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트레이 영은 언제나 비상(飛上)해왔다. 오클라호마 지역 스타에서 전국구 유망주로, 5순위 유망주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올스타로. 올 시즌 트레이 영은 애틀랜타와 또 한 번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트레이 영의 스토리를 함께 알아보자.

스타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트레이 영은 1998년 레이포드 영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레이포드의 나이는 고작 21살. 그는 텍사스 공대 3학년 포인트가드였다.
레이포드는 팀의 확고부동한 에이스였다. 3학년 시즌 기록만 봐도 잘 드러난다. 평균 16.1점 3.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각각 팀 내 1위와 2위였다. 3점슛 능력도 상당히 좋았다. 경기당 1.9개를 39.2%의 높은 확률로 성공시켰다.
대학 졸업 후 레이포드는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 무대에서 프로 생활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레이포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아들 트레이 영을 위한 ‘NBA 선수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트레이 영 가족은 오클라호마주의 노먼(Norman)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다. 총 인구 10만 명을 조금 넘는 작은 도시였다.
레이포드는 아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농구선수로 키우길 원했다. 트레이 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레이포드는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노먼에서 그냥 친한 친구들과 농구하면서 지낼래, 아니면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될래?”
어린 영은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레이포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아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트레이 영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큰 규모의 농구 캠프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또래 선수들과 함께 뛰며 경쟁하고, 더 유능한 지도자들 밑에서 농구를 배우며 기량을 발전시킬 기회가 어린 영에겐 필요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도시 노먼에는 대규모 농구 캠프가 열릴 수 없었다. 주변의 보다 큰 도시로 나가야 했다.
아들을 위해 레이포드는 기꺼이 장거리 운전을 자청했다. 3시간 거리의 댈러스, 6시간 거리의 휴스턴도 레이포드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이포드는 먼 거리의 대도시를 직접 운전으로 왕복하면서 트레이 영을 농구 캠프에 참가시켰다. 아버지의 헌신 속에 트레이 영은 다양한 농구 캠프에서 참가하며 성장의 자양분을 쌓을 수 있었다.
레이포드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수 출신이었던 레이포드는 트레이 영이 좋은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기에 대한 높은 이해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틈나는 대로 비디오를 보며 함께 농구를 공부했다.
비디오의 소재도 다양했다.
카이리 어빙의 드래프트 전 개인 훈련 영상을 같이 보는가 하면, 골든스테이트 경기를 함께 분석하며 전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NBA에서 일하고 있던 지인들도 레이포드에게 도움을 줬다. 레이포드의 지인들은 직접 영상을 편집해 레이포드에게 보내줬고, 레이포드는 아들과 함께 하루 종일 그 영상을 보며 농구를 공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8년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오클라호마시티로 연고지를 옮기자, 레이포드는 곧바로 오클라호마시티의 시즌권을 구매했다. 아들과 함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레이포드와 트레이 영은 경기 시작 2시간 전쯤에 미리 체서피크 아레나에 도착해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경기 준비 루틴을 직접 지켜보곤 했다.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고하고 모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따라 했다.
레이포드는 NBA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영을 라커룸에 데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통해 영은 코비 브라이언트, 앤써니 데이비스, 크리스 폴, 카이리 어빙 같은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을 만나고 그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오클라호마 주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였던 영을 NBA 선수들도 기특하게 여겼다. 특히 크리스 폴은 영상 통화를 통해 꾸준히 트레이 영과 연락을 취하며 농구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는 후문이다.
아버지의 도움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트레이 영도 엄청난 노력을 했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아침 6시부터 일어나 훈련을 했다.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코트에서 아버지와 훈련을 했다.
스티브 내쉬의 영상을 보며 영감을 받은 플로터를 아버지와 함께 꾸준히 연습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아버지 레이포드가 나섰다. 레이포드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들었다. 레이포드는 빗자루를 수직으로 세워 직접 수비수 역할을 했고, 그 위로 트레이 영은 수없이 플로터를 던지며 스티브 내쉬의 동작을 따라 했다. 레이포드가 든 빗자루는 트레이 영에게 루디 고베어, 앤써니 데이비스였다.
