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박혜진. WKBL이라는 리그에서 아니 한국을 통틀어 가장 높은 승률 기록과 많은 트로피를 보유한 선수. 이미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군림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박혜진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잘 모른다. 오늘 여기, 지금껏 볼 수 없었던 50가지 문답으로 우리는 박혜진과 가까워진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Q1.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소집됐다. 매년 훈련하고, 매번 이기고, 매년 우승을 하는 당신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시간 가는 것에 가장 둔감한 사람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어떤가?
하하하. 운동선수가 다 그렇다. 그런데 솔직히 이번 소집은 특히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시즌이 조기 종료되다 보니까 시즌이 제대로 끝났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리고 FA 계약 때문에 신경 쓸 게 하도 많아 휴가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솔직히 지금도 정신이 없다. 

Q2. 부산 집에 있을 땐 보통 어떻게 지내나? 당신이 노는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된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지 않나. 1년에 한 번 내려가다 보니까 부모님, 언니 등 가족과 최대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부산에 있는 친구들도 좀 만나고. 평범하다. 아, 드라마도 본다. 이번 휴가 땐 <사랑의 불시착>이랑 <퀸덤>이라고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다 몰아보고 왔다. <퀸덤> 덕분에 마마무 좋아하게 됐다. 노래 정말 잘하던데.

Q3. KBL이나 NBA도 좀 보는 편인가?
NBA는 즐겨 보는 편은 아닌데, KBL은 많이 본다. 보통 우리가 시즌이 끝날 때쯤 남자는 플레이오프가 한창이다. 그땐 거의 다 챙겨본다. 좋아하는 선수는 (양)동근 오빠. 농구 스타일이나 체형은 동근 오빠보단 (김)선형 오빠를 따라 하려고 하는데, 동근 오빠의 리더십과 팀의 중심을 잡는 모습을 본받고 싶어 많이 보게 되더라.

Q4. 그런 롤모델이 이번에 은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른 것 같다. 솔직히 3년은 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근데 인터뷰를 봤는데 오빠가 ‘수비할 때 생각과 다르게 발이 안 떨어진다.’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하더라. 웃어넘길 수 있는 농담 같지만, 나는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될 텐데’하면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Q5. 양동근과 박혜진. 모두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왕조의 심장과도 같은 선수로 자주 비교된다. 
어휴, 비교되는 것 자체로도 큰 영광이다. 팬들이 그렇게 해주시다 보니까 나도 더 닮고 싶어지는 건 있다. 이번에 FA 계약하면서 나도 이제 진짜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 남게 됐으니 마지막까지 더 동근 오빠 같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Q6. 다시 본인 얘기로 돌아가서. 매년 이맘때, 소집을 위해 부산에서 장위동 숙소로 들어올 때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공기 자체가 어두워진다고 해아 하나.(웃음) 나는 운전을 해서 오고 가는데, 시즌을 마치고 휴가를 받아 부산에 내려갈 땐 휴게소를 한 번도 안 들른다. 근데 올라올 땐 나도 모르게 3~4번씩 휴게소에 들르고 있더라. 한숨과 함께. 하하하.

Q7. 결국 비시즌 훈련이 다시 시작됐다. 개인적으로 개막하기 전, 팀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비시즌은 언제였나?
존쿠엘 존스가 있었던 2016년이 최고였다. 외국인 선수가 일단 너무 든든했고 (임)영희 언니도 좀 젊었고.(웃음) 선수 구성이 정말 좋았다. 연습경기도 모두 만족스러웠고 개막하고서도 질 것 같단 느낌이 하나도 안 들더라. 그냥 골밑으로 패스만 띄워주면 한 골이 적립되다 보니 가드로서 가장 신나게 농구했던 시즌이었다.

