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김종규는 FA(자유계약선수) 자격 획득과 더불어 KBL 최초로 10억원 대의 연봉을 돌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영광과 자부심, 그리고 부담이 함께했을 조건으로 창원을 떠나 원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7월호에서 머니건을 당겨 가짜 지폐를 쏘아 올리며, ‘Young & Rich’의 당당함을 뽐내기도 했다.

이적 첫 해, 팀을 정규리그 공동 1위이 올려놓으며 ‘대한민국 최고 센터’의 가치를 증명하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2년. ‘창원의 아이들’은 ‘원주의 캡틴’이 됐다. 또 한 번 새로운 출발선에 선 김종규의 이야기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1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Born To Be A Star
“저 표지 하면 안 돼요? 허웅이 한 거, 이거 처럼요! 허웅이 한 건 제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처음이다. 본인 스스로 직접 월간지 표지를 요청한 선수는 김종규가 처음이다.

그는 팀 후배 허웅이 표지로 등장했던 지난 7월호를 집어 들며 ‘똑같은 콘셉트’를 요구했다. 이유는 특별히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다. 사실, ‘하고 싶다’ 이상의 이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김종규는 예전부터 그랬다. 나서야 하는 일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2년 전의 ‘머니건 표지’도 그렇다. 대부분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콘셉트였지만 김종규는 마다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관종(관심종자)’이라 한다. “키가 커서 좋은 게 뭐냐”고 묻는 질문에 “주변으로부터 주목받을 수 있다”고 대답하는 김종규다.

그는 자리를 깔아주면 더 돋보인다. 어설프게 빼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하든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한다. 5시간이 넘는 개인 촬영. 단독 인터뷰를 위해 자신의 휴일을 이렇게 할애하는 선수는 흔치 않다. 그는 유쾌했고, 성실했으며, 상황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 기회도 기약했다. 주인공 체질이다. 김종규는 스타로 태어났다.

 

NEW CAPTAIN
새 시즌, 김종규는 원주 DB의 주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센터이며, KBL FA 시장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던 주인공인 만큼, 중심과 주역의 역할을 맡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

“코트 안팎에서 선수들의 분위기를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코트 안에서는 선수들이 조금 더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그런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듬직한 주장으로서의 출사표는 이미 ‘캡틴’이라는 이름표가 익숙한, ‘낯설지 않은 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종규에게 주장은 참 낯선 자리다. 그가 주장을 맡은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을 13살이라고 치면, 무려 18년 만에 맡는 주장인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이후, 주장을 맡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항상 주장 못지않은 책임을 요구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낙생고 시절 이미 대한민국을 뒤흔들 센터 유망주로 자타가 공인했던 김종규는 선수로 뛰는 내내 팀의 핵심이었다. ‘주장 못지않은 책임을 요구하는 위치’라고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는 이유다.

“프로에 와서 다른 선배들이 주장 역할을 어떻게 하는지 잘 봤어요. 전 주장이었던 (김)태홍이 형, 그리고 제가 LG에 있을 때 (김)영환이 형이 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고 느꼈거든요. 제가 그 형들처럼 본보기가 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또 이런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돼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Super High Tension
원주 DB의 비시즌 분위기는 당혹스러울 만큼 활기찼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 지침이 강화되어, 각 구단의 체육관 취재가 불가능해 훈련 분위기도 그런지 확실한 가늠은 어렵다. 하지만 각종 콘텐츠와 인터뷰 등을 위해 선수들을 만나보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발단은 ‘허웅 효과’다. 허웅의 인기가 농구라는 범위를 넘어서 외연의 확장을 가져왔고, 이는 허웅의 팀 동료인 DB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원주 DB의 공식 유튜브인 DB TV의 구독자 수는 가파르게 증가했으며, 내놓는 콘텐츠마다 높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각종 미디어에 노출이 이어지면서 극히 보수적이었던 농구계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DB 선수들은 소위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한 느낌이다.

농구 외적인 요구, 혹은 갑작스러운 카메라의 등장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팬서비스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이 자신과 우리 팀, 그리고 KBL과 한국 농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전까지 ‘교과서적인 느낌’이 강했던 베테랑 박찬희가 각종 콘텐츠에서 스스럼없이 어린 선수들과 개그 코드를 공유하고, 팀의 맏형인 윤호영도 통영앞바다에 입수했다.

