 무책임하기로는 KDB생명에 뒤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 당시는 잘 생각나지 않아요. 그냥 힘들기만 했던 것 같아요. 성적이 나지 않으면서 압박감은 정말 컸어요. 전반을 잘 해도 ‘이러다가 또 지는 거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상당했어요.”

팀이 인수도 되지 못하고 연맹 위탁 운영이 결정되면서 전에 없던 긴축이 시작됐다. 팀을 함께 이끌던 이경은이 팀을 떠났다. 일부에서는 힘든 동료들을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FA 계약을 이끌던 당시 WKBL은 팀 운영비를 확보하기 위해 몸값 높은 선수들을 최대한 매각하려고 했다. 이경은은 자신이 팀을 떠나야 팀이 운영될 수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최악의 시기는 다행히 길지 않았다. 1년 만에 BNK가 팀을 인수했다. 하지만 한채진은 이 과정에 팀을 떠나게 됐다.

“어려운 시기를 넘게 됐으니 정말 기뻤죠. 그런데 첫날 미팅에서 저랑은 함께 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계속 선수생활을 할 생각이면 다른 팀을 알아봐 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고민을 했죠. 은퇴를 할 지, 그래도 이렇게 끝내지는 말아야 할지... 다행히 저를 원하는 팀들이 있었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잡게 된 거죠.”

신한은행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4시즌을 더 보냈다.

“조건만 봤으면 신한은행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일단 (이)경은이랑 (김)단비가 있었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구랑 같이 뛰느냐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경은이, 단비, (김)수연이, (곽)주영이랑 같이 뛸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어떻게 돌아가는 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 지, 정말 눈만 맞으면 말 안 해도 알았으니까요. 단비랑 뛰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만약 지금 우리 팀에 단비가 있다면 제가 현역 연장을 한 번 더 생각해봤을 거예요. 그리고 신한은행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었고요. 제가 프로 생활을 시작한 곳이잖아요.”

처음과 끝이 모두 신한은행이었던 한채진은 코트위의 모습 자체도 처음과 끝이 변함없었다. 마지막 시즌에도 신인 시절과 다름없이 달렸다. 부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잔부상 속에서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당연히 좋은 몸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죠. 그런데 저도 정말 열심히 관리했어요. 제가 사실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에요. 살찌는 음식도 정말 좋아해요. 단 것도 좋아하고, 군것질 좋아하고, 탄수화물, 빵, 떡 정말 좋아해요. 살찌는 건 다 좋아하거든요. 파스타 좋아하고, 케이크는 무조건 먹어야 되고. 비시즌에 3~5kg는 무조건 쪄요. 그래서 체중은 매일 쟀어요. 휴가 마치고 훈련에 복귀하면 체중을 조절해서 경기를 뛰도록 늘 만들었던 거죠. 힘들었어요. 저 시즌 끝나고 조금 쉬었더니 바로 살 쪘잖아요. 관리해야 해요. 결혼식도 걱정이고, 다음 시즌 은퇴식 때 너무 쪄서 팬들이 놀라면 어떡해요?”

내겐 없을 것 같았던 결혼
한채진은 지난 7일, 5살 연하의 일반인 남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어쩌면 그가 은퇴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처음에 한채진의 팬이었던 신랑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힘든 운동을 계속하는 그에게 은퇴를 권유했던 이 중 하나다. 한채진 역시 “남자친구와 결혼이 아니었다면 선수 생활을 계속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작년에도 은퇴했으면 한다는 말을 했었어요. 지금도 물어봤거든요. 아직 은퇴에 사인한 거 아니니까요. 내 통장에 돈이 안 들어오면 왠지 현타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다시 선수를 하는 건 어떻겠냐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니까 말해보라고 했는데, '용돈 줄 테니까 그만하라'고 하더라고요.”

