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에세이 ‘단편’(斷片/短篇) 
신고 선수에서 주장까지... 역전의 길을 걸었던 주인공

‘선수'의 이름을 내려놓고 이제는 코치로...

[루키=박진호 기자] 봄은 분주하다. 새로운 태동을 준비하는 여러 가지 작은 준비들이 시작된다.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기 위한 출발이 있고, 혹은 이동도 있다. 확신할 수 없는 결실을 예비하는 과정이다.

봄은 여전히 쌀쌀하다. 그런 분주함의 가장자리에는 환한 빛에 가린 그림자 속으로 자기 이름을 지우는 이들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팬들의 함성과 성원 속에 코트를 누볐던 이들이 자신의 이력에서 ‘선수’라는 이름을 지우는 시기다.

백지은. 1987년 12월 8일생. 177cm의 언더사이즈 빅맨. WKBL에서 대표적인 ‘무명 신화’를 쓴 블루워커. 부천 하나원큐의 주장.

학창 시절,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주역으로 드래프트 상위 순번에 뽑혀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WKBL에서, 그는 대표적인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자 반전의 성공신화를 쓴 대표 주자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을 돌아, 자신이 꿈꿨던 프로 선수의 이력을 빼곡하게 채웠던 그도 정들었던 유니폼을 고이 접었다. 그리고 선수라는 이름 대신 다른 글자를 적었다.

코치.

#1
굴곡이 참 많았던 선수 생활이다.

WKBL 선수 페이지에서 백지은을 찾아보면, 용인대를 거쳐 2014 WKBL 신입선수 선발회를 통해 프로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통산 기록에는 2007-08시즌부터 경기를 뛴 흔적이 존재한다. 2010-11시즌부터는 3년의 공백이 있다. ‘하나원큐의 원클럽맨’으로 인식되는 백지은에게 존재하는 미스터리한 이력이다.

1987년생인 백지은의 첫 프로 입단은 2006년이다. 그의 동기 중 현재 프로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김정은(우리은행), 이경은(신한은행), 최희진, 염윤아(이상 KB스타즈) 등이다.

하지만 이들이 프로에 데뷔했던 2006 신입선수 선발회에는 백지은의 이름이 없다. 총 20명이 선발된 이 드래프트에 백지은은 없었다. 그는 공식적인 선수로 등록조차 되지 않는 신고 선수였다.

구리 금호생명 레드윙스의 신고 선수였던 백지은의 목표는 WKBL 가이드북, 혹은 소속 구단의 소개 책자에 자신의 사진과 이름이 실리는 것이었다.

2007년 11월 3일, 구리시체육관에서 열린 금호생명과 삼성생명의 경기.

등번호 12번의 백지은은 2쿼터에 코트를 밟았다. 감격스러운 프로 데뷔였다. 출전 시간은 단 6초. 금호생명은 박빙의 승부 끝에 64-67로 패했고, 백지은의 데뷔전은 그 6초가 전부였다. 이날 경기 백지은의 기록지에는 6초를 뛰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숫자가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에게 조금씩 시간이 주어졌다.

3번째 출전이었던 11월 25일 신한은행 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첫 슈팅을 시도했다. 처음으로 1분 이상 코트를 밟은 날이었다.

5번째 출전이었던 12월 15일 삼성생명 전에서는 1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처음으로 기록이라는 것을 만든 날이다.

그다음 경기였던 KB 전(12월 22일)에는 처음으로 10분 이상을 뛰었고, 프로 첫 득점 포함 4점, 그리고 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평균 출전 시간은 4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백지은은 2007-08시즌 11경기를 시작으로, 매 시즌 10경기 이상 코트에 나섰다. 2009-10시즌에는 15경기를 뛰었다. 조금씩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휴가를 마치고 2010-11시즌 준비를 위해 소속팀으로 복귀하던 백지은은 구단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 시즌을 함께 할 수 없다는 통보였다. 주축 선수들의 연봉 인상으로 인한 샐러리 캡 문제가 발생했고, 백지은은 선수단 정리 대상으로 분류됐다.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를 안고 구리로 출발했지만, 결국 숙소에 남아있던 자신의 짐을 정리해서 나오는 길이 되어 버렸다. 손에 잡히는 듯했던 꿈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2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용인대학교로 진학하며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간 것. 잔인한 2010년의 봄을 뒤로 하고, 백지은은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목표는 오로지 WKBL 복귀뿐이었다.