Q8. 반대로 전력이 가장 약하게 느껴져서 개막전이 불안했던 시즌은?
바로 직전 시즌. 소집 때부터, 아니 소집 전부터 정말정말 힘들 거라 봤다. 4~5위? 아니면 정말 잘해야 3위 정도라고 예상했다. 영희 언니는 은퇴했지, (김)정은 언니도 비시즌부터 몸 상태가 안 좋지, (박)지현이는 너무 어렸지... 비시즌 내내 다들 운동은 정말 열심히 했는데, 연습경기 때도 마음에 들었던 경기가 하나도 없었다. 선수들끼리도 위기 의식을 많이 느꼈었다.

Q9. 그렇게 많은 시즌을 치르면서도 데뷔 시즌과 코로나 시즌을 제외하고 모두 33경기 이상을 뛰었다. 어려서부터 큰 부상이 하나도 없었나?
데뷔 시즌 마지막 경기 때 발등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왼 발등 골절이 있었는데 인대도 같이 다치면서 고생을 좀 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타고난 몸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웨이트나 몸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다 보니 이렇게 안 다치고 달려올 수 있었던 것 같다.

Q10. 비슷한 맥락으로. 최근 FA 계약 때 위성우 감독님이 ‘혜진이는 나한테 힘들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는데 진짜인가? 감독님이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고?
(웃음) 감독님 말이 맞다. 농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힘든 일이 있어도 말씀을 안 드렸다. 감독님과 첫해 때부터 함께 하다 보니까 뭐랄까 감독님이 저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나는 힘든 게 있어도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FA 협상을 계기로 감독님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눈 만큼, 그런 게 있으면 자주 말씀드리려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만 잘하는 게 아니라, 다른 팀 선수들이나 아마추어 선수들도 ‘아, 우리은행 정말 가고 싶다’는 소리 할 만한, 그런 팀 문화를 만들고 싶다. 내 새로운 목표다.

 

Q11. FA 얘기가 나온 김에. 처음 제도가 바뀌었다는 걸 들었을 땐 어땠나?
이게 뭔가 싶었다. 제도가 바뀌었다는 기사를 보는데 사진이 다 제 사진이더라.(웃음) 내 성격상 처음엔 좋기보다 당황했다. 모든 선수가 기다렸던 제도 변화였지만, ‘왜 하필 나 때부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그동안 선배들이 제도 때문에 정말 힘들어했던 걸 봤기 때문에 제도 자체는 좋은 방향으로 잘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부담이 컸다.

Q12. 실제로 팀을 옮기기 직전까지 가지 않았나? 만약 옮겼다면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새로운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어느 팀으로 가든, 팀을 옮기면 그 기대에 부응하는 개인 성적과 팀 성적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동기 부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Q13. 반대로 무엇이 우리은행에 남게 했나?
우리은행에서 신인 때부터 뛰면서 구단과 사이가 나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 국장님과 모두 얼굴을 붉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라리 자주 얼굴 붉히고 사이가 나빴으면 감독님이랑 휙 등 돌리고 돌아섰을 텐데, 그런 게 아니어서… 그래서 협상 기간, 감독님을 뵐 때마다 힘들었다. 내가 흔들리고 있는 거 자체에 감독님이 속이 상하실 것 같더라. 내가 감독님이었어도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다.

Q14. 어쨌든 당신은 WKBL 역사상 6개 구단과 동시에 협상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그건 어떤 느낌이었나?
‘내가 이런 관심을 받아도 될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섭고 조심스러웠다. 갑작스레 제도가 바뀌면서 '다른 선수는 어떻게 한다더라' 이렇게 뭐 들은 게 없으니 내가 너무 갑질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떤 팀을 선택하든 나머지 5개 팀에는 거절을 해야 한다는 거니까 그게 어려웠다. 또 WKBL과 KBL 모두 시즌이 일찍 끝나면서 기삿거리가 많이 없었을 때 계속 추측성 기사가 쏟아지면서 팬들한테 죄송한 부분도 있었다.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결과에 실망(?)하셨을까봐 죄송했다.

Q15. FA 결정에 있어서 가장 의지하고 많이 대화를 나눈 사람은 누구였나?
의지를 많이 한 건 아무래도 가족들이었다. 주위에서 연락도 많이 왔다. 어렸을 때 선생님들이나 주위 동료들, 그 밖에 여러 인맥이 전화를 주셨다. 다들 좋은 뜻으로 조언을 해주셨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달라서 듣고 보니 오히려 혼란만 더 오더라.(웃음) 결국 최종 결정은 스스로 했다.

