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데니스 로드맨은 NBA 역사에 손꼽히는 리바운더다. 동시에 그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이기도 했다. 거칠고 끈적한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벌레(The Worm)’라는 별명도 얻었다.

로드맨은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꼽힌다. 동시에 그는 기괴한 행동을 많이 했던 독특한 정신세계의 셀럽이었다. 지금부터 거칠고 끈적했던 데니스 로드맨의 커리어를 간략하게 되짚어보자.

 

야간 경비원의 불우한 유년기

뉴저지에서 태어난 로드맨은 5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많은 부인이 있었고 로드맨은 부인들이 낳은 수많은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로드맨에 따르면 그에겐 무려 46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자신이 가장 맏이였다고 한다. 출생부터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탓일까? 로드맨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정을 전혀 가지지 않고 성장했다. 1996년에 출판한 자서전에서 로드맨은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30년 넘게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를 그리워할 이유가 없다. 지금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한 남자가 나를 이 세상에 데리고 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를 내 아버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어머니는 있었지만 로드맨은 꽤 많은 것이 결핍된 유년기를 보냈다. 로드맨의 어머니는 그의 두 친누나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친누나들이 로드맨보다 농구에서 더 큰 재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교 시절까지 로드맨은 농구에 소질이 있는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키가 너무 작았다. 168cm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심지어 볼을 잘 다루거나 슛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로드맨에 따르면 아주 쉬운 레이업 슛조차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로드맨은 팀이 경기가 있어도 주로 벤치를 지키거나 로스터에서 제외되곤 했다.  명백히 형편없는 운동선수였다. 심지어 학교 풋볼 팀에서도 로드맨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로드맨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농구부 명단에도 간신히 이름을 올리는 로드맨에게 장학금을 제안하는 대학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농구에 한해서는 지극히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고교 졸업 후 로드맨은 댈러스 포스 워스 국제 공항에 취직한다. 로드맨의 직업은 야간 경비원이었다.

 

뜻밖의 폭풍 성장, 그리고 NBA행

하지만 로드맨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갑자기 키가 커버린 것이다.

고교 졸업 당시 로드맨의 키는 180cm였다. 168cm에서 꽤 자랐지만 농구를 하기엔 여전히 작았다. 그런데 공항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 갑자기 201cm로 키가 한 번 더 ‘폭풍 성장’한다. 농구를 충분히 해볼 만한 키가 된 것이다.

결국 로드맨은 다시 꿈에 도전한다. 농구공을 다시 잡은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텍사스의 한 무명 대학 농구부를 소개받아 입학했고 첫 학기 시즌에 평균 17.6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후 성적 문제로 NAIA의 사우스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로 전학한 로드맨은 그곳에서 올-아메리칸 팀에 세 차례 선정되고 리바운드왕을 두 차례 차지하면서 농구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사우스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에서 보낸 세 시즌 동안 로드맨의 평균 기록은 무려 25.7점 15.7리바운드였다.

하지만 무명 리그의 무명 대학에서 뛰는 로드맨이 당장 NBA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을 더 많이 알리는 기회가 필요했다.

결국 로드맨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포츠머스 인비테이셔널 토너먼트에 참가하고, 이 대회에서 MVP를 받으며 운명처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주목을 받았다. 이 대회는 NBA 진출을 꿈꾸는 무명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표적인 이벤트였다. 로드맨은 인비테이셔널 대회에서 거둔 성과를 앞세워 1986년 NBA 드래프트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2라운드 전체 27순위로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척 데일리 감독의 지도 아래 아이재아 토마스, 빌 레임비어 등을 앞세워 점점 성장해가던 젊은 팀이었다. 루키 시즌을 빌 레임비어, 릭 마혼, 존 셀리 등과 함께 보낸 로드맨은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점점 ‘배드 보이즈’ 디트로이트의 일원으로 성장을 이어갔다. 로드맨의 농구 인생에 본격적으로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수비, 리바운드 그리고 배드보이즈

NBA에 입성에 성공했지만 로드맨은 여전히 팀 내 입지가 무척 좁았다. 공격력은 형편없었고 빅맨으로서 키도 크지 않은 2라운드 신인에 불과했다. 언제 트레이드되거나 방출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로드맨이 선택한 생존법은 다른 선수들이 기피하거나 차선으로 두는 플레이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바로 수비와 리바운드였다.