일반적으로 주장은 이런 분위기를 제어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김종규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 부추기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역할은 비시즌 내내, 많은 팬들이 DB에 열광하고 관심을 갖는 이유로 자리를 잡았다.

“제가 허웅을 이용하는 거죠. 허웅은 그걸 몰라요. 계속 이용해야죠.”

하지만 이러한 것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보수적인 층에서는 여전히 선수들의 잦은 미디어 노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와 달리 성적과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비판적인 시선들은 현재의 분위기에 대한 역풍이 되어 거세게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DB는 참을 수 없던 인기에 대한 가벼움으로 산화해버릴 수 있다.

반면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DB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지금의 DB는 농구계에 확실한 정면교사가 될 수 있다.

활기찬 팀 분위기와 적극성 높은 선수들, 팬들과 끊임없는 소통으로 확실하게 구축된 팬덤은 프로 스포츠가 반드시 지향해야 할 부분이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전현직 농구 선수들이 초대받는 것은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그래서 더 반가운 일이다. 이번 비시즌, 미디어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DB가 시즌의 결과까지 도모한다면, 비시즌의 이러한 모습들은 농구계 전역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 더 잘해야죠. 그런 부분에서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더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꼭 좋은 모습 보이겠습니다!”

 

 

따로, 또 같이...
주장이라는 책임감이 생겼지만, 잃은 것도 있다.

김종규와 함께 ‘경희대 3인방’으로 불리던 동료들이 모두 흩어졌다. 1년 먼저 팀을 옮겼던 김민구는 은퇴를 결정했고, 김종규보다 먼저 DB에 자리 잡고 있었던 두경민은 올해, 트레이드를 통해 한국가스공사로 이적했다.

김종규-김민구-두경민은 대학무대를 완벽하게 평정했던 동기들로, 오세근(KGC)-김선형(SK)의 중앙대 전성기와 이승현-이종현(이상 오리온)의 고려대 전성기 사이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경희대 왕조의 트로이카다. 종종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대학농구 왕조 계보를 순서대로 이어간 이 세 팀의 전성기 전력에 대해, 누가 더 강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비난과 논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뭐 당연히... 저희가 가장 강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주장해봅니다.”

사실, 경희대 3인방이 프로 한 팀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2013 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나란히 1~3순위에 지명될 만큼 기량이 압도적이었기에, 팀의 핵심인 선수들이 이적을 통해 한 팀에서 조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선수생활의 우여곡절이 많았던 김민구와 김종규의 FA 이적으로 이들은 2019년, 원주에서 다시 뭉쳤다.

“‘이렇게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모르는 거라는 걸 느꼈고요. 감회는 뭐... 정말 남달랐죠. 너무 반가웠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던 시간인 것 같아요. 저한테는 행복했던 기억이죠.”

경희대 3인방이 다시 만났던 그 시즌. DB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 시즌이 조기종료 됐기에, 챔피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을 치르지는 못했지만, 경희대 왕조 트로이카는 프로에서도 정상을 함께 했다.

“프로에서 한 팀에서 함께 한 건 1년뿐이었고, 이제 (김)민구는 은퇴하고, (두)경민이도 다른 팀으로 가게 됐는데... 학생 때랑은 다르잖아요. 프로는 분명 다른 세계고, 선수 개인의 의사만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쉬운 건 사실이에요. 아쉽죠. 많이.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The Time Has Come
“제가 한번 해볼게요, KBL을 제가 한번 뒤집어 보겠습니다. 느낌 아니까!”

2013 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뽑힌 김종규의 당시 지명 소감이다. 역대 KBL 신인들이 밝힌 포부 중 가장 당차고 인상적인 공개 도전장이기도 했다.

“아니... 이건 제가 계속 말씀드리잖아요. 그 소감은 대본이 있었어요. ‘느낌 아니까’가 그때 유행어였잖아요? KBL에서 대학 갓 졸업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던 저를 이용한 거라니까요! 제가 지금 허웅을 이용하듯이...”

가장 당차고 인상적이었던 도전장에 기관 개입설이 등장했다. 감동이 반감된다.

“뒤집어 놓겠다고 했는데, 사실 제가 뒤집어졌죠.”