Q16. 계약 기사가 나간 순간은 어땠나? 잠은 푹 잤나?
휴가를 받고 처음으로 그날 늦잠을 잤다. 새벽에 협상을 끝내고, 낮 한 시쯤 일어났나? 핸드폰이 난리가 나 있더라. ‘왜 이러지’ 싶어서 봤더니 기사가 바로 났더라. 너~무 후련했다. 1%의 후회도 없이 너무 편했다. 나는 그때부터 휴가 시작이었다. 원래 좀 예민한 편이라 그동안 밥도 못 먹는 바람에 몸무게가 많이 빠졌었다. 잔류에 사인하고 이제는 복귀할 곳이 확정되니까 일부러 더 잘 챙겨 먹고 살을 찌웠다. 내가 복귀할 곳은 훈련이 힘든 곳이니까.(웃음) 

Q17. 우리은행에 있으면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은 언제였을까?
(위성우) 감독님이 처음 오셨던 시즌. 정말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는데, 그걸 버티면 이런 보상을 받는다는 걸 함께 깨달았던 해였다.

Q18. 그때 위성우 감독님이 부임했다는 소식은 어떻게 접했나?
기사로 알았다. 그전에도 사실 우리팀 성적이 워낙 안 좋다 보니까 감독님이 2~3번 바뀌었었다. 그래서 그냥 그때도 ‘아, 위성우 감독님이란 사람이 오는구나’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다.(웃음) 신한은행에 계셨지만, 나도 어릴 때라 어떤 스타일인지 잘 몰랐다. 정말 가볍게 생각했다. 정말 가볍게...

Q19. 한숨이 깊다.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날까?
기억난다. 첫날, 체육관에 올라와서 다 같이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땐 웃으셨다. 활짝 웃으시길래 ‘아, 좋은 분이시구나’ 했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Q20. 위성우 감독이 부임하고 첫 전지훈련의 악명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 되고 있다. 어떤 느낌이었나?
여수 전지훈련이 힘든 건 맞는데, 사실 거기까지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게 그냥 전지훈련 말고도 체육관에서 훈련할 때도 이미...(한숨) 오전 훈련이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몸이 열 때문에 떨렸다. 그러면서 ‘아, 오후 훈련은 또 어떻게 하냐’ 이렇게 누워 있다가 나가서 오후 훈련하고, 또 오후 훈련 끝나면 누워서 ‘아, 야간 훈련 어떻게 하냐’ 이렇게 있다가 나가서 하고. 그게 시즌 내내 이어졌다. 아까 감독님께서 내가 힘들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그건 정말 힘들다. 진짜 못 한다. 거짓말이 아니다.(웃음)

 

Q21. 그렇게 맞이한 2012-2013시즌 개막전, 만년꼴찌팀 우리은행은 KDB생명을 상대로 65-56으로 승리했다. 2007-2008이후 6년 만의 우리은행 개막전 승리였다. 그 경기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
경기 시작 전, 감독님이 라커룸에서 저희 얼굴을 보는데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하셨다. 감독님께서 ‘너네 또 질 생각하고 있냐’고 다그치면서 ‘용기를 내라. 그동안 연습 때 흘렸던 땀을 생각해라’라고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 주셨다. 감독님 말대로 비시즌 운동을 많이 했는데, 다들 패배의식이 아직 빠지지 않아 두려움이 남아있었던 거 같다. 근데 감독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 비시즌 때 울면서 운동했던 게 생각나면서 스스로 ‘혜진아 뭐가 무섭냐’하면서 코트에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고 나니까 이겨 있더라.

