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김선형. 2011년 중앙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그는 상대 팀의 소중한 작전타임을 빼앗는 선수였다. 190cm가 채 안 되는 루키 가드는 폭발적인 운동신경으로 무려 12번의 덩크슛을 시도해 모두 성공했다. 그의 손이 림에 닿을 때마다 상대 팀 벤치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바뀌니 적장은 타임을 부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Q1. 모처럼 비시즌 운동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다.

9년 만이다. 신인 때 딱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고 2년 차부터는 계 속 대표팀에 다녀왔다. 비시즌 훈련이 8주 정도면 보통 2~3주하고 대표팀에 차출됐다. 신인 때 이후 하도 오랜만이라 얼마나 힘든지 기억도 안 나서 만만히 봤다가 크게 데였다.(웃음) 지금도 너무 힘들다. 한편으로는 ‘내가 없는 동안 우리 팀 선수들이 매일 이렇게 열심 히 훈련하는구나’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 주장으로서 비시즌을 같이 하면서 팀을 이끌어야 하는데 맨날 빠졌다가 시작할 때야 돌아와서 했으니.

Q2. 지난 시즌 이맘때와 팀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음. 저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맘때 원래 대표팀에 있던 주축 선수들이 같이 훈련해 완전체 같은 느낌으로 뛰다 보니 확실히 팀워크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또 원래 선수들이 좋은 걸 같이 하는 것보다 안 좋은 거, 힘들 걸 같이 할 때 더 하나로 뭉쳐진다. 내게 이번 여름은 데뷔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비시즌이다.

Q3. 비시즌이 정말 길었다. 몸이 근질근질하진 않나?

죽겠다.(웃음) 그래서 이번 비시즌에는 스킬트레이닝도 많이 다니고 픽업게임도 많이 했다. 또 저번 시즌 끝나기 전에 손목 골절로 나가는 바람에 한 달 동안 몸을 만들다가 시즌이 조기 종료됐는데, 열심히 만든 몸을 픽업게임에서 다 썼다. (픽업게임 : 선수들끼리 자유롭게 팀을 짜서 치르는 경기. 심판도 없고 복장 역시 자유롭다.)

Q4. 픽업게임을 많이 치렀다. 프로선수들이 이렇게 픽업게임에 나가는 게 흔하지가 않은데.

하면서 또 느낀 게 많았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도 일종의 이벤트다. 코로나19로 팬들과 만나기가 어려운 가운데, 영상으로나마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니 좋더라. 원래 한 두 번 정도하고 끝낼 기획이었는데 선수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좋아 더 했다.

Q5. 최근 SNS에 덩크 영상도 올렸다. 올 시즌 덩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보실 수 있을 거다. 그 동안 내구성이 말썽이었는데, 올해 몸이 꽤 괜찮다. 3년 동안 쉬었더니 발목도 근질근질하고, 갈증도 꽤 크다. 어렸을 적 모습으로 돌아가겠다.

Q6. 덩크슛 기록을 보면 데뷔 시즌 12개, 그 다음 시즌 10개, 그 다음 시즌 4개로 줄더니 최근 3년은 0개였다. 덩크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는데.

몸 상태가 가장 큰 문제였다. 또 이제 다른 팀 선수들이 우리 팀 속공이 워낙 빠른 걸 아니까 속공을 저지하려고 한 명은 미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더라.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몸이 좋으니 수비가 그렇게 있다면 인유어페이스로 한 번 찍어보겠다.

Q7. 강병현을 앞에 두고 했던 인유어페이스 덩크 영상은 아직도 유튜브에 댓글이 달린다. 당시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애런) 헤인즈가 리바운드를 잡고 속공을 나갔다. 헤인즈에게 볼을 받으면서 앞을 봤는데, 한 명이 서 있더라. 그땐 누군지도 몰랐다. 근데 제가 다가가니까 수비가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더라. 아마 3점슛 라인에 그대로 있었으면 덩크는 못했을 거다. ‘이거다!’ 싶어서 본능적으로 뛰었다. 그렇게 점프를 뛰었는데, (강)병현이 형이랑 부딪치면서 몸이 더 떠졌다. 원래 부딪치면 중심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뭐랄까 잘 부딪쳤다고 할까? 잘 부딪치면서 몸이 공중에 더 떴다. 그렇게 뜨니 림이 확 보이길래 그냥 내리찍었다.(웃음) 성공하고 백코트하는데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정말 해본 사람만 알 거다. 그 기분은.