하지만 김종규가 1순위 신인다운 위용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니다.

입단과 동시에 그는 당시 소속팀이었던 창원 LG의 정규리그 1위를 이끌었다. 이듬해에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2년만의 금메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역대 최고 연봉을 받고 이적을 한 DB에서의 첫 시즌에도 팀의 정규리그 1위 등극에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챔피언 트로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고, 이어진 시즌에는 족저근막염 등으로 인해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주장까지 맡게 된 이번 시즌은 그에게 더욱 중요하다. 스스로 ‘뒤집어졌다’고 말하는 아쉬움을 반드시 털어내야만 할 시간이다.

 

 

국가대표
김종규는 지난 올림픽 최종예선 국가대표에서 탈락했다. 부상 때문이었다. 그는 올림픽을 향한 대표팀의 선전을 소속팀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 어느 선수 못지않게 애정을 갖고 있는 태극마크다. 프로 데뷔 후, 자신이 뛰며 이뤄냈던 가장 큰 성과가 아시안게임 금메달이기에 김종규에게 대표팀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김종규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인생을 바꿔준 대회’라고 기억한다.

“병역 혜택을 받은 것도 의미가 있죠. 하지만 저한테는 ‘땀의 가치’, ‘노력의 가치’를 느끼게 해줬던 대회여서 의미가 커요. 정말 열심히, 너무 힘들게 준비했거든요. ‘이렇게 쏟아 부으면 정말로 되는구나’라는 걸 깨달은 대회에요.”

“이번 올림픽에서 양궁이나 여자 배구, 또 선전을 펼친 우리나라 대표 선수들이 국민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면서 많은 성원을 받았잖아요.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열정과 투혼을 보여준 것에 대해 국민들이 큰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셨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올림픽을 보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고요. 2014년 아시안게임 때는 저도 우리나라 농구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농구팬들과 국민들에게 그런 마음을 조금은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자랑스럽고, 명예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모습을 다시 한 번 팬들과 국민들에게 보여드리고 싶고요.”

 

 

흑역사
농구는 장신에게 유리한 스포츠다. 207cm의 김종규는 농구에 최적화 된 선수다. 그래서 오히려 작은 선수에게 당하는 모습이 연출되면, 김종규의 장점인 피지컬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지난 2015-16시즌에 펼쳐졌다.

2015년 11월 21일. 창원에서 열린 고양 오리온과 창원 LG와의 경기. 양 팀이 62-62로 팽팽히 맞서던 4쿼터 종료 4분 전. 오리온의 외국 선수 조 잭슨이 팀 동료의 스크린을 받아 수비수를 제치고 페인트 존 정면에서 날아올랐다. 180cm의 조 잭슨은 골밑에서 수비에 나섰던 김종규를 밀어내며, 그의 머리 위로 덩크슛을 성공시켰다.

자신보다 약 30cm나 작은 선수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당한 김종규에게는 가장 큰 굴욕이자 흑역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과거 인터뷰에서 김종규는 이 장면에 대해 담담하게 대답했다.

“농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창피하죠. 하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저는 똑같이 할 거에요. 저는 팀의 마지막 수비수잖아요. 제가 피하면 그 뒤는 없어요. 사실, 조 잭슨 선수한테 인유어페이스를 당한 것 보다, 그 장면에서 수비를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아파요. 접전 상황이었고, 꼭 잡아내야 하는 점수였거든요. 그 수비에 성공했다면 경기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덩크를 당했다는 것 보다, 점수를 내줬다는 게 더 속상해요.”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김종규에게 이 장면은 여전히 남아있는 기억이다.

“덩크를 맞아놓고, 제가 정말 주옥같은 멘트를 날렸네요. 하하. 그런데, 그게 맞는 거 같아요.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저는 똑같이 그렇게 갈 거예요. 어떻게 피하겠어요? 피하면 한 골인데... 같은 실점이라도 끝까지 수비하는 모습을 보여야죠. 포지션 상, 저는 팀의 마지막 수비수이기 때문에 제가 뚫리면 바로 실점이거든요. 저와 같은 입장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그렇게 생각할거에요. 다치지 않는 선에서 저는 항상 최선을 다해 수비를 해야 해요.”

