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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의 앤드원] 제리 크라우스는 정말 불스 왕조를 망친 악당이었을까

[루키=이동환 기자] 어떤 극에서든 악역은 필요하다. 최근 공개된 ESPN-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의 최고의 악역은 故 제리 크라우스 단장이었다. 총 500분에 달하는 방영 시간 동안 크라우스는 불스 왕조에 힘을 보탠 창조자보다는 불스 왕조를 흔들고 직접 끝내버린 인물로 묘사됐다.

그런데 정말 제리 크라우스는 불스 왕조를 망친 악당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더 라스트 댄스>에서 우리는 크라우스의 한 단면만 확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 라스트 댄스>는 어쨌든 ‘전지적 조던 시점’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 시카고 불스의 단장 제리 크라우스를 보다 온전하게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라스트 댄스>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제리 크라우스의 커리어와 공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별종 스카우터, 불스의 단장이 되다

고교 시절까지 야구를 했던 제리 크라우스는 대학 졸업 후에는 NBA에서 스카우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몸을 담았던 팀은 볼티모어 불리츠.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이었다.

볼티모어에서 크라우스는 탁월한 스카우팅 능력을 발휘했다. 크라우스의 추천에 따라 1964년 드래프트에서 볼티모어는 제리 슬로언을 지명했으며, 1967년 드래프트에는 얼 먼로를 지명한다.

크라우스가 추천한 제리 슬로언과 얼 먼로의 NBA 커리어는 어땠을까? 한 마디로 ‘대성공’이었다.

슬로언은 NBA에서 10년 넘게 선수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올스타에 2번, 올-NBA 디펜시브 팀에 6번(퍼스트 4번, 세컨드 2번) 선정됐으며, 시카고에서 등번호 4번이 영구결번되기도 했다.(훗날 슬로언은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맞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타의 그 제리 슬로언 감독이다.)

얼 먼로는 더 대단했다. 볼티모어에서 5년, 뉴욕에서 9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던 먼로는 1973년에 뉴욕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었으며 올스타에도 4번 선정됐다. 1990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96년 NBA에서 선정한 위대한 5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루키 시즌부터 평균 24.3점을 기록한 먼로는 볼티모어에서 보낸 5시즌 동안 모두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하며 웨스 언셀드와 함께 팀을 이끈 젊은 에이스로 활약했다. 크라우스의 눈이 옳았던 것이다.

먼로를 지명한 1967년 드래프트에서 크라우스는 또 한 명의 유망주에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바로 필 잭슨이었다.

아쉽게도 볼티모어는 뉴욕이 17순위로 잭슨을 먼저 지명하면서 잭슨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잭슨은 데뷔 시즌에 곧바로 올-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1970년과 1973년 뉴욕의 우승에 기여한다. 이때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던 크라우스와 잭슨은 훗날 시카고에서 단장과 감독으로 만나게 된다.

스카우터 시절 크라우스는 별종으로 유명했다.

많은 스카우터들이 소속과 상관없이 서로 친분을 쌓고 지내며 정보와 의견를 공유했던 것과 달리, 크라우스는 소통 없이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크라우스는 다른 팀의 스카우터와 의견을 공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다른 스카우터의 의견을 굳이 듣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의견도 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업무 방식이었다. 크라우스가 이런 식으로 일을 했던 이유에 대해 제리 레인스도프 구단주는 이렇게 설명했다.

“크라우스는 다른 스카우터들의 의견에 자신이 영향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게 크라우스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선수에 대해 자신만의 시각과 의견을 구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흔들리지 않길 원했다.”

197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오클랜드, 시애틀, 화이트삭스에서 스카우트 생활을 했던 크라우스는 1985년에 다시 농구계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엔 스카우터가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직책은 바로 시카고 불스의 단장이었다.

별종으로 유명했던 크라우스를 단장으로 임명했던 이유에 대해 제리 레인스도프 구단주는 <더 라스트 댄스>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시카고 불스의 구단주가 되자 크라우스가 나를 따로 찾아왔다. 단장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 그 후에 관계자들에게 크라우스에 대해 물어봤다. 다들 크라우스와 상종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단장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팀을 만들 사람이 필요했고, 크라우스는 적임자였다.”

