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고의 빅맨을 논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전설 빌 러셀이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러셀은 센터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에서도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 중 하나였다.
현대 농구에서는 센터들의 역할이 상당히 많이 축소됐다. 여전히 조엘 엠비드, 니콜라 요키치 등 뛰어난 센터들이 존재하지만 이제는 가드나 포워드들의 역량이 훨씬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각 팀에서 센터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났다. 그렇다면 ‘센터들의 시대’를 지배했던 정상급 센터로는 어떤 선수들이 있었을까.

(1) 카림 압둘-자바
주요 경력 : 올스타 19회, 득점왕 2회, 블록슛왕 4회, 챔피언 6회, ALL-NBA 팀 15회, ALL-디펜시브 팀 11회, MVP 6회, NBA 역대 최다 누적 득점(38,387점)
데뷔 : 1969-70시즌 / 은퇴 : 1988-89시즌
통산 기록 : 1560경기 출전, 24.6점 11.2리바운드 3.6어시스트 2.6블록슛
카림 압둘-자바는 역대 최고의 센터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선수다. 데뷔 후 20년 동안 단 1시즌(1977-78시즌)을 빼면 올스타 무대를 놓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리그를 지배한 슈퍼스타였으며, 우승반지도 6개나 보유하고 있는 리그의 지배자였다.
무엇보다 압둘-자바는 역대 통산 득점 1위(38,387)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레전드다. 현재는 르브론 제임스가 그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르브론은 현재까지 누적 37,062점을 기록하며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과연 그가 압둘-자바를 넘어설 수 있을지가 남은 커리어의 최대 과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UCLA 출신의 압둘-자바는 대학 때부터 이미 정상급 기량을 뽐낸 선수였다. 1학년 입단 직후 상급생들과의 연습경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이미 그의 적수는 없었다.
당시 압둘-자바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 NCAA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덩크를 금지하는 룰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압둘-자바는 이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스카이-훅’이라는 역대 최고의 공격 무기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긴 팔을 이용한 엄청난 타점에서 꽂는 압둘-자바의 스카이-훅은 알고도 막지 못하는 무기였다. 이 슛을 블록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 당연히 난이도 역시 상당한 슛이었지만 압둘-자바는 엄청난 손 끝 감각을 바탕으로 이를 완벽히 활용했다.
NBA 무대에서도 압둘-자바의 기량은 압도적이었다. 데뷔 시즌부터 평균 28.8점 14.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그를 폭격한 그는 루키 자격으로 올스타 무대에 초청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레이커스 시절의 압둘-자바를 떠올리지만 그는 데뷔 후 첫 6시즌 동안 밀워키에서 뛰었는데, 1970-71시즌에는 창단한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은 밀워키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다.
밀워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한 압둘-자바는 레이커스로 이적해 14년을 더 뛰며 전설이 됐다. 레이커스에서도 5개의 우승반지를 추가한 그는 총 6개의 우승반지를 획득하며 1988-89시즌을 끝으로 현역 커리어를 마감했다.

(2) 윌트 체임벌린
주요 경력 : 올스타 13회, 득점왕 7회, 리바운드왕 11회, 챔피언 2회, ALL-NBA 팀 10회, MVP 4회, NBA 역대 최다 누적 리바운드(23,924개)
데뷔 : 1959-60시즌 / 은퇴 : 1973-74시즌
통산 기록 : 30.1점 22.9리바운드 4.4어시스트
NBA는 이른바 ‘고대괴수’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윌트 체임벌린은 이들 고대괴수들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압도적인 사이즈와 신체능력을 활용한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었다. 데뷔전에서부터 43점 28리바운드를 퍼부으며 놀라운 활약을 했던 체임벌린은 루키 시즌 평균 37.6점 27.0리바운드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내며 지배자의 탄생을 알렸다.
1961-62시즌에는 평균 50.4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낸 체임벌린이다. 전설적인 100득점 경기(1962년 3월 2일 뉴욕을 상대로 기록했다)도 이 시즌 나왔다.