Q8. 인유어페이스 당시 서 있었던 강병현은 공교롭게도 중앙대 선배였다.

하하. 그땐 수비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 누가 있든 그 상황에서는 덩크를 했을 거다. 코트 위에서는 선배든 후배든 오직 팬들을 위해서 플레이하는 거니까.

Q9. 덩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은데 생애 첫 덩크는 언제였나?

아마 고등학교 3학년이 거의 끝날 때쯤 덩크를 시도했다. 그땐 멋있게 하지도 못했다. 작대기 덩크였다. 인 게임에서는 대학교 2학년 때 MBC배 결승인 동국대전에서 시도했다. 그때 3쿼터에 2~3점 정도 지고 있을 때였는데 실패했다. 실패하니 그때 우리 팀 감독님이었던 김상준 감독님이 웃으시더라. 감독님이 웃는 걸 보고 수비하러 갔는데, 그때 우리 수비가 프레스를 많이 붙는 수비여서 그 포제션에서 바로 스틸을 했다. 노마크 찬스가 났고 다시 덩크를 위해 점프를 뛰었다. 생애 첫 시도를 한 지 몇 초 만에 두 번째 시도를 했는데, 다행히 그땐 성공했다. 그게 첫 덩크슛이었다.

Q10. 루키 시즌이었던 2011-2012시즌, 14.9점 3.5어시스트 1.3스틸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 신인왕 후보 세 명의 득점을 합친 것보다 높은데도 당시 80표 중 7표에 그치며 수상에 실패했다.(당시 신인왕은 김선형의 중앙대 동기였던 오세근이 가져갔다)

그땐 워낙 (오)세근이 형의 임팩트가 컸다. 챔프전 MVP를 어떻게 이기겠나. 시상식 땐 ‘아, 1년 뒤에 나왔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좀 들었는데, 세근이 형의 활약이 워낙 멋져서 그냥 리스펙트했다.

 

Q11. 상대가 오세근이어서 더욱 특별했겠다.

맞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많이 아쉽고 분했을 거다. 하지만 세근이 형이니까. 오히려 세근이 형을 상대로 7표나 받은 게 기분 좋았다.

Q12. 김선형과 오세근. 지금까지 업적만 놓고 봤을 땐 농구선수로서 누가 더 위라고 생각하나?

세근이 형이 좀 더 위지 않을까? 근데 스타일이 다른 것 같다. 저는 하이라이트 필름이나 올스타전 같이 팬들이 좋아하는 플레이를 하는 타입이고, 우승이나 커리어는 세근이 형이 앞선다. 하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우승이나 커리어도 제가 뒤집어야 한다.

Q13. 그리고 2년 차 시즌. 신인왕을 놓치더니 MVP를 탔다.

문경은 감독님이 포지션을 2번에서 1번으로 바꿔 주신 게 신의 한수였다. 그 전까진 농구하면서 1번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프로에 와서 갑자기 1번? 생소했다. 오히려 하기 전에는 ‘그래. 하면 되지’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새치가 날 정도였다. 정말 봐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캐치할 것도 많더라. 예를 들어 우리 팀 선수들의 파울 개수나 슈터의 컨디션, 상대 5명 중 미스매치가 어느 곳인지, 상대 수비가 존인지 맨투맨인지 아니면 더블팀을 들어오는지 등... 이런 것들을 다 파악해서 또 나만 잘하는 게 아니고 팀원들에게 코트 위에서 전달해야 한다. 괜히 코트 위의 사령관이 아니더라. 그런데 하다 보니 그게 더 잘 맞았다. 제가 볼을 갖고 하는 플레이를 좋아해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결과는 달았다.

Q14. 만약 이때 포지션을 바꾸지 않고 계속 2번으로 뛰었다면 지금 김선형은 어땠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은 해본다. 대학 시절 김선형의 ‘닥공’ 모드를 보고 싶다는 팬분들도 있고. 그런데 요새 농구를 보면 르브론 제임스나 루카 돈치치 같이 재능 있는 선수들은 다 1번을 보지 않나? 그만큼 매력이 있다. 코트 비전이라는 것을 몰랐을 땐 그저 공격하는 것이 멋져 보일 수 있는데 농구를 알면 알수록 이 1번 자리에 더 욕심이 난다. 팀을 조율하고, 패턴을 부르고,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 매력이 정말 크다. 다만, 가끔 그리울 땐 있다. 대학교 때나 프로 1년 차 때 모습을 저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올 시즌은 아마 이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때에 따라 2번으로 뛰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Q15. 그러나 정규리그에서는 MVP를 수상했지만, 그해 플레이오프에서는 아쉬운 활약을 펼쳤다. 특히 챔프전 4경기에서 3점슛 8개를 던져 모두 실패했고, 야투율은 26.7%에 그쳤다. 이때 들었던 감정은?