플로터를 던지던 트레이 영이 지친 기색을 보이면 레이포드는 이렇게 외쳤다.
“다시 해봐! 빗자루 정도는 그냥 정복해야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죠!
유년기부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노력한 트레이 영에겐 달콤한 보상이 따라왔다. 고등학교 입학 후 트레이 영은 오클라호마 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지역 농구 스타가 됐다. 한 마디로 레벨이 다른 선수였다.
고교 주니어 시즌 트레이 영의 평균 기록은 무려 34.2점 4.6리바운드 4.6어시스트였다. 영이 이끄는 노먼 노스 고교는 28승 4패를 기록하며 지역 우승을 차지했고, 오클라호마 주 토너먼트 대회에서 2위에 올랐다. 영은 오클라호마 주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영의 성장은 계속됐다. 고교 졸업반 시즌 영은 평균 42.6점 5.8리바운드 4.1어시스트 야투율 48.9%를 기록한다. 당시 영은 이미 고교 레벨의 선수가 아니었다.
영의 기량과 재능을 눈여겨본 여러 대학 팀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농구 명문 켄터키, 캔자스도 있었다.
후문에 따르면 영의 아버지 레이포드는 켄터키 대학 입학을, 어머니 캔다이스는 캔자스 대학 입학을 권했다고 한다. 레이포드는 켄터키가 전미 최고의 유망주들이 모이는 학교이기 때문에 영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캔다이스는 오클라호마 주와 가까이 있는 캔자스 대학에 가야 아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영의 선택은 캔터키도, 캔자스도 아니었다. 영은 고향에 있는 오클라호마 대학을 택했다.
훗날 영은 전미 최고 명문대들의 오퍼를 거절하고 오클라호마 대학 입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오클라호마 대학에 온 이유는 저의 농구(my game)를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에요. 사실 대학에서 저는 고등학교 시절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더 큰 무대에 뛰고 있을 뿐이죠.”



오클라호마 대학의 트레이 영은 말 그대로 센세이셔널했다.
2017년 12월 19일, 노스웨스턴 대학과의 경기에서 영은 25점 2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105-68 대승을 이끈다. 22어시스트는 NCAA 1부 리그 역대 한 경기 최다 어시스트 타이 기록이었다. 영 이전에 이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토이 페얼리(1987년, 찰스턴 서던 대학), 에이브리 존슨(1988년, 서던 대학), 셔먼 더글라스(1989년, 시라큐스 대학) 3명뿐이었다.
NBA 레벨의 거리에서 장거리 3점슛을 폭격하고 어시스트를 쏟아내는 영의 모습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영은 전국적인 관심을 얻는 스타가 됐고, 팬들은 그를 ‘제2의 스테픈 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NBA 선수들도 영의 활약에 놀란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테픈 커리는 “믿을 수 없다. 수비를 밖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엄청나다”며 영을 극찬했다. 러셀 웨스트브룩도 “정말 대단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며 영의 퍼포먼스를 높이 평가했다.
르브론 제임스 역시 들뜬 마음을 드러냈다. 르브론은 과거 나이키 캠프에서 어린 트레이 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의 SNS에 업로드하기까지 했다.
고교 졸업반이었던 트레이 영에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쳤던 켄터키 대학의 존 칼리파리 감독은 오클라호마 대학에서의 영의 활약을 지켜본 후 “솔직히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는 트레이 영이 얼마나 농구를 잘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대학에 와서 이 정도로 잘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영이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영에게 리쿠르팅을 했었어요. 하지만 저는 영이 지금 대학에서 보여주는 플레이를 보여줄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어요. 대학에서 영은 팀 득점의 70%, 80%를 득점이나 어시스트로 직접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숫자에요. 영이 잘하고 있어서 저도 기쁩니다.”
결국 트레이 영은 32경기에서 평균 27.4점 8.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학 첫 해 정규시즌을 마무리한다. 누적 득점은 848점이었고 누적 어시스트는 271개였다. 평균 득점, 어시스트와 누적 득점, 어시스트 모두 전미 1위였다. 영 이전에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록이었다.