시카고에 제리 크라우스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호레이스, 스카티, 그리고 필 잭슨

제리 크라우스가 시카고의 단장으로 임명된 1985년 시카고는 마이클 조던이 훌륭한 데뷔 시즌을 치르며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시카고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암흑기에서 벗어나 리그 중위권 팀으로 조금씩 도약하고 있었는데, 크라우스는 부임과 동시에 곧바로 마이클 조던을 도와줄 팀의 새로운 조각을 찾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7년 시카고는 구단 역사에 남을 쾌거를 거둔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스카티 피펜과 호레이스 그랜트를 동시에 얻은 것이다.

당시 시카고는 전체 10순위 지명권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과감한 선택을 했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고 있던 올덴 폴리니스와 미래 지명권을 시애틀에 넘겨주기로 하고 전체 5순위 지명권을 받아왔다. 그렇게 확보한 2장의 드래프트 지명권으로 크라우스는 스카티 피펜(5순위)과 호레이스 그랜트(10순위)를 지명했다.

이후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피펜과 그랜트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불스 왕조 첫 3연패의 주역이 됐다. 포인트포워드의 시대를 연 피펜은 마이클 조던과 함께 6번의 우승을 거머쥐며 지금까지도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2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호레이스 그랜트는 역시 4번의 파이널 우승, 한 차례의 올스타, 4번의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되며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다. 크라우스의 안목이 이번에도 제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크라우스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8년에는 팀의 대장 역할을 수행했던 파워포워드 찰스 오클리를 뉴욕으로 트레이드하고 그 대가로 216cm의 센터 빌 카트라이트를 데려왔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오클리를 믿고 따르던 조던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센터가 필요했던 시카고의 전력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더 라스트 댄스>에서 마이클 조던은 찰스 오클리 트레이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찰스 오클리는 내 절친이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선수였다. 하지만 오클리가 트레이드된 후 우리는 더 많은 승리를 쌓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크라우스를 끔찍이 싫어하는 조던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좋은 트레이드였던 셈이다.

 

1989년에 크라우스는 또 한 번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마이클 조던이 좋아하고 따랐던 덕 콜린스 감독을 경질하고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필 잭슨을 감독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크라우스의 선택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필 잭슨은 텍스 윈터 코치와 함께 시카고에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도입하고 시카고를 한층 더 무서운 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카고는 마이클 조던만 막으면 되는 팀에서 탁월한 공수 짜임새를 가진 팀으로 탈바꿈했고, 결국 1991년에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8년까지 필 잭슨은 조던과 함께 8년 동안 6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시카고 왕조의 주역이 된다. 훗날 레이커스에서 5개의 우승 반지를 추가한 필 잭슨은 현재 NBA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불스 왕조 막판에 크라우스와 필 잭슨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망가졌다는 것이다. 크라우스와 잭슨의 갈등은 불스 왕조 해체의 핵심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더 라스트 댄스>에서도 꽤 구체적으로 다뤄졌다.

제리 레인스도프 구단주는 크라우스가 필 잭슨에 대해 가진 집착과 시기심을 언급하며 둘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제리 크라우스는 자신이 필 잭슨의 커리어를 구원해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 잭슨이 자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크라우스는 계속 그 부분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설사 크라우스가 필 잭슨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필 잭슨이 평생 크라우스에게 감사해하며 그를 떠받들 이유는 없었다. 크라우스의 그런 생각이 둘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필 잭슨도 조던, 피펜 같은 선수들이 크라우스를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됐다. 둘의 관계가 망가진 것에는 크라우스와 필 잭슨 둘 모두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시카고 왕조 해체, 정말 틀린 결정이었을까?

1990년대 들어서도 크라우스는 훌륭한 판단으로 시카고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1990년 드래프트에서는 2라운드 전체 29순위로 토니 쿠코치를 지명했고, 마이클 조던의 복귀 시즌이 끝난 직후인 1995년 여름에는 백업 센터 윌 퍼듀를 샌안토니오로 보내고 데니스 로드맨을 데려왔다.

이렇게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 된 쿠코치와 로드맨은 시카고 왕조의 두 번째 3연패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문제아로 낙인 찍혔던 베테랑 빅맨 로드맨은 탁월한 수비력과 리바운드 능력으로 조던, 피펜과 함께 강력한 트리오를 이뤘다. 불스 왕조를 이야기할 때 크라우스의 공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두 번째 3연패를 앞두고 크라우스가 내린 결정이다.