그냥 원래대로 했으면 됐는데 플레이오프라는, 챔프전이라는 무대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떨리진 않았다. 그런데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 오버했다고 해야 할까? 뛰면서 계속 ‘여긴 플레이오프다.’, ‘여긴 챔프전이다.’ 이런 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경험 문제였는데, 이때 실패했던 경험이 5년 뒤에 우승으로 돌아왔다.

Q16. 이때부터 슛이 약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는데, 이후 14-15(34.6%), 15-16(45.8%)시즌에 3점슛 성공률이 수직상승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저도 슛이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수비도 제가 앞에 있으면 한 두 발 떨어지고, 때로는 대놓고 버리고 헬프를 가더라.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말 꾸준히 노력했다. 연습량을 늘리고, 미국에 가서도 슈팅코치 옆에서 계속 슛을 던지면서 코칭을 받고. 그전까지는 돌파만 해도 통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에 와보니 아니더라. 한계를 느껴보니 슛의 필요성을 느꼈다.

Q17. 슛이 가장 좋았던 15-16시즌에는 3점슛도 높았는데, 자유투도 82.8%로 데뷔 후 가장 높았다.

그땐 슛에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감독님께서 부담 주지 않고 틈만 나면 자신 있게 던지라고 계속 주문해주시니 저도 덩달아 자신감이 오르더라. 자유투는 신인 때부터 좀 안 좋은 편이어서 사실 자유투를 얻어도 실패할까봐 기분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 시즌에는 상대에게 자유투를 얻으면 그야말로 땡큐였다.

Q18. 다음 시즌인 16-17시즌은 15.1점 6.0어시스트로 볼륨이 가장 좋았던 시즌이었다. 이때가 농구가 가장 잘 됐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2년 차 때가 더 기억에 남는다. 이땐 팀 성적도 좋았던 터라 정말 재밌게 농구했다. 16-17시즌은 개인 기록은 정말 좋았는데, 진짜 힘들었다. 팀에 부상 선수들도 많았고, 외국선수도 교체가 있었다. 기록은 잘 나오긴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들었던 시즌이었다. 팀 성적도 그렇고.

Q19. 공교롭게도 본인이 커리어하이를 세운 시즌, 오세근이 또 MVP를 수상했다. 당시 SK는 7위였으니 많이 부럽기도 했겠다.

질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땐 신인왕 경쟁 때보다 더 리스펙트했다. 세근이 형이 하도 발목 때문에 몸 고생, 마음 고생 많이 한 걸 잘 알고 있었다. 형이 다시 MVP로 우뚝 선 걸 보니까 뭉클하더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Q20. 중앙대 시절, 오세근과 함께 뛰면서 이렇게 프로에서도 계속 경쟁할 것을 예상했었나?

이 정도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왜냐면 당시 세근이 형은 1학년, 2학년 때부터 대표팀에 나갔으니 나와는 급이 다른 선수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세근이 형을 보면서 더 많이 노력했었다. 같은 포지션은 아니지만, ‘나도 저렇게 되겠다’, ‘나도 꼭 대표팀에 가겠다’라고 주문을 걸면서 훈련했다. 만약 이때 세근이 형이 안 뽑히고 계속 팀에 같이 있었다면 나도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Q21. 대학 시절 오세근과 재밌는 일화는 없나? 함께 도망을 갔다거나.

하하. 저흰 도망간 적은 없다.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 건 세근이 형이랑 같은 방 쓸 때 둘이 운동을 마치고 저녁마다 맨날 치킨을 시켜먹었다. 세근이 형은 후라이드, 저는 양념. 각자 한 마리씩 시켜서 하루 있었던 농구 얘기하고, 이런 저런 얘기하고...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Q22. 그보다 더 어렸던 시절, 원래는 축구를 좋아했다고?