NCAA 토너먼트에서도 영의 활약은 빛났다. 로드 아일랜드에 패해 탈락한 마지막 경기에서 영은 28점 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NCAA 토너먼트 경기에서 신입생이 이런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은 2004년 크리스 폴 이후 트레이 영이 처음이었다.
고교 졸업 당시 트레이 영의 전미 랭킹은 14위에서 21위 정도였다. ESPN은 23위에 영을 놓기도 했다. 신입생 시즌이 시작할 때 매체들은 영이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후반 혹은 2라운드 초반에 지명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신입생 시즌이 끝난 후 영의 드래프트 지명 예상 순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대부분의 매체들이 영의 5순위 이내 지명을 점쳤다. 세간의 평가를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평생의 라이벌
2018년 6월 21일, 대망의 2018 NBA 신인 드래프트가 열렸다. 이 드래프트에서 트레이 영은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의 지명을 받는다. 하지만 영이 댈러스의 유니폼을 입는 일은 없었다. 지명 직후 애틀랜타로 트레이드됐기 때문이다.
이 드래프트에서 3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애틀랜타와 5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댈러스는 과감한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일단 서로의 루키를 맞바꾸고, 여기에 댈러스가 2019년 미래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한 장 더 얹어주기로 했다.
트레이드가 확정된 순간부터 애틀랜타의 이 선택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아무리 1라운드 지명권을 한 장 더 얻을 수 있어도, 유럽 최고의 유망주였던 돈치치를 굳이 포기하고 픽 다운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해 훗날 댈러스의 릭 칼라일 감독은 “확실한 리빌딩의 구심점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미래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한 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라고 이야기해 또 다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일각에서는 애틀랜타가 흑인 사회의 역사가 깊고 흑인 부자가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백인인 돈치치가 아닌 흑인인 트레이 영을 데려왔다는 말도 있었다. 유로리그에서 돈치치가 자신의 잠재력을 이미 완전히 만개했을 것이라는 NBA 일부 스카우터의 평가가 애틀랜타의 선택에 영향을 준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골든스테이트에서 비디오 스카우터, 부단장을 일했던 트레비스 슐렝크 신임 단장이 스테픈 커리와 더 비슷한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트레이 영을 일부러 데려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2018년 서머리그에서 영이 부진하면서 애틀랜타의 선택은 잠시 조롱을 받았지만, 이후 영은 보란 듯이 NBA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펼치며 비관론자의 마음마저 돌려놓았다. 루키 시즌에 평균 19.1점 8.1어시스트를 기록한 영은 소포모어 시즌이었던 2019-2020시즌에 평균 29.6점 4.3리바운드 9.3어시스트 3점슛 3.4개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됐다.
데뷔 첫 2년 동안 트레이 영은 돈치치와 함께 올 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됐고 함께 올스타전에 뛰었다. 정규시즌과 올스타전 행사에서 영과 돈치치는 코트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고, SNS로 서로를 응원하는 글도 남겼다. ‘건강한 라이벌’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둘이다.
트레이 영은 인터뷰 석상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돈치치의 재능과 기량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더불어 훗날에는 자신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도 드러내는 중이다.
“저와 돈치치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저는 모두 듣고 있어요. 솔직히 안 들을 수가 없죠. 돈치는 정말 좋은 선수입니다. 엄청나게 영리한 선수(super smart player)예요. 개인적으로는 돈치치가 유럽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과 어릴 때부터 경기를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준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결과 정말 어린 나이에 NBA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는 선수가 된 것 같아요.”
“돈치치는 정말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저 자신도 NBA에서 돈치치만큼 정말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5년에서 10년 후에 더 나은 선수로 평가받는 건 돈치치가 아니라 제가 될 거라고 확신해요. 제 피에 경쟁심이 가득 흐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싶네요. 5년에서 10년 후에 누가 더 나은 선수가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적어도 저에겐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은 자신과 돈치치가 드래프트 동기이자 맞트레이드의 대상으로서 결국은 평생 비교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저와 돈치치는 은퇴할 때까지 비교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겁니다.”
“일단 저는 그 논쟁보다는 일단 저 자신과 저희 팀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게 제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에요. 저와 돈치치가 모두 농구를 그만두는 날까지 저희 둘은 비교되고 또 비교될 겁니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