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시즌 KBL이 가져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아시아쿼터 제도의 확대다.
당초 일본까지였던 아시아쿼터의 범위를 필리핀까지 넓혔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던 이 변화는 시즌 초반 KBL에 상당한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가드 포지션에서는 개인기가 좋은 필리핀 선수들의 가세가 신선한 충격을 줬다.
기존의 아시아쿼터 선수였던 나카무라 타이치(전 DB)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일본으로 돌아간 가운데, 이번 시즌 유일한 일본인 아시아쿼터인 모리구치 히사시(캐롯)가 아직 리그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아시아쿼터의 무게감이 필리핀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다. 필리핀 선수들 중에서도 확실히 가드들이 돋보이는 초반이다.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12월호에 게재됐으며, 온라인 게재일에 맞춰 수정 및 보완됐습니다.
개막 전 펼쳐진 KBL 컵대회부터 상당한 관심을 모았던 론제이 아바리엔토스(현대모비스)가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개막 주간부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바리엔토스가 부상 등으로 주춤하는 사이, 조금 더 묵직한 모습을 보인 이선 알바노(DB)의 활약이 돋보였다. 아바리엔토스나 알바노만큼 눈길을 끌지는 못하고 있지만 KBL 1호 필리핀 선수로 주목을 받은 샘조세프 벨란겔(한국가스공사)도 꾸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상으로 출발이 늦었던 렌즈 아반도(KGC) 역시 시동을 걸었다.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는 KGC의 새로운 동력으로 거듭나고 있는 아반도는 놀라운 탄력과 운동 능력으로 자신이 왜 KBL의 여러 팀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아시아쿼터 선수 중 최고 몸값을 기록했는지를 증명해 가는 중이다.

필리핀 가드와 공존하는 법
‘개인 기술은 뛰어나지만 수비와 팀 농구에 약하다. 팀을 살리는 플레이보다는 혼자서 하는 농구에 익숙하기 때문에 확실한 양날의 검이 될 것이다.’
필리핀 가드들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꾸준히 제기됐던 평가는 이기적인 플레이에 대한 경고였다. 신중해야 할 상황에서도 개인플레이를 무리하게 시도하고 터프샷을 난사해 팀 분위기와 경기 흐름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들의 소속팀에서는 ‘이타적인 선수’라는 평이 이어진다. 필리핀 선수들 중에서도 첨단에 나선 아바리엔토스와 알바노는 평균 5개 정도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 부문 5위권에 올라있다. 어시스트가 이타적인 선수임을 증명하는 절대적 지표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 홀로 농구’를 펼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어느 정도 씻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바리엔토스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모비스의 조동현 감독은 “일부러 그런 식으로 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플레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무리한 슛을 던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지금까지 배운 적이 없었다. 개인 능력이 강조되는 농구를 하다 보니 지금까지는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전히 무리한 슛을 던질 때가 있지만, 그건 지금까지 본인이 해 온 농구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습관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슛을 던졌지만, 지금은 그런 슛을 던진 후에 본인 스스로도 ‘아차’하는 모습이 나온다. 벤치에 먼저 미안하다고도 한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다음 시즌에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알바노를 보유하고 있는 DB의 이상범 감독 또한 좋은 평가를 내렸다.
이상범 감독은 알바노에 대해 “경기 운영을 하면서 2점슛과 3점슛의 밸런스를 조절하고, 박자를 맞춰서 해줄 수 있는 우리 팀 유일의 플레이메이커 형 선수”라고 말한다. 1라운드에 연승을 달릴 때에는 “알바노와 두경민이 함께 뛰면서 나타나는 시너지가 우리 팀의 강점이다. 능력 있는 두 선수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의 장점을 살릴 줄 아는 농구를 하고 있다”며 흡족한 마음을 나타냈다.
