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에세이 ‘단편’(斷片/短篇)
WKBL이 키워낸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김단비

[루키=박진호 기자] 리그를 지배하던 최강팀의 막내로 프로에 첫발을 내디딘 김단비는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호령하던 화려한 멤버들 속에서 팀의 영속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차세대 기대주였다. 기대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성장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포워드로 우뚝 섰다.
비록 영원할 것 같았던 트로피를 다른 이들에게 내준 채 8년의 세월이 지났고, 여전히 정상 탈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지는 않지만, ‘레알 신한은행’의 막내였던 그가 팀의 상징으로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한은행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 김단비이며, 김단비는 곧 신한은행이다.
어느덧 신한은행의 유니폼을 입고 뛴 햇수가 자신의 배번(13)만큼 차올랐다. ‘절친’이던 선배 김연주가 ‘비글’이라 부르던 귀염둥이에서 나이 서른의 새신부가 된 김단비는 이제 리그를 대표하는 베테랑이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1
‘프랜차이즈 스타’ 혹은 ‘프랜차이즈 선수’를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들다. 쉽게 표현하면, ‘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팀을 상징하는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량과 인기, 영향력을 두루 갖춰야 한다는 것. 또한 해당 팀 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팀에 오랫동안 머물며 헌신했음을 인정받아야 한다. 따라서 이적 없이 한 팀에서만 꾸준히 활약한 ‘원클럽맨(One Club Man)’인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획득해도 구단이 마음만 먹으면 이적을 못하게 할 수 있었던 WKBL은(비록 이번 비시즌에 높이의 문턱을 낮췄지만) 한 팀에서만 활약하는 선수들이 대거 배출되는 구조다. 리그를 대표했던 슈퍼스타 중 이적 없이 선수 생활을 마감한 선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선수단 내에서의 신망과 구단에서의 믿음, 그리고 팬들의 지지를 모두 받으며 팀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중 대표적인 선수가 김단비다. 현재 WKBL 현역 선수 중 이적 없이 한 팀에서만 뛴 최고령 선수는 김한별(삼성생명)이다. 1986년생인 김한별은 동포선수 자격으로 2009-10시즌부터 WKBL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규정에 의해 김한별은 FA자격을 획득할 수 없다. 소속팀의 동의가 없으면 이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김한별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한 이들이 강아정(KB)과 김단비다. ‘2008 WKBL 신입선수 선발회’를 통해 WKBL에 진출한 이들은 13년 동안 오롯이 한 팀의 유니폼만을 입었다. 그렇게 강아정은 449경기(정규리그 412경기, PO 37경기), 김단비는 438경기(정규리그 403경기, PO 35경기)를 뛰었다.
“나이는 (김)한별언니가 많지만, 프로에는 저희가 먼저 들어오지 않았나요?”
‘프랜차이즈 스타’는 곧 자부심이다. 한 팀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약한 선수라는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김단비는 은연중에 이 부분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나타냈다. 자신의 인터뷰가 8월호 커버스토리이므로 표지에 사진이 실린다고 하자, “한참 좋을 때는 눈길 한 번 안 주다가 시집가고 나니까 이제야 표지에 넣어주냐”며 특유의 비글미를 유감없이 과시하던 김단비가 진지해졌다.
“저도 제 의지만 갖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제 프랜차이즈’는 아니에요. FA 자격을 3번 얻었는데, 특별히 팀을 옮기겠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결국 제 선택이었죠. (박)혜진(우리은행)이도 이번에 이적할 수 있었는데 남았잖아요. 팀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내린 결정이었겠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어렸을 때 ‘신한은행 농구’하면 많은 분들이 ‘전주원’, ‘정선민’이라고 했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저도 ‘언젠가는 언니들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신한은행‘하면 저를 가장 먼저 떠올려주시잖아요. 좋죠. 자랑스럽고. 프랜차이즈라는 거는 자부심이에요.”
