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서이, 어떤 거 같아요?”

지난 4월 말, 리그를 대표하는 두 슈터, 강이슬(하나원큐→KB)과 강아정(KB→BNK)이 FA자격으로 팀을 옮긴 후, 보상 선수 지명과 관련해 관심이 집중되던 때. KB의 한 관계자가 엄서이를 언급했다. 강아정의 보상 선수로 엄서이를 의중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상 선수 선택은 다소 복잡한 상황이었다.

강이슬을 내준 하나원큐가 KB의 어떤 선수를 지명하느냐에 따라, KB의 샐러리캡 운영이 복잡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정을 내준 KB역시 BNK로부터 주전, 혹은 준주전급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 박지수에 강이슬까지 영입하며 샐러리캡 소진률이 높았던 탓에 몸값이 높은 선수를 데려오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BNK가 보호 선수로 누구를 묶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과 함께, 보상 선수로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언급되던 상황에서, KB는 문득 엄서이의 이름을 꺼냈다.

엄서이는 2019~2020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 1라운드(전체 3순위)에 지명됐다. 자신을 지명한 당시 BNK 감독이었던 유영주 감독과 비교되며, ‘리틀 유영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부상으로 입단 후 두 시즌 동안 1군 데뷔를 하지 못했다.

BNK의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2020년 박신자컵에서의 4경기. 평균 6분 13초를 뛰며 2점슛 1개와 자유투 5개로 평균 1.8점을 득점한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3X3 트리플잼 정도였다.

‘샐러리캡에 대한 고민이 아니면 엄서이보다, 즉시 전력감인 선수를 데려올 수도 있지 않냐’는 질문에 KB 관계자는 “감독님과 상의해서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4월 27일 저녁.

하나원큐는 KB로부터 보상 선수를 받지 않고, 강이슬의 2021~22시즌 연봉(3억 원)의 300%인 보상금 9억 원을 택했다. KB로서는 보상 선수 출혈은 없었지만 샐러리캡의 부담이 우려되는 상황. 같은 시간, KB가 적어낸 보상 선수의 이름은 엄서이였다.

후보군에 언급되던 다른 선수들 보다 연봉 부담이 적은 엄서이였기에, KB는 하나원큐가 선수 대신 보상금을 선택할 것을 예상하고, 샐러리캡의 고민을 해소하는 완벽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선택 후, 김완수 KB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1순위로 생각한 게 엄서이였는데요?”

그렇다면 BNK의 입장은 어땠을까?

BNK는 보상 선수로, 그 어떤 선수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 엄서이가 보상 선수로 떠나게 된 후, BNK 관계자는 “KB도 하나원큐처럼 보상금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BNK는 KB가 엄서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노심초사했다. 엄서이를 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준주전급으로 여론의 예측에 포함됐던 선수들도 아쉽지만, 엄서이를 뺏기는 것은 더 피하고 싶었다.

연막작전도 썼다.

엄서이의 부상 회복이 더뎌서 이번 시즌도 꾸준히 재활이 필요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얄밉게도 KB는 엄서이를 선택했다.

KB 관계자는 “부상 중이면 데려와서 재활하고 내년부터 뛰어도 된다. 엄서이에 대해 조급하지 않다”고 말했다.

엄서이는 빠르게 회복했고, 적응했다. KB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 나선 대회인 지난 2021 박신자컵에서 맹활약하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돌적인 플레이로 거침없이 득점을 올렸고(평균 16.6점), 인사이드를 책임지기에는 다소 작은 176cm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평균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챘다. KB의 박신자컵 우승 주역 중 한 명이 됐다.

겁 없이 돌진하는 엄서이에게는 ‘엄장군’, ‘엄탱크’라는 웅장한 별명이 붙었다.

당시 통영체육관 관중석에서 KB의 경기를 지켜보던 박정은 BNK 감독은 “엄서이는 저렇게 잘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이번 시즌부터 1군 무대에서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기대를 많이 한 선수였는데 많이 아쉽다. 사실 KB가 엄서이를 염두에 둘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경기를 거의 뛰지 않아 엄서이에 대해 확인할 정보나 방법이 없었을텐데, 우승을 노리는 팀이라 그런지 독사같이 예리하게 선수를 챙겨본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엄서이에 대한 KB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개막전부터 교체로 출전하며 코트를 밟은 엄서이는 1군 무대 4번째 경기였던 지난 6일, 친정 BNK와의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프로 첫 득점을 올렸다. 16분 9초를 뛰며 2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5일 만에 출전한 삼성생명과의 2라운드 첫 경기에서 엄서이는 자신을 선택한 김완수 감독과 KB 관계자들을 한껏 웃게 만들었다.