그렇게 대학에서 3년을 보낸 후 다시 WKBL에 지원했다. 선발될 것이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한번 지원하고, 그때도 안 되면 미련 없이 농구를 접겠다는 각오였다.

12번째.

63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2014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백지은의 이름이 12번째로 호명됐다. 2라운드 마지막 순번에서 하나원큐(당시 하나외환)가 그를 선택했다. WKBL에서 소리소문없이 잊히는 것 같았던 그의 농구 인생을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여기 들어오면서부터는 모든 게 다 잘 맞은 것 같아요. 제가 사실 무릎이 안 좋거든요. 오자마자 무릎이 안 좋아서 ‘다시 나가야 하나’, ‘그만둬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도 많았어요. 처음 두 달 정도는 체육관에도 못 올라가고 웨이트 장에서 체력운동만 했거든요. 그런데 그 시간을 거치면서 경기에 뛸 수 있는 몸이 된 거죠.”

‘WKBL 복귀’라는 목표는 이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같은 포지션에는 넘어서기에 벅찬 경쟁자가 많았다.

4-5번 포지션에는 베테랑인 허윤자와 진신혜가 있었고, 삼성생명에서 이적한 이유진도 있었다. 이령 또한 기대를 모으는 미래 자원이었다. 복귀 시즌, 백지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3경기, 총 7분 52초에 불과했다.

“확신은 없었죠. 목표는 5년이었어요. 5년만 프로에서 버티자는 생각이었죠. 27살에 프로에 왔으니 처음 3년 안에 경기를 못 뛰면 그만둬야 한다는 각오였어요. 경기를 뛰어도 32살에는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어렸을 때, 왼쪽 무릎 반월판을 수술했는데, 제 무릎이 그 이상은 버티지 못할 거 같았거든요.”

그러나 백지은에게는 1년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원큐에서 첫해를 보낸 다음 시즌. 그의 출전 시간은 평균 24분으로 대폭 늘어났다. 박종천 감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염)윤아나 강(이)슬, 그리고 저한테는 박종천 감독님이 특별한 분이에요. 박 감독님은 저희가 소화할 수 있는 거 하나에 대해 확실하게 요구하셨어요. 강이슬한테는 슛. 염윤아한테는 수비. 이런 식으로요. 들어가면 궂은일이 전부였던 저한테는 외국인 선수가 공을 잡으면 상대 골 밑까지 무조건 뛰어 들어가라는 미션을 주셨죠. 당시 저희 외국인 선수가 엘리사 토마스였거든요. 수비가 그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한테 기회가 올 거라고, 상대 골 밑까지 무조건 속공을 뛰어 들어가라고 확실한 목표와 기회를 주셨어요.”

#3
출전 시간이 늘었고, 불확실했던 그의 선수 생활은 안정적으로 변했다. 2014-15시즌부터는 5년간 매해 30경기 이상을 뛰었다. 은퇴 시즌까지, 평균 출전 시간이 10분 아래로 떨어진 적도 없다.

“주전이 되고, 혹은 경기에 많이 뛰는 식스맨일 때에도 제가 그만큼 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단점이 확실했잖아요? 이 포지션을 소화하기에는 키가 작기 때문에 언제나 밀려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간절함은 오히려 늘 유지됐던 것 같아요.”

그러던 2016년. 팀은 그를 주장으로 선임한다. 이전까지 하나원큐의 주장은 김정은이었다.

WKBL 역사상 가장 화려한 데뷔, 그리고 최고의 루키 시즌을 보낸 선수. 최고의 득점력을 갖춘 선수. 신세계 시절부터 팀의 ‘소녀 가장’ 소리를 들었던 에이스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백지은의 동기 중 가장 빛나는 길을 걷고 있던 김정은의 주장자리가 그에게 주어졌다.

“당황했고, 부담스럽기도 했죠. (김)정은이는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잖아요. 팀에서 생각을 많이 해준 것 같아요. 정은이가 재활을 하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제가 나이에 비해 연봉이 많지도 않으니까 ‘주장 수당도 있어서 생각해 준 게 아닐까’ 하기도 하고...”

