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한국 시간으로 지난 5월 23일, 농구계에 큰 비보가 전해졌다. 유타 재즈의 제리 슬로언 전 감독이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 오랜 시간 동안 파킨슨병, 루이체 치매와 싸워온 슬로언은 결국 코트에 남겨둔 자신의 업적을 뒤로 하고 별이 되고 말았다. 제리 슬로언의 삶과 커리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원조 황소(the Original Bull)

NBA 역사상 한 팀에서 2개의 번호가 영구결번된 인물은 단 한 명.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던 故 코비 브라이언트뿐이다. 코비는 선수 시절 달았던 8번과 24번이 모두 레이커스에서 영구결번됐다. 코비였기에 만들 수 있었던 특별한 사례였다.

선수로서 2개 이상의 팀에서 각각 다른 등번호가 영구결번된 일은 이전에 종종 있었다. 오스카 로버트슨(밀워키 1번, 새크라멘토 14번), 얼 먼로(워싱턴 10번, 뉴욕 15번), 피트 마라비치(유타 7번, 애틀랜타 44번), 줄리어스 어빙(필라델피아 6번, 뉴저지 32번), 샤킬 오닐(레이커스 34번, 마이애미 32번)이 그랬다.

하지만 선수로서 1개, 감독으로서 1개의 번호가 각각 다른 팀에서 영구결번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리 슬로언은 그 중 한 명이었다.

슬로언은 시카고 불스에서 4번, 유타 재즈에서 1223번이 영구결번됐다. 시카고에서는 선수로, 유타에서는 감독으로 영구결번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명장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일까? 슬로언 선수로서 쌓은 커리어에 주목하는 이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1965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지명되며 NBA에 입성한 슬로언은 이듬해인 1966년 리그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시카고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이후 그는 10년을 불스 선수로 뛰었는데, 이 기간 동안 2번의 올스타, 6번의 올-NBA 디펜시브 팀(퍼스트만 4번이었다)을 경험했다.

사실 슬로언은 당대 기준으로 공격력이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다. 커리어 평균 득점이 14.0점이었고 최전성기에도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코트에서 슬로언이 보여주는 수비력과 승부욕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196cm의 신장에 긴 팔과 단단한 몸을 가진 그는 타고난 터프가이이자 강력한 수비수였다.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피트 마라비치까지 코트에서 괴롭힐 정도였으니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멋진 별명도 하나 있었다. 원조 황소(the Origianal Bull)였다. 저돌적인 수비였던 슬로언의 플레이스타일에 딱 맞는 닉네임이었다.

시카고 시절 슬로언과 함께 코트를 누볐던 밥 웨이스는 선수 시절의 슬로언에 대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였다”라고 되돌아봤다.

“슬로언은 내면에 성공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자리 잡고 있는 친구였다. 처음 팀에 왔을 때부터 슬로언은 훈련에 엄청난 열정을 보이며 모든 것을 해내곤 했다. 코트에 함께 있을 때는 정말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였다.”

“슬로언의 경쟁심은 마이클 조던 이상이었다. 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냉정히 말해 슬로언은 대단한 공격 기술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슈터였고 슛을 던지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당시 상대 팀 선수들 중에 우리 팀과 경기를 치르기 전날이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수비수 슬로언과 맞대결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슬로언은 하프라인 너머까지 나서서 작은 공간도 주지 않고 상대 선수를 압박 수비하곤 했다. NBA 역사상 코트에 뒹굴며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는 최초의 선수는 슬로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트에서 모든 것을 불사르는 투쟁심이 독이 된 것일까? 슬로언의 커리어는 11년 만에 끝이 났다. 잇따른 두 번의 무릎 부상에 특유의 저돌성을 잃어버린 슬로언은 결국 1975-1976시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통산 1만 571득점, 5,615리바운드 1,925어시스트를 남긴 채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2년 후 시카고 구단은 슬로언의 등번호 4번을 영구결번한다. 시카고 불스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이었다.

 

불같은 성격의 초보 감독

은퇴 후 슬로언은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1978년에 시카고의 어시스턴트 코치가 된 슬로언은 1년 후인 1979년에 곧바로 시카고의 감독이 됐다. 초유의 고속 승진을 경험한 것이다.

시카고의 레전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NBA엔 구단의 레전드 출신 선수가 감독까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슬로언 역시 여기에 해당됐다. ‘원조 황소(the Original Bull)’만이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시카고에 있는 동안 슬로언의 지도자 커리어는 잘 풀리지 않았다. 세 시즌을 다 채우지 못하고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 기간 동안 시카고는 94승 121패에 그치는 불안한 행보를 보였다.

많지 않은 지도자 경험으로 인한 준비 부족도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슬로언을 잘 아는 주변인들은 다른 문제를 이유로 꼽았다. 강한 경쟁심과 불같은 성격이었다.

