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빈스 카터가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6월 26일 출연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빈스 카터는 농구선수의 커리어를 마감한다고 직접 발표했다. 이로써 1998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카터의 22년 커리어에 마침표가 찍혔다. 리그에 충격을 안겨준 에어캐나다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30대와 40대까지. 빈스 카터의 지난 22년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1998-2004: 에어 캐나다, 그리고 티맥

빈스 카터는 199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됐다. 

명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의 카터는 이전 시즌에 올-ACC 컨퍼런스 퍼스트 팀에 입성하는 등 주가가 잔뜩 올라 있었던 상황. 대학 동기였던 앤트완 제이미슨이 4순위로 토론토에 지명된 후 곧바로 자신의 이름도 골든스테이트에 의해 호명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카터와 제이미슨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골든스테이트와 토론토가 트레이드로 둘을 맞바꾼 것이다.

당시 토론토는 창단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팀이었다. 성적은 당연히 바닥을 기었고 추운 날씨 때문에 선수들은 토론토 유니폼을 입는 것을 기피했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마커스 캠비,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앞선 드래프트를 통해 차례로 입단했으나 스타더마이어와 캠비는 트레이드됐으며 고졸 유망주 맥그레이디는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전이었다. 신인이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쉽지 않은 환경이었고 팀 입장에서도 힘든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5-1996시즌 창단 특수를 뒤로 하고 매 시즌 홈 관중 수가 급감하고 있던 토론토는(약 95만 명→74만 명→64만 명) 1998-1999시즌을 반전의 시즌으로 만든다. 단축 시즌으로 50경기밖에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약 44만 명의 홈 관중을 불러모으며 신축구장 에어 캐나다 센터의 개장 시즌을 멋지게 치러낸 것이다.

그 중심에는 빈스 카터가 있었다.

카터의 폭발적이고 화려한 덩크는 팬들을 매료시켰고, 점점 끊기던 토론토 팬들의 발길을 다시 경기장으로 끌어당겼다. 루키 시즌에 평균 18.3점 5.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상까지 수상한 카터는 스타성과 실력을 겸비한 캐나다의 새로운 농구 스타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슬램덩크 콘테스트를 통해 순식간에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실속도 확실히 챙겼다. 1999-2000시즌 카터는 평균 25.7점 5.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고 올-NBA 팀에도 입성한다. 확고부동한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에서 알아주는 슈팅가드였다. 토론토는 물론이고 NBA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에어 캐나다’의 전성기에 토론토가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점.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 동부 준결승에 진출해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를 7차전까지 물고 늘어진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 외에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고배를 마시거나 플레이오프 무대조차 밟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00년 여름 FA 시장에서 유망주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맥그레이디가 올랜도로 이적하며 카터와 맥그레이디의 동행은 두 시즌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맥그레이디와 카터는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지간이었다. 이 사실을 카터가 토론토에 입단하기 전부터 둘은 알고 있었고, 실제로 토론토에서 함께 지낸 두 시즌 동안 맥그레이디와 카터는 무척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하지만 당시 카터에게 유난히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탓에 맥그레이디가 자신의 스타성과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가 적었다. 토론토 구단 역시 카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맥그레이디 입장에서는 환경을 바꿀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실제로 올랜도 이적 후 맥그레이디는 엄청난 스타로 성장했다. 이적 첫 시즌에 평균 26.8점 7.5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활약은 갈수록 좋아졌고 2002-2003시즌과 2003-2004시즌에는 리그 득점왕도 차지했다.

만약 카터-맥그레이디 콤비가 유지됐다면 토론토는 엄청나게 강력한 원투 펀치를 보유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훗날 카터는 맥그레이디와 함께 콤비로 계속 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콤비를 이뤘더라도 그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같이 뛰었으면 어땠을지에 대해) 맥그레이디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와 맥그레이디가 계속 함께 했다면 정말 어땠을까. 솔직히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맥그레이디와 함께 뛰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훗날에 코트에서 경쟁자로 만났을 때 서로를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었다.”

 

2004-2009: 갈등, 트레이드 그리고 뉴저지

2001년부터 카터는 부상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무릎과 아킬레스건이 좋지 못했고 점점 결장이 늘어났다. 2001-2002시즌에 22경기, 2002-2003시즌에 39경기를 뛰지 못했다. 에이스가 코트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자 토론토의 성적은 덩달아 추락했다. 