아, 축구. 진짜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어렸을 땐 축구 선수할 생각도 했다. 초등학교 때 동네 YMCA 축구단에 들어가서 주말마다 배우고 그랬다. 2년 정도 했었는데, 생각보다 흥미가 안 느껴지더라. 그래서 그만뒀다.

Q23. 달리기는 그때도 빨랐나?

학교에서 계주는 단골 손님이었다. 초등학교 때 시 대표로 육상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근데 나가보니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더라.(웃음) 학교에서는 분명히 제가 제일 빨랐는데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때 스파이크도 없이 맨발로 뛰었던 기억이 있다.

Q24. 그 정도면 어떤 운동을 해도 성공했을 텐데 굳이 농구를 선택한 이유는?

5학년 때 축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도 운동은 많이 했다.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농구도 공만 있으면 슛 던지고 놀았다. 그러던 6학년 어느 날, 집 앞 놀이터 농구 골대에서 혼자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슛이 잘 들어가는 날이었는데, 우연히 아빠가 그걸 보신 거다. ‘우리 아들이 소질이 있구나’ 싶어서 바로 농구부가 있는 중학교를 알아보셨다.(웃음) 그때 근처에 있던 명문이 송도중학교였다.

바로 아빠랑 바로 테스트를 보러 갔는데, 그때 제 키가 147cm로 작았다. 송도중 코치님께서 돌려보내려고 하다가 아빠가 180cm인 걸 보고 ‘얘는 크겠구나’ 싶어서 안 돌려보내셨다.(웃음) 그때 달리기, 점프, 1대1 세 가지를 테스트했다. 먼저 달리기는 저보다 한 살 위였던 형이랑 붙었는데 제가 쉽게 이겼다. 그 다음 점프. 점프는 골대 그물에도 안 닿아서 감점. 마지막으로 1대1. 제가 그때는 제대로 농구를 해본 적이 없어서 1대1을 아예 몰랐다. 아까 달리기했던 형이랑 1대1을 했는데, 그 형이 먼저 슛을 쏘더라. 그래서 ‘아, 슛을 쏘는 게 1대1이구나’하고 저도 슛만 쐈는데 그때 5개가 연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부터 바로 나오라고 하시더라. 아마 그때 엄마랑 갔으면 안 됐을 거다. 엄마 키가 150cm니까.(웃음)

Q25. 정재홍도 송도 출신이지 않나?

맞다. (정)재홍이 형이랑 나이 차가 있어서 같이 운동을 하진 않았는데, 지금이랑 똑같았다고 하더라. 장난기 많고, 다정하고.

Q26. 정재홍이 사망했을 당시 심정은 어땠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선수로서 슬픔도 컸을 텐데.

그때 저는 대표팀에 있었다. 나이지리아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경기 전부터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만 들면서 울기도 하고, 멍하니 있기도 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공항에서 바로 달려갔다. 그때야 실감이 좀 나더라. 많이 힘들었다.

Q27. 시즌 중에도 가끔 생각이 났나?

경기 전 유니폼 입을 때마다 생각이 났다. 팀이 매 경기 전 항상 재홍이 형을 위해서 묵념을 하고 뛰었다. 선수 전원이 모든 경기를 같이 뛴다는 생각으로 했다.

Q28. 다시 농구 얘기로 돌아가서. 대표팀 차출이 워낙 많았던 터라 정상급 선수들과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냈다. 김선형이 생각하는 리그에서 가장 승부욕이 강한 선수는 누구일까?

허웅이다. 보기에는 안 그래 보이는데 (허)웅이는 뭐 하나 지는 걸 못 참는다. 대표팀에서도 같이 방을 쓰면 정말 사소한 것도 이기려고 하는 그런 승부욕이 있다. 평소에는 어리바리하고 순한데도, 경기만 하면 보면 표정이 달라진다. 예전 대표팀에서 필리핀과 붙을 때 NBA 조던 클락슨이랑 매치할 때도 먼저 트래쉬 토킹을 하더라. 클락슨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너는 나를 못 막는다’고.(웃음) 대단한 애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승부욕이 강해도 저한텐 안 된다.

Q29. 대표팀에서 지금까지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를 꼽자면?

세근이 형이다. 세근이 형은 부상 때문에 몇 년 대표팀에 없다가 갑자기 들어와도 그냥 계속 있었던 일원 같다. 저희 팀 센터들도 리그에서 스크린이 정말 좋은 편인데, 세근이 형과는 아무래도 대학부터 워낙 많이 맞춰 오다 보니 투맨 게임을 하면 편한 게 있다. 제가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빠질지 그런 걸 다 아니까. 아, (이)정현이 형이랑도 잘 맞는다.