크라우스는 시카고의 로스터가 전반적으로 크게 노쇠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직접 리빌딩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크라우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던 필 잭슨과 결별하는 것이었으며, 이후에는 선수단을 전반적으로 뒤엎을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물론 그 계획에서 조던만큼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갖가지 소문과 논란 속에 시카고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필 잭슨은 1998년 파이널 우승 후 제리 레인스도프 구단주의 계속되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시카고를 떠났다. 필 잭슨이 감독이 아니면 경기에 뛰지 않겠다고 말했던 마이클 조던은 결국 두 번째 은퇴를 선언했으며, 1997-1998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봉 문제와 트레이드 루머로 시카고와 큰 갈등을 벌였던 피펜은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됐다. 데니스 로드맨은 방출됐고 스티브 커도 트레이드로 샌안토니오 유니폼을 입었다. 결국 크라우스의 뜻대로 된 것이다.

<더 라스트 댄스> 마지막 화에서 마이클 조던은 리그 4연패, 통산 7번째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크라우스로 인해 잃은 것에 대해 큰 아쉬움과 분노를 드러냈다.

“3연패를 달성하고 다시 은퇴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7번째 우승도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전조차 못하게 된 것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떤 이유에서든 용납이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인터뷰에서 제리 레인스도프 구단주는 당시 마이클 조던에게 벌어진 한 사고를 언급하며 리빌딩 노선을 택한 크라우스의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그 사고란 조던이 시가(cigar)를 자르는 칼에 손가락을 베여 수술을 받게 된 사건이었다.

레인스도프 구단주는 당시 손가락 수술을 받은 조던이 단축 시즌의 얼마 안 되는 몇 달마저 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던 상황이었으며, 조던이 뛰지 못하는 가운데 다른 시카고 선수들을 다시 모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필 잭슨이 다시 팀을 맡을 생각이 있었고 마이클 조던도 코트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한 번 더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서서 우승 멤버들을 다시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1년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계획이었다. (노쇠화 때문에) 1년 넘게 갈 수 없는 계획이었다. 1998년 우승 후 필 잭슨은 결국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조던도 손가락 수술로 다음 시즌을 제대로 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우승 멤버들을 다시 팀에 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레인스도프 구단주의 말이다.

 

조던이 떠난 후 시카고는 끔찍한 암흑기를 걷는다. 크라우스가 필 잭슨의 후임으로 임명한 팀 플로이드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세 시즌 반 만에 해고됐다. 플로이드가 감독을 맡은 기간 동안 시카고가 거둔 성적은 49승 190패였다. 승률이 20.5%에 불과했다. 리빌딩 팀이었던 점을 감안해도 너무 처참했다.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1998년에 시카고 왕조를 해체한 크라우스의 결정이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크라우스의 뜻 때문에 그 시기가 다소 앞당겨졌을 뿐, 로스터의 노쇠화가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카고는 언젠가는 리빌딩으로 인한 암흑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리빌딩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분명 크라우스의 책임이 있다. 리빌딩 과정에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지 2003년에 크라우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시카고 단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와 별개로 크라우스가 1998년에 리빌딩을 시작한 것을 마냥 비판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물론 리그 4연패를 꿈꿔볼 수 있었던 조던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 2017년 사망 전에 제리 크라우스는 시카고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회고록을 써둔 바 있는데, 최근 그 회고록의 일부분이 부인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특히 그 중 자신과 마이클 조던의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NBC스포츠 시카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코트 밖의 불편한 관계와 별개로 나와 조던은 적어도 코트에서는 무척 잘 맞는 사이였다. 조던은 나만큼이나 승리를 갈구했고, 우리 둘 모두 끊임없이 이기고 또 이기길 원했다. 우리는 계속 승리하기 위한 계기를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조던과 나는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였을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무척 잘 통하는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조던과 나는 모두 고집이 무척 센 사람이었고 경쟁심이 무척 강했다. 각자의 능력에 큰 자부심이 있었고 농구계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길 원했다.”

 

과연 제리 크라우스는 시카고 왕조를 뒤흔들고 끝내버린 악당에 불과했을까?

어떤 면에서 크라우스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크라우스는 필 잭슨을 떠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피펜의 트레이드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으로 피펜을 분노케 했다. 선수,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일에 반영되기도 했다. 크라우스가 조금 더 유연하게 발언하고 행동했다면 분명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라우스가 시카고에 피해를 끼치기만 했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크라우스는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시카고 왕조의 기틀을 닦은 명백한 공헌자였으며, 그의 역량이 아니었다면 조던의 커리어는 물론 시카고의 역사도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더 라스트 댄스>를 통해서만 제리 크라우스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이동환 기자  ldh2305@rook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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