함께 뛰는 선수들도 만족도가 높다. 현대모비스의 이우석은 아바리엔토스에 대해 “신기하다. 슛을 던질 때는 ‘이게 들어가나?’하는 생각이 들고 패스를 할 때는 ‘이게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농구를 했으니까 가능한 것 같다. ‘타고난 거겠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같이 생활해 보면 연습도 많이 하는 선수”라고 말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자기 공격을 먼저 보는 선수인 것은 맞다. 그런데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면서 그런 농구를 한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함께 하면서 많이 적응이 됐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다는 말도 해준다. 워낙 속이는 동작이 많아서, 처음에는 팀원들도 속았다. 지금은 같이 뛰다보니 파악도 되고, 나한테 패스가 오겠다는 느낌도 있다”고 덧붙였다.
알바노와 함께 뛰고 있는 두경민(DB)은 “팀 입장에서 도움 되는 부분이 많고, 개인적으로도 스타일이 달라 배울 점도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필리핀 선수와의 경쟁을 위해서는 국내의 어린 가드들이 무작정 따라 하기보다는 기본기를 충실히 쌓으며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필리핀 가드와의 대결
필리핀 가드들이 화려한 플레이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처럼, 상대 선수로 경기를 함께 뛰는 국내 가드들도 그들의 플레이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경쟁력을 갖춘 필리핀 선수들의 등장으로 어린 선수들에게 성장의 기회가 제한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리그 정상급 가드들은 오히려 이들의 등장을 반겼다.
“기대된다. 이번에 오는 필리핀 선수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필리핀 가드들의 등장에 기대를 나타냈던 지난 시즌 챔프전 MVP 김선형은 한 라운드를 치른 후, “기대 이상이다. 정말 잘하더라. 오히려 내 몸 상태가 아직 다 올라오지 않아, 맞대결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예전 단신 용병들이 뛰던 시절 느낌도 나고, 조 잭슨과의 대결도 기억난다. 팬들도 필리핀 선수들의 활약에 보는 재미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우리 팀 전력이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이 됐을 때 제대로 다시 붙어보고 싶다. 팀이 이기는 게 우선이고, 팀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매치업 상 나도 그 선수들을 막지 않고 그들도 나를 막지 않기 때문에 NBA와 같은 1대1 쇼다운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만들어지면 나도 화려한 플레이를 좋아하고, 팬들에게도 볼거리가 되기 때문에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 필리핀 가드들의 활약으로 승부욕도 더 생기고, 여러모로 재미있고 좋은 것 같다”고 여전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김시래(삼성)는 필리핀 가드들의 활약에 긴장보다 더 강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다. 김시래는 “공격력도 있고, 패스를 빼 줄 때 가끔 놀라기도 했다. 이들 때문에 힘들고 긴장해야 한다기보다는 선수로서 재미있다는 느낌이다. 필리핀 선수들이 분명 좋은 기량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도 해 온 게 있다. 국내 기존 가드들도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KBL 가드계의 신성인 이정현(캐롯)은 “확실히 기량이 좋다. 만나보지 못한 스타일이다. 알바노와 대결에서 끝까지 집중했는데 그 선수의 터프샷을 못 막았고, 경기 중에 놓치기도 했다. 엇박자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많이 된다. 공격 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가 되고 싶은데, 필리핀 선수들과의 대결을 통해 내가 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전했다.

아시아쿼터 확대의 이유
KBL이 아시아쿼터의 범위를 필리핀까지 넓힌 이유는 단순히 구단 선수 수급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농구 시장의 확대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동아시아 슈퍼리그가 출범하면서 아시아 전체에 KBL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축구의 경우, 유렵의 챔피언스리그처럼 아시아도 AFC 챔피언스리그(ACL)가 열리고 있다. 이를 통해 아시아 전역으로 시장의 범위가 확대되고, 선수들의 해외리그 출전과 같은 교류가 더 많아졌다. 인구가 많은 중국이나 동남아에 모기업이 홍보가 되면서 ACL을 목표로 하는 구단들의 관심과 투자도 높아지고 있다.