2003-2004시즌을 33승 49패라는 형편없는 성적으로 마치자 토론토 구단 수뇌부는 글렌 그룬왈드 단장과 케빈 오닐 감독을 포함한 코칭스태프 전원을 해고하고 새판 짜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수뇌부의 과격한 행보에 상처받은 카터는 구단에 불만을 드러내는 한편 부상 회복에 집중했는데, 이것이 언론을 통해 마치 고의로 훈련에 불참하고 경기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잘못 전해지면서 토론토 팬과 카터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달았다.

“팀의 행보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토론토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훗날 빈스 카터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비춰진 카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특히 토론토 팬들에게는 최악의 악당이었다.

2004-2005시즌 중 빈스 카터는 결국 뉴저지(현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된다. 이후 카터에게 에어 캐나다 센터는 더 이상 따뜻한 홈이 아니었다. 2014년 멤피스 소속으로 토론토를 방문해 팬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을 때까지 카터는 토론토를 찾을 때마다 엄청난 야유를 들었다. 토론토 팬들의 야유에 적응하는 데에만 3-4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오해가 빚어낸 갈등을 해소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카터의 어머니에 따르면 본인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카터가 받은 상처가 무척 컸다고 한다.

 

뉴저지에서 카터는 제이슨 키드, 리차드 제퍼슨과 트리오를 이뤘다. 탁월한 포인트가드, 슈팅가드, 스몰포워드의 만남이었다. 최근 리차드 제퍼슨은 키드와 카터의 만남에 대해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였던 키드가 카터를 다시 젊게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카터 역시 이 말에 동의했다.

“제퍼슨의 말에 100% 동의한다. 제이슨 키드 같은 가드와 함께 뛰는 선수는 오픈 기회를 찾아다니고 볼을 받아서 득점을 올릴 준비만 하면 된다. 볼이 언제든지 필요한 순간에 손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함께 뛴 다른 포인트가드들도 뛰어났지만, 키드는 다른 차원에 있는 포인트가드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주류 농구 트렌드는 지금과 달랐다. 아웃사이드보다는 인사이드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화려한 외곽 라인업을 구축한 대신 빅맨진은 불안했던 뉴저지는 늘 한계에 부딪혔다. 2005년과 2007년에 동부지구 준결승에 진출한 것이 최대 성과였다. 정규시즌 승수도 50승을 넘은 적이 없었다.

2008년에 제이슨 키드가 댈러스로, 리차드 제퍼슨이 밀워키로 차례로 트레이드되면서 키드-카터-제퍼슨으로 구성된 뉴저지 트리오는 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카터도 2009년 6월에 올랜도로 트레이드됐다. 이때부터는 카터는 베테랑으로서 여러 팀의 유니폼을 입는다.

 

2009-2020: 빈스 카터에게 우승이란

2009년 올랜도로 트레이드되던 순간부터 2020년 애틀랜타 소속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까지 카터는 유니폼을 무척 자주 갈아입었다. 11년 동안 머문 팀만 6개에 달한다. 올랜도(2009-2010), 피닉스(2010-2011), 댈러스(2011-2014), 멤피스(2014-2017), 새크라멘토(2017-2018), 애틀랜타(2018-2020)를 거쳤다. ‘저니맨’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중 우승 후보는 없었다는 점. 카터는 10년 넘게 여러 팀을 옮겨 다녔지만, 우승 후보 팀에 합류한 적은 없었다.

카터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카터의 명성, 리더십이라면 본인이 의사만 있었다면 우승 후보 팀에 얼마든지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승 반지도 한 두 개 정도 가진 채 은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카터는 자신만의 확실한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카터는 우승 팀에서 출전 기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씁쓸한 늙은 선수(A bitter old man)”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꾸준히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에서 젊은 선수의 멘토 역할을 하는 것을 원했다.

“내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선수들과 코트에서 경쟁하고 경기에 뛸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늘 코트에 나가서 경기에 뛰고 싶었다. 누군가로부터 ‘카터가 지금은 몇 살이지? 아직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게 내 마음 속에선 우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승 팀의 벤치 끝에 앉아서 경기에 뛰지 못하는 선수가 되고 싶진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훌륭한 커리어였다.”

 

애틀랜타에서 보낸 마지막 2년 동안 카터는 유망주들의 멘토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존 콜린스가 3점슛을 장착한 데에는 카터의 코칭이 큰 도움이 됐다. 올 시즌 신인 캠 레디쉬 역시 카터의 조언을 받아 슈팅을 교정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레디쉬는 후반기 들어 3점슛 성공률이 40%를 상회했다.