Q22. 선수들에게 인기가 많은 감독님은 아니지만, 확실히 박혜진에게 특별한 사람임은 분명하겠다.
저를 이 자리까지 끌어주신 분이다. 이번 FA 협상 때, 다른 팀에서 모두 좋은 대우와 환경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 자체가 감독님과 코치님 덕분이라 생각했다. 농구를 하면서 계속 ‘이 두 분만 믿고 따르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왔다. 농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농구적인 부분에서는.(웃음)

Q23. 그렇다면 감독님 말고, 지금까지 뛰면서 최고의 국내선수 파트너는 누구였을까?
당연히 영희 언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굳이 얘기를 안 해도 그냥 통하는 게 있다. 언니는 지금도 나를 보며 ‘누구보다 너를 잘 안다’고 얘기하는데 맞는 말이다. 게임 안에서나 밖에서나 서로 눈빛만 보면 안다. 예를 들어 ‘언니가 지금 이것 때문에 잘 안 풀리고 있어 표정이 안 좋구나’하고 눈치 챈 다음 내가 해결하는 이런 호흡이랄까.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Q24. 최고의 외국인 선수는?
존쿠엘 존스. 신체조건도 워낙 좋고, 그만큼 성적도 좋았으니.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처음 함께 뛰었던 티나 탐슨이다. 티나 언니와 뛸 땐 나도 워낙 어리고 감독님도 무서워서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서 했는데, 티나 언니는 단순한 외국인 선수가 아닌 정말 팀의 리더처럼 팀을 이끌었다. 코트에서 우리가 흔들릴 때면 고개 들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감독님 대신 선수들을 이끄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Q25. 그것보다 더 어렸을 때 얘기를 해보자. 삼천포여고를 졸업하고 전체 1순위로 프로에 왔다. 지금 박혜진은 너무 대단한 선수라 그때 상상이 잘 안 되는데, 떨긴 떨었나? 
그때 (박)하나랑 1, 2순위를 다퉜는데, 사실 1순위보다 ‘내가 어느 팀을 갈까’ 하는 걱정이 더 컸었다. 그때 내가 갈 수 있는 팀이 우리은행과 신세계였는데, 우리은행은 당시만 해도 선후배 관계에 있어서 무섭다고 소문난 구단이었다. 단, 가드 포지션에 공백이 있어 한편으로는 기회를 받을 수 있으니 또 기대도 됐고. 그러다 결국 우리은행에 오게 됐다.

Q26. 그것보다 더 과거로 돌아가 농구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나?
지금도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는 더 작고 왜소했다. 그때 우연히 학교에 갔다 와서 TV를 틀었는데, 남자농구가 하고 있었다. 지금은 감독님들이 되신 강동희 선수, 조성원 선수가 나오고 있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바로 집 앞에 아파트 농구 골대로 달려가서 모르는 오빠들과 공을 튕기고 놀았다. 농구공도 아니고 주차장에 버려진 새까만 공을 주워서 놀고 그랬다. 그러다 그땐 언니가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다. 농구랑 배구 쪽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엄청 들어왔다. 이때다 싶어 언니를 꼬셨다. 언니 농구하라고.(웃음) 그렇게 언니가 먼저 시작했고, 나도 은근슬쩍 따라가서 시작하게 됐다. 

Q27. 그때도 지금처럼 차분한 성격이었나?
아니다. 어릴 땐 좀 과하게 활동적이었다. 학교 갔다 와서 가방 던져놓고 해질 때까지 밖에서 노느라 안 들어와서 아빠한테 혼나고 통금도 생기고 그랬다. 얼굴에는 맨날 까맣게 때가 껴서 들어오고. 오히려 언니가 조용했다. 지금도 팬분들은 내가 조용한 줄 알고 계시는데, 그건 아니다. 낯을 가릴 뿐이다. 특히 농구선수를 하면서 선수는 좀 조용하고 차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농구 외적으로 보면 전혀 아니다.