선수 시절만 해도 슬로언의 이런 성격은 최고의 장점이었다. 원조 황소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지도자가 된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감독은 선수단 전체와 코칭스태프를 통솔하는 리더다. 때론 냉정하고 침착하게 팀을 이끌 필요가 있었다. 선수 시절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슬로언은 감독이 된 후 심판 앞에서 크게 흥분하며 항의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고(유타 감독이 된 후에도 이 모습은 유지됐지만), 너무 강한 승부욕 때문에 선수들과 건전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생각보다 무척 빨리 찾아온 감독직 제안과 실패의 경험은 슬로언에게 큰 깨달음을 남겼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시카고에서 경질된 후 잠시 농구를 멀리 했던 슬로언은 유타 재즈의 스카우터가 되어 NBA에 돌아왔다. 1년 뒤인 1985년 유타의 어시스턴트 코치가 된 슬로언은 프랭크 레이든 감독 밑에서 충실히 지도자 공부를 이어가며 기초를 탄탄히 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 슬로언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유타 선수들도 그에게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먼저 슬로언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났다. 1988년 레이든이 구단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슬로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유타의 신임 감독직을 제안 받은 것이다.

 

23, 15, 1223

4년 동안 스카우트, 어시스턴트 코치 생활을 통해 내공을 다시 쌓은 슬로언. 유타의 감독이 된 후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슬로언은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는 지도자였다.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길 요구하면서 자신도 농구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경기를 준비하곤 했다는 후문이다. 슬로언의 승부욕과 솔선수범은 유타 선수단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타의 선수 인사과 디렉터인 데이브 프레드맨은 슬로언에 대해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내가 슬로언을 존경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라고 되돌아봤다.

“슬로언은 팀에 있는 모든 이에게 각자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도자로서 훌륭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경기 준비와 코칭에 쏟아 부었다. 좋은 지도자가 되려고 했던 동시에 좋은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코치들이 자신에게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농구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솔선수범을 통해 팀을 이끌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슬로언과 함께 유타에서 선수, 지도자 생활을 했던 타이론 코빈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슬로언 감독님은 정말 꾸준한 사람이었다. 매일 같이 훈련장에 나타나 선수들이 자신의 최대치를 쏟아 붓길 요구했다. 동시에 본인도 자신이 가진 최대치를 농구에 쏟아 부었다. 그런 모습을 본 선수들은 당연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농구를 대했기 때문일까? 유타에서 그의 지도자 커리어도 비슷하게 그려졌다.

슬로언은 2011년 사임 이전까지 23년을 오직 유타에서만 보냈다. 이 기간 동안 팀을 15년 연속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으며, NBA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를 합쳐 1,000승 이상을 챙긴 지도자가 됐다. 이 기간 동안 유타는 50승 이상을 챙긴 시즌만 10차례를 보냈으며 1997년과 1998년에는 파이널에 진출하며 우승 트로피에 다가서기도 했다. 디비전 우승도 6번 차지했다. 유타 재즈가 곧 제리 슬로언이었으며, 제리 슬로언이 곧 유타 재즈였다.

 

위대한 콤비들도 탄생시켰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존 스탁턴-칼 말론과 함께 했다. 그 뒤를 받쳤던 제프 호나섹, 브라이언 러셀, 그렉 오스터택 등도 슬로언의 지도 속에서 좋은 선수가 됐다. 2000년대에는 데런 윌리엄스-카를로스 부저와 함께 했다. 안드레이 키릴렌코, 폴 밀샙, 맷 하프링, 메멧 오쿠어도 슬로언의 작품이었다.

2011년 데런 윌리엄스 트레이드를 통해 유타 유니폼을 입었던 데릭 페이버스는 “주변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전설적인 감독이 가지는 존재감과 영향력이 느껴졌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사실 슬로언은 윌리엄스 트레이드가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유타 감독직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페이버스는 슬로언 감독 밑에서 뛰어본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슬로언은 유타 구단의 고문직을 맡으며 유타의 농구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 페이버스는 그 영향력을 언급한 것이다.

“슬로언 감독님이 만들어 놓은 문화가 여전히 구단 전체에 남아 있었다. 강인함, 수비 마인드 같은 것들 모두가 슬로언 감독님이 만든 것이었다. 처음 유타에 트레이드됐을 때 슬로언 감독님이 라커룸으로 와서 인사를 건네시더니 같이 대화를 나누자고 하시더라. 그분 주변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전설적인 감독이 가지는 존재감과 영향력이 느껴졌다. 슬로언 감독님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페이버스의 회상이다.

2014년 유타는 등번호 1223번을 영구결번했다. 슬로언이 유타에서 보낸 23년 동안 쌓은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승수를 모두 합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슬로언은 구단 고문으로서 선수 영입, 드래프트 지명 등에 의견을 보태며 유타가 다시 강호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제리 슬로언은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유타 재즈 그 자체였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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