“전 원래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딱히 남자친구도 없고 혼자 사는 게 편했어요. 부족한 것도 없었고요. 막상 남자친구가 생기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이)경은이는 ‘그래, 언니도 할 때가 됐지’라고 별 반응이 없더라고요. 선수들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는데, 오히려 다른 지인들이 많이 놀랐던 거 같아요. 저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난 거냐고 하더라고요. ‘그 남자 무슨 죄냐, 상 줘야 한다’는 말도 하고요.”

선수가 아닌 한채진
은퇴를 결정한 그에게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이름 뒤에 ‘선수’라는 수식어가 빠졌다. 어찌 보면 실업자다. 농구와 관련된 일을 계속 할지, 아니면 다른 제2의 인생을 살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바쁘다. 시즌을 마침과 동시에 결혼 준비를 해야 했고, 축농증 때문에 수술도 했다. 결혼을 하면 발리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동생이 있는 호주에도 다녀올 생각이다. 당장은 일정이 빡빡하다. 그런 가운데 장기적으로는 '선수'의 이름을 내려놓은 새로운 인생에 대해 비어있는 공간을 채울 준비를 해야 한다.

“일단 지금은 아쉽기보다는 좋아요. 마음도 편하고요.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쭉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요. 처음으로 쉬는 것 같아요. 조금 지나면 무얼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은 분명 생기겠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지금 잠깐 쉬어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이어 온 만큼 마치는 시점에 떠오르는 고마운 이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틋한 이름은 역시 이경은이다.

“경은이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제가 정말 많이 의지했어요. 제가 승부욕도 있어서 우리끼리 훈련할 때도 동생들한테 지기 싫어서 성질 낼 때도 있었는데 그걸 다독이는 것도 경은이었어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저 은퇴할 때, 경은이가 그렇게 울지 몰랐어요. 이제 제가 없으면 애들 이끌고 부담이 더 커질 거라 은퇴하면서도 경은이한테 미안해요. 경은이랑 14~15년을 같이 했는데, 혼자 남겨놓고 나오는 거 같아서... 이겨내고 잘 하겠지만, 힘들거나 좋은 일 있을 때 옆에서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는 게 미안해요. 경은이도 결혼해야 하는데... 아마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이경은은 자신의 결혼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한채진의 생각에 대해 “마흔살에 시집가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냐! 난 40살 전에 생각보다 빨리 갈 수도 있다“며 발끈했다.)

함께했던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말한 한채진은 문득 황미우의 이름도 꺼냈다. 재일교포 동포 선수인 황미우는 삼성생명에 입단했지만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하고 신한은행으로 트레이드 됐고, 2020-21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는 신한은행의 전력분석원으로 활약 중이다.

“농구는 물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내가 질문을 던지면 여러 가지 생각이나 다른 방법들을 얘기해 준 친구에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조언을 해줘서 얘기를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황미우 말고 한미우 하라'고 할 정도로 많이 챙겼는데, 정말 그리울 거 같아요. 감독님과 코치님은 따로 말씀 안 드릴게요. 제가 말 안 해도 감사드리는 거 잘 아실 거예요. 마지막까지 너무 잘 챙겨준 구단에도 정말 고맙고요.”

길었던 프로에서의 생활. 그는 가장 좋았던 기억 하나를 특별히 끄집어내지 못했다. 모든 기억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간직하며,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과정이 다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들이 있어서 지금의 한채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농구 인생에서는 특별히 아쉬울 것 없이 은퇴를 잘 했다는 거에 감사해요. 팬들에게는 늘 고맙고요. 정말 은퇴 결정의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게 한 건 팬들이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팬들이 많아진 것도 신기했고,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아서 너무 고마웠어요. 이런 분들에게 내가 뭘 해드려야 하는 지 고민을 할 정도로 너무 감사했죠. 제가 힘들거나 못할 때도 똑같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시는 팬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응원해주신 분들 중에는 언니-동생이나 친구처럼 지내는 분들도 있는데, 그분들하고는 계속 연락하며 살 것 같아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본 기사는 루키 5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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