이번에 1부 리그로 승격된 대전 하나 시티즌의 모기업인 하나은행이 상당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동남아 시장 공략을 위한 목적을 바탕으로 한다. KBL 역시 향후 흐름에 따라 이러한 시장의 확대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KBL은 아시아쿼터 제도로 인해 우리 선수들을 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KBL에서 활약하는 아시아쿼터 선수들로 인해 KBL의 팬 층이 해외까지 확대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필리핀은 농구의 인기가 엄청난 나라다. 지난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필리핀 대표팀의 경기가 열렸던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은 필리핀 관중들의 엄청난 함성으로 가득 찼었다.
아직까지 이러한 효과가 비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특히 시즌 초반에는 필리핀 선수들의 활약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필리핀 관중의 수가 증가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다만 유튜브에 유입되는 해외 팬들의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KBL이 유튜브 KBL TV의 영문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부분이다.
구단 관계자 A는 “이제 시작인 제도다. 이번 시즌에 필리핀 선수를 포함해서 7명의 아시아쿼터 선수들이 KBL에 들어왔다. 이들의 연봉을 기준으로 하면 KBL 전체에서 14억 정도를 투자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정도 투자를 통해 1년에 비약적인 수치적 변화를 이 시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긍정적인 지표도 있다. 아반도(KGC)를 보기 위해 안양체육관에 단체 응원을 하는 필리핀 관중들의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필리핀 출신 노동자들이 수도권에 직장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KGC는 필리핀 관중들을 유치하는 것과 관련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가 된다.
또한, 국내에 들어온 필리핀 선수들이 자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드와이트 라모스 정도의 선수들이 아니기에, 당장의 효과보다는 이들의 성장과 발전을 통한 장기적인 효과를 도모해야 한다는 충고도 존재한다.

국내 선수의 설 자리
KBL은 이외에도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필리핀 선수들의 활약이 리그와 팬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으며, 국내 선수들에게도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도 시행 초기인 현재, 필리핀 선수들에 대한 관심은 꾸준하다. 현재 아시아쿼터 제도를 활용하지 않는 구단은 SK와 KT, KCC 뿐이다. 전희철 SK 감독은 “필리핀 가드들이 확실히 강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 팀에는 김선형, 오재현 등 좋은 선수들이 있다.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시즌 전, 밝혔다.
서동철 KT 감독은 “필리핀 선수에 관심이 있었지만 영입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기회가 되면 영입할 의사가 있다. 장단점이 모두 존재하지만, 아시아쿼터의 확대는 긍정적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전창진 KCC 감독도 “비시즌에 허웅-이승현을 영입하는 데에 집중했고, 샐러리캡과 사치세도 신경을 써야했다. 능력 있는 필리핀 선수 영입에는 당연히 관심이 있다. 팀의 약점을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단점도 지적되는 부분이 있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면, 장단점 중 어떤 것이 리그에 더 필요한 것인가를 판단해서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기성 해설위원은 “필리핀 선수로 인해 국내 가드들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결국 외국 선수들 때문에 국내 빅맨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과 같은 해석”이라며, “차라리 외국 선수를 2명 보유에서 1명으로 줄이고 아시아쿼터를 활용하는 것이 팬들에게는 더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KBL은 외국 선수 제도와 아시아쿼터 제도를 어떻게 병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를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구단 관계자 A는 “우리보다 필리핀 선수들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경우 올해 필리핀 선수를 8명만 쓰고 있다. 1~2부 36개 팀 중 8개 팀만 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아시아쿼터를 활용하면서 나름대로 필터링이 되고 기준이 생겼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이제 1년째다. 차근차근 제도를 활용하다보면 우리도 일본처럼 기준이 생길 것이고, 리그 근간인 선수들의 자리가 흔들리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올해도 성공사례와 실패사례가 나뉘고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사진 = KBL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