여기에 체력 역시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다. 체임벌린의 커리어 평균 출전 시간은 무려 45.8분. NBA의 정규 경기가 48분임을 감안하면 거의 쉬는 시간이 없었다는 의미다. 또한 그는 평균 50.4점을 올린 1961-62시즌에는 평균 48.5분을 뛰기도 했다. 해당 시즌 체임벌린은 연장전을 포함해서 한 시즌 동안 단 7분만을 쉬었으며, 51경기 연속 풀타임을 출전하기도 했다.
단일 시즌 평균 득점 역대 1위는 물론이고 단일 시즌 평균 리바운드 역대 1위(27.2개) 기록 역시 체임벌린이 보유하고 있다. 단일 시즌 평균 출전 시간 기록 역시 말할 것 없이 체임벌린이 1위다. 또한 체임벌린은 통산 23,924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는데, 이는 역대 1위에 해당한다.
이처럼 괴물 같은 스탯을 보유한 체임벌린이지만 통산 우승 횟수는 2회로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그의 평가를 다소 깎아 먹는 요소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체임벌린은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1.1%에 그칠 정도로 자유투에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유형의 선수다.

(3) 빌 러셀
주요 경력 : 올스타 12회, 리바운드왕 4회, 챔피언 11회, ALL-NBA 팀 11회, MVP 5회, NBA 역대 누적 리바운드 2위(21,620개)
데뷔 : 1956-57시즌 / 은퇴 : 1968-69시즌
통산 기록 : 15.1점 22.5리바운드 4.3어시스트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는 보스턴이 배출한 수많은 레전드들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인물. 바로 빌 러셀이다.
통산 11회에 달하는 우승 횟수가 이 선수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증명해주는 수치다. 데뷔 시즌부터 팀을 정상에 올려둔 러셀은 NBA에서 13시즌을 뛰는 동안 단 2차례를 빼면 모두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이를 두고 혹자들은 뛰어났던 동료들의 덕을 봤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러셀이라는 중심축이 없었다면 이는 절대 불가능했을 업적이다.
앞서 언급한 체임벌린에 비해 공격력에서는 다소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 러셀이다. 매년 꾸준히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긴 했지만 평균 20점을 넘어선 시즌이 단 1시즌도 없었다. 통산 평균 득점 역시 15.1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러셀은 엄청난 수비와 리바운드 능력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다. 아직까지도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논할 때 러셀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비능력을 바탕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선수가 바로 러셀이다.
또한 러셀은 당시에만 하더라도 만연하던 인종차별에도 정면으로 맞섰던 선수다. 오늘날의 NBA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러셀은 지난 8월 초, 88세의 나이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NBA는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6번을 전체 구단에서 영구결번하며 그를 예우했다.

(4) 사킬 오닐
주요 경력 : 올스타 15회, 득점왕 2회, 챔피언 4회, ALL-NBA 팀 14회, ALL-디펜시브팀 3회, 파이널 MVP 3회, MVP 1회
데뷔 : 1993-94시즌 / 은퇴 : 2010-11시즌
통산 기록 : 23.7점 10.9리바운드 2.3블록슛
앞서 소개한 고대 괴수들과는 달리 샤킬 오닐은 비교적 최근인 2010-11시즌까지도 현역으로 뛰었던 선수다. 화려한 입담을 활용해 은퇴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어 국내 NBA 팬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선수라고 볼 수 있다.
199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을 받은 오닐의 데뷔는 올랜도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는 첫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며 평균 23.4점 13.9리바운드의 기록을 올린다. 신인왕은 물론이었으며, 올스타전에서도 주전으로 선발되며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고한 오닐이다.