덩크로 인한 흑역사가 있지만, 반대로 덩크슛은 김종규가 만들어내는 하이라이트 필름의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KBL에서 가장 덩크슛을 많이 보여주는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김종규 역시 “내가 한 인유어페이스 덩크도 있는데, 자꾸 당한 것만 이야기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이라이트 필름에 나올만한 덩크를 성공할 때는 저도 어안이 벙벙해요. 제가 국제대회에서 상대 선수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성공한 영상을 봤는데... 와.. 정말 제가 조금 날았더라고요!”

 

 

Debt
12억 7900만원.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김종규에게는 평생 따라다닐 숫자다. KBL 최초로 10억 연봉을 넘어섰던 김종규가 기록한 역대 최고 금액이 바로 12억 7900만원이다. KBL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금액이면서 김종규에게는 명예의 상징이며, 반대로 숱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농구가 갖는 시장 가치를 따질 때, 선수가 아무리 훌륭한 성적을 올린다 해도 그것이 ‘12억 원 이상의 연봉에 부합하느냐’에는 이견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빚! 빚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김종규는 12억 7900만원이라는 숫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DB라는 팀에 제가 진 빚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DB의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도록, 팀에서 그만큼 생각해주신 거잖아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DB가 저한테 그렇게 해주신 것만큼, 제가 또 그만큼 선수로 갚아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 Wish For What Is Forbidden To Me
목표와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다. 대부분에게 이러한 소망은 지금껏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김종규도 마찬가지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그에게 지금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부상당하지 않고, 아픈 곳 없이 시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부상은 선수에게 공공의 적이다. 몸을 쓰는 운동이기에, 특히 농구는 상대와의 격렬한 몸싸움을 피할 수 없다보니, 때로는 작은 부상 정도는 훈장처럼 여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김종규도 마찬가지. 수많은 부상을 달고 있었다. 고질적인 족저근막염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보호구를 착용하고 완쾌를 위해 꾸준히 재활을 병행중이다. 이전에는 햄스트링과 허리 통증도 있었다.

그의 압도적인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은 상대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무기다. 이러한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김종규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지난 시즌은 데뷔 이래로 결장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그는 올해 가장 바라는 것으로 “부상 없이 시즌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통합우승을 차지하고, MVP가 되고 싶어요.”

이번에는 시즌 목표다.

선수에게 우승은 영원한 목표이자 이상일 수밖에 없다. 경희대 시절 김종규는 전통의 강호인 고려대, 연세대는 물론, 이전의 왕조를 구축했던 중앙대도 무너뜨리며 원 없이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지금까지 정규리그 1위는 두 번 차지했지만, 최종 우승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프로에 와서 마지막에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이 없다는 걸 지금도 항상 생각하고 있고, 지금 저나, 우리 선수들이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하는 것도 통합 우승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거든요. 정말 열심히 도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팀의 우승과 더불어, 선수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MVP에 대한 꿈도 확실했다. 이는 팀의 주장이자 주역으로 본인이 갖는 당연한 욕심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나아가 더 큰 꿈도 언급했다.

“15번을 DB의 영구결번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김종규가 바라는 선수로서의 마지막 목표. 그것은 영구결번이었다.

우승과 MVP보다 더 원대한 꿈이다. 제2의 농구인생을 이어가고 있는 DB에서 화려하고 아름답게 선수 생활을 마치고 궁극의 해피 앤딩을 그리고 싶은 것. 그것이 지금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신인 시절 호기롭게 외쳤던 ‘KBL을 뒤집어 보겠다’는 일갈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직 KBL은 그에 의해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 큰 산을 정복하고 넘어섰던 선배들에 이어, 오히려 더 어린 후배들이 그의 강력한 도전자로 나서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종규가 쓸쓸히 밀려나고 있는 장강의 앞 물결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리그 최고의 센터이며, 코트 안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선수이자, 인사이드에서 누구보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선수다. 가장 호쾌한 덩크로 팬들의 함성을 이끌어내고, 거의 매 경기, 상대의 슛을 걷어내며 ‘팀의 마지막 수비수’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구단과 동료 선수들, 코칭 스태프.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팬들이 그가 가고자하는 길을 응원하고 있다. ‘느낌 잘 아는’ 김종규의 KBL 뒤집기는 오늘도 맹렬히 진행 중이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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