Q30. 이정현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 않나?

정현이 형과 저는 되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게 있다. 저는 1번인데 2번처럼 공격을 할 수 있고, 정현이 형은 2번인데 1번처럼 리딩을 할 수 있다. 서로 느낌을 아니까 공을 잡고 눈빛만 봐도 어떻게 움직일지 아는 게 있다.

 

Q31. 그렇다면 리그 최고의 드리블러는 누구일까?

은퇴했지만 (전)태풍이 형. 팬분들이 제 얘기도 해주시긴 하는데, 저는 드리블을 잘한다기보다는 앞에 있는 선수를 좀 잘 제치는 타입이고, 드리블은 태풍이 형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작년에 보니 말년에는 조금 약해졌더라. 정신이 방송 쪽에 팔려서 그런가.(웃음) 그래도 번뜩이는 클래스는 여전했다. 최근 형이 3대3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재밌게 보고 있다.

Q32. 리그 최고의 슈터는?

제 마음속 최고는 ‘조선의 슈터’ 조성민이다. 좋은 슈터는 지금도 많지만, 전성기 성민이 형은 슛의 기복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전)준범이? 준범이는 언제나 떨지 않는 게 장점이다.

Q33. 리그에서 가장 영리한 리바운더는 누구일까?

함지훈 선수. (함)지훈이 형은 뭐랄까... 정말 똑똑하게 리바운드를 잘 빼앗아간다. 가만히 보면 점프를 안 뛰고도 리바운드를 가져갈 때가 많다. 그만큼 박스아웃이나 농구 아이큐가 좋은 거다. 얄미울 정도다.

Q34. 리그 최고의 스크리너는?

(이)승현이다. 세근이 형의 스크린도 좋긴 한데, 승현이의 스크린은 정말 벽이다. 수비가 걸리면 절대 못 빠져나가게끔 걸어준다. 대표팀에 있을 땐 정말 든든한데, 리그에서 상대 팀으로 만나면 승현이가 스크린을 걸러 오면 두렵다.(웃음)

Q35. 최고의 패서는?

저한텐 (김)태술이 형. 태술이 형의 패스는 무회전으로 나간다. 고도가 높다가도 받는 사람 앞에서 뚝 떨어진다. 상대편으로 수비를 할 때, 태술이 형을 잠깐 안 보고 제 매치를 보고 있으면 패스가 어느 순간 제 뒤를 돌아 매치 앞에 도착해 있다. 반대로 같은 편에서 공격할 땐 눈 깜짝할 새 제 앞에 공이 들어와 있고. 그래서 태술이 형은 코트 위 9명을 모두 긴장하게 하는 선수다.

Q36. 최고의 수비수는 누구일까?

포지션별로 뽑자면 가드는 (신)명호 형이 최고였다. 명호 형은 손질을 진짜 잘한다. 되게 하드하게 압박을 하는데, 그게 파울이 안 불리는 선을 딱 지키면서 압박한다. 팔도 워낙 길어서 제일 뚫기 어려웠던 상대였다. 포워드에서는 (양)희종이 형. 희종이 형은 가드부터 센터까지 다 막을 수 있는 수비수니까. 센터에서는 승현이? 승현이는 자기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로도 수비를 진짜 잘한다. 대표팀에서도 훨씬 큰 선수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든든하다.

Q37. 은퇴 전 한 번쯤 꼭 함께 뛰어 보고 싶은 선수가 있다면?

저는 되게 많다. 요새 잘하는 (허)훈이도 그렇고 정현이 형, 세근이 형, 승현이, (김)종규... 누구랑 뛰어도 시너지가 잘 날 거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씩 다 뛰어 보고 싶다.

Q38. 그중에서도 한 명만 꼽자면?

그래도 세근이 형이다. 형이랑은 꼭 은퇴 전에 예전 대학 때처럼 신나게 뛰어 보고 싶은데... 둘 다 프랜차이즈 이미지가 워낙 강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웃음)

Q39. 2019년 1월 5일. 49점을 넣었다. 농구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였을까?