김단비와 긴 시간 인터뷰를 처음 했던 것이 2010년이었다. 지금보다 더 유쾌하기도 했고, 가끔은 인터뷰를 함께 들어온 선배 언니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신한은행의 인터뷰실을 가장 많이 드나든 선수다.
신한은행의 홈 경기장인 인천도원체육관을 둘러보면 이러한 김단비의 위상은 쉽게 드러난다. 선수들의 사진이 벽면을 채우는 게 당연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김단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영화에서 건물 벽면에 나열된 하켄크로이츠만큼이나 도원체육관에서 김단비가 차지하는 도배지분은 엄청나다. 확실히 그는 ‘신한은행 여자농구단’ 그 자체를 의미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지난 FA 계약 이후에는 2022년까지 신한은행에 남는 것으로 연장계약까지 맺었다.
“뭐... 제도가 이렇게 빨리 바뀔 줄 알았나요? 혜진이가 올해 자격 획득한 거 보면서 살짝 아쉽기는 했어요. 하하. 내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혜진이처럼 저도 팀에 남았을 테니까요.”

#2
김단비는 2008년 인천 명신여고를 졸업하고 신한은행에 입단했다. 명신여고는 김단비 이후 농구부가 해체됐다.
“모교를 찾아가서 후배들 챙겨주는 선수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죠. 저도 그런 거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동료들이 후배들 챙기러 모교에 간다고 하면, ‘난 간식 값 굳어서 괜찮아’라고 말은 하는 데 아쉬운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가끔 중학교(부일여중) 후배들은 들어오니까 다행인 거 같아요. 우리 팀 (최)지선이도 중학교 후배에요.”
김단비가 입단했던 시절은 신한은행이 본격적으로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쟁쟁한 멤버들을 앞세워, 기존의 강팀들을 제압했고 통합 6연패의 역사를 만들었다.
“아니, 제가 속상한 게 지금 사람들은 그때 제가 안 뛴 줄 안다니까요! 제가 그 6연패 중에 5번을 했거든요. 아시잖아요? 첫 해는 거의 못 뛴 게 맞아요. 두 번째 시즌에도 주로 가비지에 나갔으니까 뭐 할 말은 없죠. 그런데 그런 건 딱 거기까지거든요! 그 다음 시즌은 저 식스맨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두 번은 저 베스트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는 우승할 때 없다가, 저 들어오고 나서 신한은행이 우승 못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저 MVP 후보도 갔었잖아요!!!”
김단비는 신한은행의 주전 멤버에 처음 이름을 올렸던 2010-11시즌부터 내리 2년 연속 시즌 베스트5에 들었다. 본인 스스로 “그 당시가 내 선수 커리어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고 할 만큼 김단비는 WKBL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팀의 주축 멤버로 찬란한 시절을 함께했다.
“그때는 항상 이길 것 같았어요. 이겨야만 했고, 이길 수밖에 없었고, 이기도록 운동을 했어요. 이길 수밖에 없는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서 혹독한 훈련을 극단까지 했거든요. 언니들은 기능적으로 농구만 잘한 게 아니라, 이길 수밖에 없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어요. 코트에서도 그런 플레이를 했고요. 저는 단순히 멤버가 좋으면 자연스럽게 우승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여건들과 노력들이 다 맞아야 하는데 그 때는 우리 팀이 정말 그랬어요.”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선수에게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MVP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다. 김단비는 13년의 프로 생활 동안 5번의 우승과 함께 플레이오프 무대에 무려 9번(챔프전 6회)이나 올랐다. 득점상 3회, 리바운드상 2회, 스틸상 2회, 블록상 2회, 윤덕주상 1회를 수상했고, 시즌 베스트5로도 4번이나 선정됐다. 그러나 MVP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김단비는 2010-11시즌 챔피언결정전 당시 3경기에서 평균 19.0점 5.0리바운드 4.0어시스트 1.7블록 1.3스틸을 기록했다. 기록 면에서 가장 돋보였던 선수였다. 하지만 챔프전 MVP는 ‘WKBL 끝판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팀 선배 하은주(14.0점 7.7리바운드)의 몫이었다.