Q28. 만약 그때 농구를 안 했다면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그랬으면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땐 공부도 좀 했다. 그때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농구 때문에 학원 그만둔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안 된다. 혜진이는 공부해야 한다’고 잡았을 정도였다.(웃음) 그런데 그땐 정말 농구가 하고 싶었다. 그 나이 땐 보통 전학도 가기 싫어하는데, 나는 부산에 농구 학교가 없는 줄 알고 엄마한테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농구 시작하고 후회한 적은 없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적도 없었다. 단 게임을 못해서 그만두고 싶은 적은 있었다. 특히 대표팀에서 경기를 망쳤을 땐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Q29. 나온 김에 조심스럽게 국대 얘기를 꺼내보겠다. 성인 국가대표 첫 선발 기억나나?
2013년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그 전에도 아픈 언니들이 있으면 대체로 몇 번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나도 그땐 발등이 안 좋았다. 그래서 몇 번 무산됐다가 2013년도에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처음 들어갔다. 그땐 대표팀에 (변)연하 언니, (신)정자 언니, (이)미선 언니 등 정말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언니들과 처음 운동해봤는데 하루하루가 정말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보고 배울 것도 많고, 긴장도 많이 했었다.

Q30.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나선 대회는 언제부터였나?
2015년 우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정말 최악이었다.(웃음) 이때부터 좀 대표팀과 뭔가 좀 삐끗했던 거 같다. 그런데 이 대회는 대표팀 주축 언니들이 은퇴하면서 세대교체라는 면죄부가 있었던 대회라 내 부진이 그렇게 크게 드러나진 않았었던 것 같다.

 

Q31. 그렇게 대표팀에서 부진이 길어지고, ‘국내용’이란 꼬리표가 붙었을 땐 어떤 심정이었나?
그 별명은 오히려 처음 생겼을 때가 가장 속상했다. 내 실력은 이게 아닌데, 몇 경기만 보고 그런 별명을 붙여 판단하는 거 같아서 못 받아들이겠더라. 그래서 처음이 제일 힘들었다. 그러다 뒤로 갈수록 그 화가 점점 나 자신에게 돌아갔다. 대표팀에 갈 때마다 내가 생각한 플레이가 아니라 이상한 것만 하고 돌아오니까. 정말 농구 못 하겠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게 2015년 우한 대회 때 처음 들었다가, 작년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에서 못하고 왔을 땐 정말 농구를 그만두거나 나가 죽자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전까진 그래도 갔다 돌아오면 ‘다음번에 더 잘하자’ 이런 채찍질을 했는데, 그땐 그마저도 안 되더라. 농구공을 쳐다보기 싫고, 체육관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다시 농구가 일상이 돼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Q32. 그런 기사와 댓글은 좀 보는 편인가?
잘 안 본다. 특히 대표팀 나갔을 땐 인터넷을 아예 안 켠다. 근데 오히려 주위에서 그럴 때마다 ‘기사 보지 말고 댓글 신경 쓰지 마라’ 같은 위로 연락이 오더라. 애써 안 보고 있었는데 더 속상하게.(웃음) 이젠 그런 비난도, 비판도 많이 덤덤해졌다.

Q33. 그러다 지난해 11월 뉴질랜드에서 열린 올림픽 지역예선 때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그 대회 때부터 사실상 최정예 멤버가 모였다. 그런데도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을 때라 (위성우) 감독님한테 ‘저 이젠 안 가면 안 되냐’고 말씀드렸다. 그때마다 감독님은 ‘괜찮다. 이젠 잘하는 선수가 많으니까 네가 굳이 뭘 하려 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물 흐르듯 하고 와라. 더 손가락질 받을 것도 없다’고 해주셨다. 감독님 말씀 듣고 마음 비우고 갔다. 또 하필 그때 팔 근육도 찢어져 있었을 때라 ‘어차피 팀에 큰 도움이 되긴 힘들다. 뒤에서 마음 편하게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니까 잘 풀리더라. 그때 경기력도 100%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잘 됐다.