특히 릭 마혼, 빌 레임비어와 함께 커리어 초창기를 보낸 것은 로드맨에게 큰 영향을 줬다. 거친 몸싸움과 상대 선수를 위협하는 행위를 일삼았던 마혼과 레임비어의 가르침을 받으며 로드맨 역시 ‘돌격 대장’의 면모를 키워갔다. 끈적한 수비로 상대 팀 선수들을 봉쇄해버리고 거친 몸싸움을 펼쳤으며 공이 있으면 기꺼이 몸을 던졌다.

이런 로드맨의 모습을 척 데일리 감독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는 후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없이 성장했던 로드맨도 척 데일리 감독을 아버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따랐다.

소포모어 시즌부터 로드맨은 평균 25분 이상 코트를 누비는 디트로이트의 핵심 식스맨으로 거듭났다. 엄청난 수비력을 앞세워 상대 선수들을 꽁꽁 묶곤 했다. ‘디 애슬레틱’의 데이비드 알드리지 기자는 당시 로드맨의 수비력을 회상하며 “이후로도 그런 수비력을 보여주는 파워포워드는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결국 로드맨은 1990년과 1991년에 연이어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며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디트로이트는 아이재아 토마스, 조 듀마스 백코트 듀오의 활약과 로드맨, 빌 레임비어 등의 피지컬한 수비를 앞세워 1989년과 1990년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로드맨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디트로이트가 3년 연속 시카고를 플레이오프에서 직접 탈락시킬 때 ‘조던 룰’을 실행으로 옮긴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를 보면 다른 팀도 아닌 시카고가 ‘배드보이즈’의 데니스 로드맨을 영입하고 마이클 조던조차 이를 받아들인 것이 신기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 두 팀의 관계와 로드맨의 역할을 생각하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90-1991시즌 대부분의 경기에 선발 출전한 로드맨은 평균 8.2점 12.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바운더로서의 재능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1-1992시즌에는 82경기에서 평균 9.8점 18.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바운드 전체 리그 1위에 올랐다. 이 시즌에 로드맨이 기록한 총 리바운드 개수는 1,530개. 이는 1971-1972시즌에 윌트 체임벌린이 기록한 1,572개에 이어 리그 역대 2위 기록이었다.

이후 로드맨은 리바운드에서 독보적인 선수로 거듭났고 그 면모는 시카고 시절까지 이어졌다. 1991-1992시즌부터 1997-1998시즌까지 로드맨은 7년 연속 리그 리바운드 1위에 올랐으며, 이 기간 중 올-NBA 디펜시브 팀에 수차례 선정되고 올-NBA 팀에 두 번 이름을 올리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절 로드맨은 수비와 리바운드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선수였다.

 

악동, 불스 왕조를 만나다

1992년 로드맨의 인생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척 데일리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디트로이트 감독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믿고 따랐던 지도자의 사퇴에도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려 다음 시즌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성격이 순수했던 로드맨은 이 사건에 큰 상처를 받았다. 누구보다 척 데일리 감독을 좋아했던 로드맨은 시즌을 앞두고 열린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하지 않아 구단으로부터 벌금 징계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는 이혼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로드맨의 삶은 큰 위기를 맞는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로드맨은 자신의 차 안에서 총기를 소유한 채 잠이 들었다가 발견돼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훗날 로드맨은 이 사건에 대해 “자살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대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죽이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로 살기로 했다”라고 회상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척 순수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로드맨은 이후 본격적으로 기행을 시작한다.