정규리그 MVP도 아쉽게 놓쳤다. 2016-17시즌, 김단비는 평균 35분 5초를 뛰며 14.7점 6.5리바운드 4.2어시스트 2.0스틸 1.4블록슛으로 전천후 활약을 펼쳤다. 득점-리바운드-스틸-블록슛 부문의 4관왕이었고, 어시스트도 2위에 올랐다. 기록 면에서 김단비에 견줄 선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팀 성적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신한은행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MVP는 통합 우승을 이어간 우리은행의 박혜진(13.5점 5.7리바운드 5.1어시스트 1.5스틸)이 차지했다.
2018-19시즌에도 김단비는 15.3점 6.3리바운드 5.9어시스트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지만, 팀에 창단 첫 우승을 안기며 압도적인 기록을 남긴 KB스타즈의 박지수(13.1점 11.1리바운드 3.0어시스트 1.7블록슛)에 막혔다.
2011-12시즌 우승 직후 김단비는 “MVP를 너무 일찍 받으면 목표가 사라질 것 같다. 지금 MVP를 받지 못했어도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다”며 “29살에 MVP를 받고, 30살에 결혼을 하며 화려하게 은퇴하겠다”고 너스레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정규리그 MVP를 놓쳤던 당시에는 속상하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이제는 MVP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어요. 내려놨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랑은 인연이 없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제 커리어에 MVP라는 단어도 들어간다면 정말 좋겠죠. 엄청난 영광이고요. 하지만 거기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하는 농구에 MVP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거든요.”

#3
통합 6연패는 신한은행의 찬란한 역사이자 김단비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시절’이다 그렇기에 “그 자랑스러운 역사에 나도 있었다는 걸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김단비가 자신의 이름이 살짝 잊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을 만큼 큰 의미를 두는 신한은행의 찬란한 역사는 과연 어땠을까?
오랜 농구팬이라면 누구나 다 기억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신한은행의 공식적인 역사는 2004년부터 시작이다. 신한은행은 1986년 창단된 현대 농구단을 인수해 2004년부터 신한은행 에스버드로 WKBL의 회원사가 됐다. WKBL 출범 후, 신한은행의 전신이었던 현대 하이페리온 농구단은 전주원의 원맨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2002여름리그를 우승하기도 했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강력한 위용을 자랑했던 삼성생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신한은행 시대’가 열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한은행의 이름을 처음 달고 출전한 2005겨울리그를 최하위로 마쳤지만 여름리그에서는 정규리그를 3위로 마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2위 KB를 잡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우리은행을 3경기 만에 완파하며 업셋 우승을 달성했다. 2006겨울리그와 여름리그도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2007겨울리그부터는 본격적인 신화창조에 나섰다.
신한은행은 이전 시즌 MVP였던 정선민을 FA시장에서 영입했고, 일본에서 한국무대로 돌아오는 ‘최장신 센터’ 하은주 쟁탈전에서도 승리했다. 최고 가드 전주원이 버티는 가운데 강력한 인사이드를 구축한 신한은행은 타미카 캐칭, 로렌 잭슨 등 역대급 외국인 선수가 즐비했던 상황에서도 태즈 맥윌리엄스가 국내 선수들과 건실한 조화를 이루며 2007겨울리그 통합챔피언에 오른다.
당시 신한은행의 중심이었던 전주원 우리은행 코치는 “정규리그 1위를 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캐칭이나 잭슨이 버티고 있는 우리은행, 삼성생명 중 누구를 만나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신세계를 만나 비교적 쉽게 챔프전에 올랐고, 우리은행과 삼성생명은 플레이오프에서 사투를 벌였다. 그렇게 접전을 펼치고 올라온 삼성생명과도 5차전까지 가서 이겼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되짚었다. 2007겨울리그는 WKBL 챔피언 결정전이 5차전까지 진행된 마지막 시즌이었다.