Q34. 그때 중국전 결승골은 정말 멋졌다. 마지막 순간을 떠올릴 수 있나?  
시간은 없었고 딱 한 골이 필요한 상황에서 어쨌든 제가 가드니까, 공격을 정리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는 뭐가 어떻게 되든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해결해야 한다. 그땐 ‘실패하면 어떡하지’가 아니고 그냥 공을 잡은 게 나니까 ‘이건 내가 해결해야 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지수가 스크린을 잘 서줬고, 또 아무래도 국제 대회다 보니 중국이 내가 왼손을 잘 쓰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 좋아하는 왼쪽 길이 열려 있길래 자신 있게 돌파했다. 그동안 대표팀에서 운이 없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Q35. 중국전 결승골처럼 농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더 샷’이 있나?
음... 사실 나는 성공한 거보다 실패한 게 더 기억에 남는다. 데뷔 시즌에 용인에서 삼성생명과 붙었던 경기였는데, 박빙으로 가던 중요한 경기였다. 그 경기 막판에 내가 공을 잡고 돌파한 다음 레이업을 올렸는데, 그게 안 들어가면서 팀이 졌다. 연말에 했던 경기였는데 그 슛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신입생이니까 그나마 털고 일어났지 지금 그랬으면 두고두고 잠도 못 잤을 것 같다.

Q36. 그리고 이어진 최종 예선. 직전 대회에서 어느 정도 만회하긴 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비난 여론 때문에 베오그라드행 비행기가 썩 편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가는 비행기에서 계속해서 주문을 걸었다. 저번 대회 때처럼 내려놓고 가자고. 주연이 되기보단 조력자 역할로 마음 편하게 하고 오자고. 직전 대회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면서 갔다.

Q37. 첫 번째 경기였던 스페인전은 사실 주력 경기는 아니었지만, 슈터 강이슬의 슛감이 안 좋지 않았나. 팀 내에서 걱정은 없었나?
오히려 단기전 같을 때 보면 전 경기에서 너무 잘 터지면 꼭 다음 경기는 안 터지더라. 스페인전에서 컨디션이 좋았던 선수가 거의 없었는데, 오히려 다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때 컨디션이 너무 좋았으면 더 불안했을 것이다. (강)이슬이도 마찬가지로 영국전에서는 터질 거 같았다.

Q38. 그렇게 맞이한 영국전. 이 경기에서 대표팀은 박지수가 후반까지 슛 시도를 거의 안 하고 가드진 위주로 공격을 풀었다. 준비된 전략이었을까? 
준비된 건 아니었다. 영국 센터도 워낙 강하다 보니까 우리도 지수가 직접 공격하기보단 지수로부터 파생되는 공격을 이용하기로 암묵적으로 통했던 것 같다. 상대팀도 아무래도 우리는 몰라도 지수는 잘 알다 보니까 지수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그걸 역이용했다.

Q39. 그렇게 강이슬의 슛이 터지고 좀 쉽게 가는 것 같다가 막판 체력 열세를 보이며 따라잡혔다. 이때 느낌은?
진짜 불안했다. 계속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다들 경기가 주는 중압감과 체력적으로 힘들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진 게 눈에 보였다. 마지막 타임 때 모여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대로 무너지긴 싫다’고 마음을 모았다. 무조건 이겨야 했던 경기였다.

Q40. 좀 다른 질문인데, 강이슬과 그렇게 제대로 호흡을 맞춰본 게 처음이었다. 최고의 슈터와 뛰어보니 어떤가? 
맞다. 그렇게 같이 뛰어본 게 처음이었는데, 슛 타이밍이며 터치며 정말 부럽더라. 대표팀에서 경기하다 보면, 정말 부러운 몇 가지가 있다. (강)이슬이의 슛이나 (김)단비 언니의 돌파 동작 같은 것들. 특히 단비 언니의 돌파는 정말 부럽다. 신체적으로 타고났다.

 

Q41. 다음 시즌 FA가 되는데, 함께 뛰어보자고 전화할 의향 있나?
나도 처음이어서 많은 전화를 받았지만, 이슬이도 이제 인기가 어마어마할 것이다.(웃음) 그런데 이슬이는 아마 나랑 좀 다르게 그 상황을 되게 즐길 것 같다. 이번에도 협상 기간 전에 전화가 와서 ‘선배님. 선배님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보고 저도 내년에 따라 결정하겠습니다’라며 놀리더라. 내가 굳이 연락 안 해도 이슬이 전화기는 인기가 많을 거 같다.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다. 잘 지켜보겠다.