그러나 하나원큐에 오래 몸을 담았던 이들은 백지은에 대해 ‘주장에 어울리는 선수’라고 말한다. 주변을 잘 챙기는 성격이고, 계산 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늘 나눠주는 선수라는 평가가 많다. 그래서 선후배 사이의 신망도 두터웠다.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천성이 주장’인 사람이 어딨겠어요? 힘들었죠. 쉽지 않아요. 그래도 저희 팀은 애들이 다 착해요. 간식 한 번 사려고 해도 돈을 못 쓰게 했어요. 사실, 자기들 연봉이 더 높았잖아요.(웃음) 그래도 밖에서 만나면 당연히 제가 밥값을 내긴 했어요.”

여자농구는 대부분 고등학교를 마치고 프로에 입단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WKBL에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기량이라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다.

때문에 대학을 거치고도 고교졸업 선수보다 성공사례가 많지 않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각 구단도 고교졸업 선수들에 대한 선호가 무척 높았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는 대학 출신 선수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김아름(신한은행), 김진희(우리은행), 이명관(삼성생명), 강유림(하나원큐) 등, 눈에 띄는 발전을 보인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백지은 역시 대학을 거치며, 자신을 더 갈고 닦았던 선수. 어쩌면 대학 출신 선수들에게 본보기와 같은 존재다.

“대학을 거치고 오면 아무래도 나이가 많죠. 저도 (신)지현이의 프로 입단 동기잖아요.(웃음) 하지만 내가 언니라는 생각보다는 막내라는 생각으로 자세를 낮추고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아직 여자농구에서 ‘대학출신’이라는 게 장점은 아니거든요. 주변의 시선에 관해 부담을 견디고 이겨내는 건 본인 몫이에요. ‘나부터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세를 갖는 건 당연하고요. 더 열심히, 악착같이 한다는 마음이 기본이에요. (강)유림이는 그런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생활이나 코트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4
‘길어야 5년’을 내다봤던 선수 생활이 조금씩 가능성을 길게 끌어갔고, 백지은 역시 하나의 목표를 더 잡았다. 300경기 출전이 그것이다.

특별히 누가 기념해주는 기록은 아니지만, 굴곡이 많았던 자신의 농구 인생에서 스스로 축하할 수 있는 작은 기념비 같은 목표였다.

하지만 끝내 이 꿈은 이루지 못했다.

팀당 35경기였던 정규리그 경기 수가 30경기로 줄었고 2019-20시즌은 코로나19로 인해 조기 중단됐다. 지난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경기 출전 기회도 줄어들었다.

“300경기 출전을 목표로 하긴 했지만, 막상 시즌에는 별로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경기에 못 뛴다고, 그걸 신경 쓸 때는 아니었거든요. 아마, 마무리가 다가온다는 걸 체감했던 것 같아요. 준비하고 시합장에 갔는데, 벤치에만 있다가 마친 날이 점점 늘었으니까요. 뭐, 마음이 안 좋았던 것도, 선수 생활에 미련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2020-21시즌을 마쳤다. 하나원큐의 유니폼을 입고 보낸 8번의 시즌. 그리고 한 팀의 주장으로 5번의 시즌을 치르고, 익숙한 봄방학이 시작됐다.

“시즌 마치고 휴가를 나가는데, 감독님이 먼저 제의를 해주셨어요. 코치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요.”

봄방학이 졸업식으로 바뀐 것이다.

“감독님이 경기 중에 지시한 사항을 선수들이 이해를 못 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 선수들이 다시 물어보면 제가 빨리 설명을 해줬던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 감독님이 그걸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감독님 제의를 받고 휴가 기간 내내 생각이 많았죠. 더 뛰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으니까... 부모님과도 상의를 많이 했어요. 부모님도 제 간절함을 잘 아시고, 또 제가 경기 뛰는 걸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어쩌면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의 마침표. 그리고 코치로의 새로운 출발.