이후 WKBL은 큰 변화를 겪는다. 출범 후 꾸준히 여름리그와 겨울리그로 진행됐던 시즌이 단일리그로 통합됐다. 또한 외국인 선수 제도도 사라졌다. 그리고 신한은행의 독주가 시작됐다. 새롭게 팀을 맡은 임달식 감독을 중심으로 압도적인 높이와 화려한 선수 구성을 자랑한 신한은행은 리그 최강으로 군림했다.
전주원-정선민이 팀을 이끌었고, 하은주를 비롯해 강영숙, 선수민이 버티는 높이는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자리 잡은 진미정은 상대 에이스를 꽁꽁 묶었다. 최윤아, 이연화 등 젊은 선수들도 팀의 중심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정규리그를 압도적인 1위로 마친 신한은행은 플레이오프와 챔프전도 전승으로 마쳤다. 이듬해에는 김단비라는 원석을 발굴하는 데도 성공했다. 신한은행은 역대 최강의 전력을 구성했고, 역대 최고의 성적을 써내려갔다.
전주원, 정선민, 진미정, 선수민, 강영숙, 이연화, 최윤아, 김연주, 김단비로 이어진 화려한 면면은 ‘레알 신한은행’을 만들었다. 전주원-진미정의 은퇴와 정선민의 이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던 2012-13시즌에도 김단비의 성장 속에 정상을 지켜내며 한국 프로스포츠사상 최초의 통합 6연패를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신한은행은 171승 39패로 승률 0.814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 성적은 35승 4패(승률 0.897)였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사라진 단일리그 이후로는 30승 2패로 무려 포스트시즌 93.8%의 승률을 과시했다.
신한은행의 통합 6연패를 코치로 함께 한 후 우리은행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레알 신한은행’ 시절에 종언을 고하고 우리은행의 통합 6연패를 이끈 위성우 감독은 “당시 신한은행의 멤버가 WKBL 역대 최강의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베테랑과 신예의 조화, 공수의 조화, 안팎의 조화, 리더와 궂은일을 해주는 선수 등 정말 빈틈없이 구성되어 있었다”고 회상한다.
지금 신한은행을 이끌고 있는 정상일 감독은 당시 삼성생명의 코치였다. 삼성생명은 ‘레알 신한은행’과 우승 길목에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팀이다. 정상일 감독은 당시의 신한은행에 대해 “정말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 팀”이었다며, “신한은행을 한 번 이겨보려고 얼마나 밤잠을 못 자면서 연구했는지 모른다. 삼성생명도 선수 구성이 좋았던 때다. 하지만 도저히 신한은행을 넘을 수는 없었다”고 기억했다.

찬란했던 ‘레알 신한은행’의 역사는 외국인 선수제도가 부활한 2012-13시즌에 막을 내린다. 정규리그에서 우리은행과 24승 11패 동률을 기록했지만 상대전적에서 밀렸고,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생명에게 일격을 당하며 무너졌다.
김단비가 지적했던 것처럼 외국인 선수의 약점이 컸다. 신한은행은 타메라 영을 지목했지만, 외국인 선수 선발회가 끝난 뒤, 영은 부상을 이유로 팀에 합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신한은행은 캐서린 크라예펠드로 대체했지만 다른 팀 선수들의 기량에 미치지 못했다. 시즌 중 강영숙, 이연화까지 포함된 대형 트레이드를 진행하며, 외국인 선수를 에슐리 로빈슨으로 교체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레알 신한은행’의 문을 닫은 주인공은 우리은행이었다. 우리은행도 당초 선발했던 루스 라일 리가 개인 사정으로 합류할 수 없다고 하자, 신한은행보다 한발 빨리 움직였고 티나 탐슨을 영입했다. 결과적으로 캐서린과 티나라는 대체 외국인 선수 카드에서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의 명암이 엇갈렸다. 신한은행이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은 것과 달리 베테랑 티나 탐슨이 듬직한 에이스 역할을 수행한 우리은행은 국내 선수들이 성장하는 시너지 효과도 얻어내며 ‘레알 신한은행’의 역사를 잇는 ‘우리은행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4
신한은행이 통합 우승의 역사를 쌓아 나가는 동안, 신한 왕조를 이어갈 차세대 주인공으로 기대를 모았던 김단비는 신한은행의 부침이 길어지자 모든 비난의 최전선에 서야했다.