트레이 영은 자기 관리와 슈퍼스타가 가져야 할 마인드를 카터에게 배웠다고 했다.

“카터가 많은 걸 가르쳐줬다. 프로선수로서 몸을 관리하는 법, 코트 밖에서 똑똑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식습관도 영향을 받았다. 카터는 정말 좋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그런 카터를 옆에서 직접 지켜보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카터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 동료 모두와 구단 전체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많은 선수가 NBA에서 오래 살아남기를 꿈꾼다. 하지만 실제로 카터처럼 계속 NBA 코트를 누빌 기회를 얻는 선수는 극소수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트레이드되거나 방출되며 NBA 커리어를 마감한다. 직접 은퇴를 선언할 기회를 얻는 선수조차 흔치 않다. 카터의 커리어 마무리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카터는 43살이 될 때까지 NBA에서 꾸준히 살아남으며 직접 은퇴를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배의 모범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인성과 자기 관리 능력 덕분이다. 만약 카터가 그저 농구만 꽤 잘하는 노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카터의 커리어는 훨씬 더 일찍 끝났을 것이다. 43살 노장보다 농구를 잘하고 잠재력이 풍부한 선수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데뷔 초창기 카터는 높이 점프하고 화끈한 덩크를 꽂는 슈퍼 스타였다. 요즘 말로 ‘화려한 조명’이 카터를 감싸던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 토론토를 떠나는 과정에서 ‘태업 논란’이 불거지며 게으르고 인성이 좋지 못하다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하지만 NBA 역사상 가장 긴 22년의 커리어를 마감하는 지금, 카터에 대한 동료와 팬들의 인식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카터는 화려함에 도취돼 자신을 방치한 선수가 아니었다. 우승만 쫓아다닌 선수도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농구를 사랑했던 모범생이자 훌륭한 멘토였다.

빈스 카터의 22년은 그 증거물이었다.

 

+AND ONE: 빈스 카터가 22년을 뛸 수 있었던 비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22년의 커리어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농구선수의 생명은 짧다. 30대 초반이 지나면 뚜렷한 하향 곡선이 그려진다. 40대까지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빈스 카터도 마찬가지였다.

카터가 40대까지 NBA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충분한 수면과 식단 관리였다.

‘디 애슬래틱’의 애틀랜타 담당 기자 크리스 커슈너는 “카터는 만약 10시간을 잘 수 있다면 기꺼이 10시간을 잤을 것”이라며 카터의 많은 수면 시간에 대해 설명했다. 

카터는 30대에 접어둔 후 매일 밤 8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하려고 신경 썼다. 나이가 많은 만큼 몸이 회복할 수면 시간을 충분히 가져가는 데 집중했다. 카터는 수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경기 전날 늦은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거나 지인의 집에 놀러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엔 스트레칭도 빼먹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손끝을 발끝에 붙이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비롯해 다리와 골반도 충분히 풀어준 후 침대로 향했다. 토론토 시절 델 커리(스테픈 커리의 아버지)가 젊은 카터에게 알려준 습관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엔 낮잠을 반드시 잤다. 오전 팀 훈련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수면을 취했다. 팀 훈련이 없는 경우에는 낮잠을 더 자는 대신 반려견과 산책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식단 관리도 철저했다. 햄버거를 먹을 때는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 대신 건강한 식재료를 쓰는 수제버거 가게를 찾아갔다. 그 와중에도 번(햄버거 빵)은 절대 먹지 않았다. 빵 사이에 있는 패티와 채소만 따로 빼서 먹었다.

탄산 음료는 아예 끊었고 설탕이 잔뜩 발린 도넛 빵을 먹는 일도 거의 없었다. 혹여나 먹게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곧바로 물을 많이 마셨다. 라커룸에서 간식을 먹는 동료가 있으면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났다. 불필요한 정제 탄수화물을 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레드벨벳 케이크와 쿠키는 카터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하지만 농구를 위해 먹는 것을 최대한 참았다.

카터는 “내가 20년이 넘게 NBA에서 뛸 수 있었던 비결은 오랫동안 선수로 존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이라고 했다.

카터는 원칙과 그것을 지키는 정신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비결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사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알고 그것을 꾸준히 실천해나가는 정신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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