아무래도 그렇다. 그런데 사실 이날은 49점보다 너무 이기고픈 마음이 컸다. 그때 아마 팀이 9연패 중이었을 거다. 신인 때 이후로 9연패는 처음이었다. 이때는 정말 게임에 나가는 게 무서웠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게임은 원래 기다려져야 하는 건데...

Q40. 당시 1쿼터 4점, 2쿼터 6점으로 전반에는 단 10점에 그쳤다. 그 후 39점을 몰아쳤는데, 후반 맹활약한 이유가 있을까?

전반을 치르고 보니 상대였던 KT가 이날 2대2를 잘 못 막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 빅맨이었던 (마커스) 랜드리가 골밑 수비가 좋은 선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골밑을 공략해봤는데 그게 통했다. 점수가 어느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이더니 끝나고 보니 49점이었다.

 

Q41. 당시 매치는 누구였나?

(김)명진이랑 (최)성모였다. 근데 이날 속공 때를 제외하고 1대1로 제친 건 거의 없었다. 저희 빅맨들이 워낙 스크린을 잘 걸어줬다. 스크린 받고 나면 바로 랜드리만 보였을 정도로. 그러다보니 힘든 것도 모르고 계속 달렸다.

Q42. 3점슛은 3/7로 많이 던지지 않았다. 작정하고 돌파를 했는데 힘들지는 않았나?

경기 땐 힘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끝나고 보니 햄스트링이 좀 올라와 있더라. 이렇게 올라올 정도로 열심히 뛰었는데, 뛸 땐 하나도 몰랐다는 게 오히려 좀 무섭더라. 그 후로 보강 운동을 많이 했다.

Q43. 끝나고 문경은 감독님께서 하신 말씀은 없었나?

별다른 말씀 않고 수고했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연패를 끊은 것에 안도하셨다.

Q44. 앞으로 은퇴 전까지 이런 경기를 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전부터 우리 국내 선수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외국선수만 30점, 40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국내 선수들도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물론 외국선수한테 맡기는 게 대부분 확률이 높겠지만, 이렇게 국내 선수한테 맡기는 것도 때론 확률이 더 높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Q45.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프로아마최강전 때도 보면 국내 선수가 30점씩 넣고 그러지 않나. 그러다 다음 경기에서 또 누가 40점을 넣으면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 되는 거다. 이런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 기록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뉴스가 나오고, 굳이 억지로 라이벌 구도를 만들지 않아도 NBA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제가 그 49점을 넣었을 때도 그렇게 이슈가 되니까 기뻤다. 물론 같은 의미에서 이 기록도 빨리 깨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흥행이 될 테니.

 

Q46. 지금 리그에서 이 기록을 깬다면 누가 깰 수 있을까?

제가 깨겠다.

Q47. 인터뷰를 하다 보면 NBA를 많이 챙겨보는 것 같더라.

정말 좋아한다. 바쁠 땐 풀게임은 못 보더라도 하이라이트라도 다 챙겨보려고 한다. 요샌 댈러스의 루카 돈치치가 정말 잘하더라. NBA 2K를 하는 것처럼 농구하더라.

Q48. 좋아하는 선수는 누가 있나?

10대 땐 앨런 아이버슨이 좋았다. 그러다 20대 땐 스테픈 커리가 좋았다. 지금은 (카이리) 어빙을 좋아한다.

Q49. 어빙을 좋아하는 이유는?

약점이 없다. 돌파가 극강인데, 슛까지 좋으니까. 팬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하면서도 실속까지 챙기지 않나. 보면서 느낀 게 많다. 그래서 저도 이번 시즌 슛을 더 많이 던지려고 한다. 제가 작년에 3점슛이 34%였는데, 성공률에 비해 시도(경기당 2.8개)가 너무 적었다. 수비들도 제가 안 쏘는 걸 알고 라인 뒤에서 느슨하게 수비하더라. 올 시즌에는 슛 비중을 많이 늘리려고 한다.

Q50. 은퇴할 땐 어떤 선수이고 싶나?

레전드가 되고 싶은 건 누구나 당연한 거고. 그보다도 저는 훗날 농구가 인기를 되찾거든, 그때 농구 부흥에 선두주자였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농구 인기를 살리기 위해, 팬들을 위해 노력했던 선수로 남고 싶다. 농구적으로는 매년 성장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내년에는 이 선수가 또 어떻게 성장해 나올까?’, ‘올해는 슛을 장착해서 나왔는데 내년에는 또 뭐를 달고 나올까?’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은퇴할 때까지 매년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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