때로는 리더십이 도마에 올랐고,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책임감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이는 ‘김단비가 없으면 안된다’는 의미로 일부 팬들이 신한은행을 ‘단비은행’이라고 부른 것과는 상반된 평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김단비가 박혜진처럼 꾸준하게 열심히 했다면 WKBL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최고인 선수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곧 자신에게 집중하고 투자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프로에 와서 처음 느낀 감정은 막막하다는 거였어요. 어렸을 때는 시간이 지나면 프로에 가서 경기도 뛰고, 그러다가 국가대표도 되는 게 당연하다고 막연히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입단하자마자 ‘쉽지 않다’는 게 피부로 와 닿더라고요. 그때 신한은행은 학생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팀이었어요. 운동도 힘들고 잘하는 언니들도 많아서,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회를 잡기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로에 입단한 후에는 신한은행에 뽑힌 걸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어요.”
김단비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에 흔들렸던 것은 프로에서 첫 시즌을 보낸 후의 비시즌이었다. 숙소생활과 훈련이 힘들었고, 대학생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친구들의 자유로운 생활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김단비는 지금도 “내가 만약 농구를 그만뒀다면 바로 그 때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갈등과 유혹이 신한은행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 시기에 그 대단한 언니들, 그 코칭스태프와 함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선수로서 최고의 선배들이었고, 제 인생에서 가장 독한 코칭스태프였어요. 저 그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죠!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 없어요. 하지만 그 언니들과 그 코칭스태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당시 임달식 감독과 함께 김단비를 지도했던 우리은행의 위성우 감독(당시 코치)과 전주원 코치도 이러한 김단비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때 어린 선수들은 주로 위(성우) 감독님이 지도했었는데, (김)단비 별명이 리모컨이었어요. 잘 못하다가도 감독님이 뭐라고 지시하면 그걸 그대로 했거든요. 그래서 ‘위 코치님 리모컨’이라고 불렀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김단비가 누군지도 몰랐었는데, 프로에 와서 어릴 때 정말 열심히 해서 그렇게 올라선 거예요. 고생도 많이 했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전주원 코치)
“단비는 완성형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1순위 지명권을 가졌다면 (강)아정(KB)이를 뽑았을 거예요. 아정이는 그때 청소년대표로 세계대회에서 득점상도 받고 슈터로 완성된 선수였거든요. 단비는 운동능력이 좋은, 가능성 높은 선수였죠. 그런데 고등학교 때 농구부가 곧 해체 된다고 해서 운동도 많이 안했더라고요. 그 상태로 프로에 온 거죠. 그런데 막상 가르쳐보니까 정말 빨리 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열심히 했고 정말 빨리 성장했어요. 김단비는 제가 본 선수 중에 프로에 와서 가장 크게 발전하고 성장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위성우 감독)
어쩌면 김단비는 신한은행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동시에 WKBL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 수 있다. 김단비와 비슷한 또래의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 중 가장 인상적인 선수로 항상 김단비를 꼽았다. 그들은 김단비에 대해 ‘일본에는 없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일본 국가대표를 지낸 후지요시 사오리(전 샹송화장품)는 김단비에 대해 “학생 때나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프로에 온 뒤로 매년 무섭게 달라지고 있다”며, “김단비를 보면 프로가 역시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도 여자농구가 빨리 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이현수, WKBL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