1993년 로드맨은 샌안토니오로 트레이드되며 생애 첫 이적을 경험했다. 다행히 샌안토니오에서도 수비수와 리바운더로서의 역량은 잘 발휘됐다. 하지만 비교적 온순한 리더였던 데이비드 로빈슨과 밥 힐 감독을 로드맨은 잘 따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또한 이전의 자살 시도 사건으로 인해 삶의 가치관이 크게 바뀐 로드맨은 샌안토니오 시절부터 머리를 노랑, 빨강, 보라, 파랑 등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고 몸에 많은 문신을 새기며 악동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수 마돈나와의 염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94-1995시즌에 샌안토니오 프런트와 큰 갈등을 일으키고 오토바이 사고로 어깨 부상까지 당한 로드맨은 순식간에 구단의 최대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이 시점에 로드맨은 리그를 대표하는 악동이었으며 구제불능에 가까운 선수였다.

그런데 이런 로드맨을 영입하겠다고 나선 팀이 시카고 불스였다. 마이클 조던의 복귀 시즌이 막 끝난 시카고는 새로운 목표를 세운 터였다. 3년 만의 우승 트로피 탈환이었다.

시카고는 1년 전 FA가 되어 올랜도로 이적한 핵심 파워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의 공백을 메울 선수를 찾고 있었다. 로드맨은 34살의 노장에 코트 안팎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였지만,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보여주는 역량만큼은 여전한 선수였다. 결국 시카고는 센터 윌 퍼듀를 넘겨주고 샌안토니오로부터 영입했다. 시카고의 새로운 황금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시카고에서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필 잭슨 감독을 만난 로드맨은 그들의 리더십에 감화됐다. 머리를 염색하고 종종 팀을 이탈하는 등 기행은 멈추지 않았지만 샌안토니오 시절처럼 구단에 반항하고 동료들을 무시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1997-1998시즌에 시카고에서 뛰었던 러스티 라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로드맨이 시카고에서는 무척 조용한 선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함께 지내며 경험한 로드맨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드맨은 기이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척 조용하고 훈련을 매우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 훈련 중에 쉬는 법이 결코 없었다. 훈련장에 나오면 늘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곤 했다. 로드맨은 말이 많지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정말 노력하고 높은 농구 지능을 가진 선수였다.”

이런 로드맨을 조던, 피펜, 필 잭슨 감독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이끌었다. 지친 로드맨이 종종 훈련장 밖, 코트 밖에서 기행을 벌이면 필 잭슨 감독은 넓은 아량으로 이를 이해해주곤 했다. 마이클 조던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로드맨을 이끌었으며, 피펜은 부드러운 성격으로 로드맨을 이해해줬다.

로드맨은 시카고에서 보낸 세 시즌 동안 모두 리그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시카고 골밑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했다. 조던-피펜-로드맨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의 수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으로 꼽히는 1995-1996시즌의 시카고 불스의 한 축이 로드맨이었다. 시카고 왕조의 두 번째 3연패를 이야기할 때 로드맨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1998년 파이널 우승 후 시카고 왕조는 해체됐다. 로드맨 역시 팀을 떠난다. 직장폐쇄로 1998-1999시즌 개막이 미뤄졌고, 결국 1999년 1월 말 로드맨은 팀에서 방출됐다. 37살의 노장 로드맨은 이후 레이커스, 댈러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독특한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팀은 결국 없었다. 1999-2000시즌에 댈러스에서 뛴 12경기를 끝으로 로드맨은 NBA 커리어를 마감했다.

2011년 로드맨은 자신의 등번호 10번이 디트로이트에서 영구결번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로드맨 본인도 명예의 전당 헌액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2012년 명예의 전당 헌액 스피치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불우한 유년기를 거쳐 ‘배드보이즈’ 디트로이트, 그리고 시카고 왕조의 한 기둥으로 거듭난 데니스 로드맨. 그의 삶과 커리어는 독특한 기행과 별개로 위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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