Q42. 다시 대표팀 얘기로. 어쨌든 목표했던 영국전에서 이겼다. 하지만 다음날 경기가 바로 또 있었던 터라 제대로 축하도 못 했을 것 같다.
맞다. 영국을 이겼지만, 그때 스페인이 중국한테 지면서 경우의 수가 꼬이는 바람에 완전히 축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길 때만 좋아했고 그렇게 들뜨지는 않았다. 중국전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잡혔다.

Q43. 그리고 마지막 중국전. 이 경기는 아무리 박혜진이라도 진짜 힘들었을 것 같다. 
안 힘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냥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우리만 그렇게 연전을 한 것도 아니고. 다 똑같은 일정이었는데 40분을 뛰든 어쨌든 코트 위에 있으면 더 책임감을 갖고 뛰어야 하는데, 다들 컨디션 핑계를 대면서 자신도 모르게 좀 안일하게 뛴 것 같다. 영국전 같은 필승 의지가 없었다.

Q44. 어쨌든 코로나로 인해 모든 국제대회가 미뤄지면서 이번에는 6개 구단이 비시즌을 모두 정상적으로 치르면서 정말 정면승부를 펼치게 됐다. 
맞다. 게다가 다가오는 시즌에는 외국인 선수도 없으니까. 국제대회가 없어지면서 한편으로는 착실하게 시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다 똑같은 조건이기에 사실 잘 모르겠다. 이번 시즌은 정말 예측이 전혀 안 된다.

Q45. 외국인 선수 제도 폐지는 본인에게 또 다른 도전이 될 수도 있겠다.
팀이 정말 아직은 다들 몸을 만드는 단계라 구체적인 방향은 아직 모르겠으나, 우린 다른 팀에 비해 높이가 낮은 팀이다. 그러다 보니 공수에서 약점이 더 많이 드러날 것이다. 비시즌 내내 감독님을 믿고 열심히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Q46. 과거 외국인 선수가 없던 시절을 경험했는데 그땐 어땠나?
그땐 신입생 때여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게 그래도 그땐 팀에 (김)계령 언니 같은 좋은 센터가 있었다. 비록 성적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포지션별로 선수가 있어서 괜찮았던 거 같은데 올 시즌 우리 팀은 확실한 빅맨이 없다. 또 그땐 고교에서 바로 프로에 왔을 때라 외국인 선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가 않았다.

Q47. 지난 시즌 MVP가 너무 걱정도 많고 겸손한 것 같다. 앞으로 MVP는 몇 번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사실 지난 시즌에도 MVP는 앞으로 영원히 더 못 받을 거 같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제는 더 힘들지 않을까.(웃음) 무엇보다 MVP는 팀 성적이 좋아야 받는 건데 계속 말했던 것처럼 팀 성적이 가장 큰 걱정이다. 

Q48. 은퇴 후 계획도 세우고 있나?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까지 계속 농구를 했으니까 은퇴하면 농구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었다. 근데 이제는 감독님, 코치님들을 보면서 때론 ‘나도 저런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지도자라는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Q49. 그렇게 지도자가 된다면 어떤 유형일까?
하하하. 사실 ‘나는 안 그래야지’하면서도 (위성우) 감독님한테 배우면서 농구를 가장 잘했기 때문에.(웃음) 감독님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스타일로 가지 않을까 싶다. 나는 운동할 땐 나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그렇고 헐렁하게 운동하는 걸 잘 못 보는 타입이다. 이런 걸 보면 벌써부터 비슷하게 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Q50.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의도치 않게 이번 비시즌, 이슈가 되면서 피가 되고 살이 될 좋은 경험을 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다른 팀에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도 다 감독님이 좋은 선수로 키워주신 덕분이다. 낯 뜨거워 제대로 말씀 못 드렸는데, 정말 감사하다. 감독님도 나 때문에 휴가 기간 내내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감독님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물론 이해하신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서운하실 거다. 그래도 끝까지 믿어주셔서 감사하다. 다가오는 시즌, 감독님과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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