이후에도 오닐의 성장세는 거침이 없었다. 데뷔 3시즌 만인 1994-95시즌에는 평균 29.3점을 올리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영건 듀오를 형성한 오닐은 신생팀이던 올랜도를 강팀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후 레이커스로 이적한 오닐은 본격적인 반지 수집에 나섰다. 체중을 더욱 불린 오닐의 파워는 2명, 3명의 수비수가 달려들어도 제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리그를 지배한 오닐은 1999-00시즌부터 2001-02시즌까지 3년 연속 우승컵을 손에 넣으며 역사적인 쓰리-핏 달성에 앞장섰다. 참고로 오닐은 당시 3번의 시리즈에서 모두 파이널 MVP를 손에 넣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다만 코트 위에서의 파괴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코트 밖에서 코비와 사사건건 부딪혔던 오닐이다. 결국 오닐은 파워게임에 밀리며 마이애미로 이적해,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한 번의 우승을 더 합작하게 된다.
오닐의 최대 강점은 역시 엄청난 파워를 활용한 포스트 공략이었다. 이는 다른 팀들이 알고도 제어하지 못하는 무기였다. 엄청난 유연성과 더불어 BQ 역시 역대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전성기의 오닐은 다른 팀들에게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오닐의 유일한 단점은 자유투였다. 통산 성공률이 52.5%에 불과한 오닐의 자유투는 다른 팀들에게 유일한 공략 대상이 됐다. 일단 골밑으로 공이 들어가면 자동으로 2점이 적립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팀들은 오닐에게 고의로 반칙을 해 자유투를 주는 작전을 구사했고 이는 ‘핵-어-샤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수생활 말년에는 여러 팀들을 돌아다니는 저니맨 신세가 되기도 했던 오닐이다. 각종 부상으로 인해 오닐은 더 이상 거대한 신체를 감당해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말년에는 위력이 상당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피닉스와 클리블랜드, 보스턴 등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던 오닐은 2010-11시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5) 하킴 올라주원
주요 경력 : 올스타 12회, 리바운드왕 2회, 블록슛왕 3회, 챔피언 2회, ALL-NBA 팀 12회, ALL-디펜시브팀 9회, 파이널 MVP 2회, MVP 1회
데뷔 : 1984-85시즌 / 은퇴 : 2001-02시즌
통산 기록 : 21.8점 11.1리바운드 3.1블록슛
하킴 올라주원은 1990년대를 지배했던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선수다. 역대 최초로 단일 시즌 MVP와 파이널 MVP, 올해의 수비수 상을 휩쓴 선수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올라주원 역시 루키 시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1984-85시즌 데뷔한 올라주원은 82경기 모두에 선발로 나서 평균 20.6점 11.9리바운드 2.7블록슛이라는 훌륭한 기록을 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신인왕은 올라주원의 몫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올라주원 대신 신인왕을 차지한 사나이의 이름을 언급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이클 조던. 여타 다른 시즌이었으면 신인왕을 차지하고도 남을 성적을 기록했던 올라주원이지만 하필이면 조던과 같은 시즌에 데뷔한 덕분에 신인왕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비록 신인왕은 놓쳤지만 올라주원은 무서운 기세로 성장을 거듭하며 리그 정상급 센터로 거듭났다. 그러나 올라주원에게 우승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팀의 전력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았던 탓에 올라주원은 뛰어난 개인기록을 내고도 항상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런 올라주원이 첫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것은 31세가 된 1993-94시즌이 되어서였다. 힘겹게 첫 우승을 달성한 올라주원은 이듬해에도 우승에 성공하며 리핏을 달성했고, 2년 연속 파이널 MVP 트로피를 가져갔다.
그러나 이후 더 이상 올라주원에게 우승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휴스턴의 원클럽맨으로도 남을 수 있었던 그는 39세가 된 2001-02시즌 토론토로 이적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량을 보이지 못하며 은퇴를 택했다.
올라주원은 공수 밸런스가 가장 완벽했던 빅맨으로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는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축구를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풋워크가 상당히 뛰어났다. 그 유명한 ‘드림 쉐이크’는 전매특허 기술. 거기다 수비력 역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던 올라주원이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