21분 51초를 뛰며, 14점 5리바운드. 쿼터 종료로 인해 던진 버저비터 3점슛 1개를 제외한 2점슛 야투 6개와 자유투 2개를 모두 성공했다. 이날 엄서이의 활약은 KB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경기에서 KB는 1쿼터 강이슬, 2쿼터 박지수가 득점을 주도했지만 전반에 확실한 리드를 잡지 못했다.

개막 5연승을 달리는 동안 평균 17점 이상을 챙기며, 팀 공격의 새로운 옵션으로 올라선 김민정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중요할 때마다 득점 지원에 나섰던 최희진, 허예은, 심성영도 터지지 않았다.

지난 시즌까지 이런 흐름에서 KB가 이기는 법은 명료했다. 박지수의 고군분투였다.

쓸 수 있는 카드가 한정된 상황에서 가장 확고부동한 에이스인 박지수가 지배력을 더욱 확대하고 폭발시키는 것이 답이었다. 그렇게 박지수의 출전 시간과 피로도는 높아갔고, 그런 상황에서 박지수는 어떻게든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김민정의 부진을 그의 백업 역할인 엄서이가 만회했다. 2% 부족한 부분을 박지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해결하지 않고, 또 다른 선택으로 답을 찾았다.

KB는 가비지 게임을 만들었고, 채 25분을 뛰지 않은 박지수는 39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완성하자마자 밝은 표정으로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

물론 KB는 엄서이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 리바운드 싸움에서 높은 집중력을 보이며 흐름을 압도했고, 강이슬의 폭발적인 득점을 앞세워 점수차를 벌렸다. 그러나 4쿼터에 상대로부터 마지막 추격 의지를 강탈한 것은 엄서이였다.

자신보다 큰 선수들이 많은 골밑에서 저돌적으로 리바운드에 가담했다. 몸싸움과 투지에서는 상대 선수들을 압도했다. 박신자컵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엄탱크’, ‘엄장군’이 1군 무대에도 본격적인 상륙을 알렸다.

점프슛, 속공, 커트인 등으로 4쿼터에만 10점을 득점한 엄서이는 종료 2분 48초 전, 강유림에게 파울을 범하며 5반칙으로 퇴장 당했다. 파울 선언에 엄서이는 아쉬워했지만, 동료들은 벤치로 돌아온 엄서이를 기립 박수와 함성, 하이파이브로 맞이했다. 이 경기에서 엄서이는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KB의 주전가드 허예은과 동기로, 프로 입단 후 3번째 시즌을 맞이하지만, 1군 무대는 올해가 데뷔 시즌인 사실상의 신인이기에, 엄서이가 앞으로도 이러한 활약을 꾸준히 해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기복이 있을 것이고, 부침도 있을 것이다. 더 큰 부담과도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KB가 경기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더욱 폭넓게 쓸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1라운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김민정 역시 든든한 백업 선수의 등장으로 인해 부담감을 덜 수 있고, 또 선의의 경쟁도 가능하다.

김완수 감독은 엄서이를 영입할 당시, “이전부터 계속 지켜봤던 선수다. 힘도 있고, 투지가 좋아서 인사이드에 강점이 있지만, 프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높이는 조금 아쉽다. 외곽슛까지 가다듬어서, 장기적으로는 2번~4번을 볼 수 있는 선수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엄서이에게 저돌적인 ‘장군의 진격'과 위력적인 ‘탱크의 폭격‘을 모두 원하고 있다.

로테이션 자원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은, 이번 시즌 KB가 정규리그 운영에서 예년보다 더 강점을 가져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하는 선수들이 벤치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는 모습은 희망에 확신을 더한다. 

박지수라는 절대적인 비대칭무기를 소유한 KB가 강이슬의 가세와 더불어, 또 다른 변화를 통해 진화에 나섰다는 증거다.

부상으로 첫 두 시즌을 지워버리는 바람에 신인상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엄서이의 등장과 성장 드라마는 여자농구 팬들에게도 즐거운 볼거리가 될 것이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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