결정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즌 중에 (이)하은이나 다른 선수들이 저한테 ‘언니가 코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현역 욕심으로 플레잉코치를 한다고 해도, 제 연봉으로 셀러리 캡을 채우게 되잖아요. 또 저로 인해 누군가는 뛰지 못하고 계약을 못할 수도 있고요. 선수로 팀에 큰 도움이 안 되면서 후배들의 자리를 뺏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선수 생활 내내 후배들이 저를 많이 도와줬는데, 이제는 제가 후배들을 도울 수 있는 때가 온 게 아닐까... 그리고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그냥 은퇴 수순을 밟을 수도 있었는데, 저를 좋게 보고 기회를 주신 거라서 배울 점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죠.”

#5
휴가를 마친 후 면담에서 백지은은 코치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하나원큐의 비시즌 훈련이 시작된 지난 12일부터 코치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코치 2주 차입니다. 그런데 벌써 힘들어요. 첫 시작이 FA 시장이었고, 팀의 에이스였던 선수가 이적했어요. 보상 선수 영입으로 고민도 많고요. 다 처음 접해보는 일이잖아요. 선수일 때랑은 확실히 달라요. 선수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태프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한다는 걸 몰랐어요.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웨이트를 먼저 하는 게 비시즌 초반의 일과여서 코치실에 스태프들이 언제부터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는지도 몰랐거든요. 코치실을 이용하는 분들이 이렇게 부지런할 줄이야...”

우선은 어색함의 극복이 먼저다.

“애들이 아직 ‘코치님’이라는 말이 입에 안 붙어서 ‘언니’라고 할 때가 더 많아요. 그런데 저도 그 말이 더 편하죠. ‘언니’라고 불러도 위화감을 못 느껴요. 계속 언니였으니까요. 호칭도 선수에서 코치로 바뀌는 과도기인 것 같아요.”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코치가 해야 할 일은 경기력 부분은 물론, 선수 관리, 그리고 기타 사소한 일까지 그 범위가 상당하다. 일단 컴퓨터랑 친해지는 것도 숙제다.

“큰일이에요. 대학교 때 리포트도 쓰고 뭔가 하긴 했는데, 저 논문도 독수리 타법으로 쳤어요. 저 기계치거든요. 프로그램을 실행해놓고 뭘 하라고 하면 하긴 하는데, 그 프로그램을 어떻게 켜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고 할까요... 이시준 코치님한테 많이 물어봐요. 대학 때 거의 다 해보긴 했지만, 8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컴퓨터라...(웃음) 그래도 그때 해봤으니 조금 하면 금방 늘지 않을까요?”

용인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를 졸업한 백지은은 무려 석사 출신이다.

“가족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저한테도 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었거든요. 사실 언니(백성실)도 농구를 했었어요. 프로에도 왔는데 1년 만에 은퇴했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성공했다면 저는 여기까지 안 왔을 거예요. 언니가 첫 드래프트에서 안 됐을 때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셨거든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저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그래서 더 농구에 힘을 쏟았던 거 같아요. 부모님이 내가 선수로 뛰는 걸 정말 좋아하셨고 자랑스러워해 주셨는데, 항상 뒷바라지해 줘서 정말 고맙고, 앞으로 새로운 인생이니까 그것도 더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35살. 결혼도 생각해야 하는 나이다.

“아! 결혼 못 한 건 엄마한테 아직 안 미안해요. 언니도 37살에 결혼했거든요. 전 아직 2년 남았어요. 뭐... 2년 후에도 시집가는 건 어려울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그때 못할 거라고 지금부터 미안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때 가서 미안 할래요.”

‘2주 차’라는 짧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리는 연륜과 경험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코치 백지은이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

“저는 화려한 플레이를 했던 선수도, 그렇다고 농구를 잘했던 선수도 아니에요. 그냥 바닥부터 올라온 선수였죠. 팀에서 맨 아래에 있는 선수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 선수들이 잘 견디고 성장하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올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주장을 5년간 하면서 선수단과 코치진 사이의 가교 역할도 했었으니까, 코치가 된 지금도 중간에서 소통이 잘되도록 노력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소속팀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다짐도 담았다.

“하나원큐는 저한테 농구의 길을 열어준 팀이고, 선수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팀이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준 팀이에요. 선수들이 떠나면서 아쉬움도 있지만, 감독님과 코치님을 도와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할 거에요.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다 같이 함께 뛰고 싶은 팀이라는 이야기가 지금보다 더 많이 들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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