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2003년 드래프트는 NBA 역사에 남을 풍년 드래프트로 꼽힌다. 르브론 제임스(1순위)를 시작으로 카멜로 앤써니(3순위), 크리스 보쉬(4순위), 드웨인 웨이드(5순위)까지 훗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드래프트에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도 이들을 모두 놓친 팀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실제로 그런 팀이 존재한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2순위 지명권으로 유럽 출신의 빅맨 다르코 밀리치치를 지명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선택은 놀림감으로 남아 있다. 특히 대학농구 최고의 신입생 시즌을 보낸, 훗날 NBA에서 최고의 스코어러로 활약할 카멜로 앤써니를 눈앞에서 포기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흑역사’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왜 디트로이트는 카멜로 앤써니를 외면한 걸까. 지금부터 그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 대학 시절의 앤써니는 더 이룰 것이 없는 선수였다.

시라큐스의 멜로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NCAA에서는 그간 수많은 신입생 스타들이 등장했다. 2002년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한 카멜로 앤써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앤써니는 매년 대학 무대에 한 두명씩은 등장하는 '실력 좋은 신입생' 정도의 선수가 아니었다. 조금 거친 표현을 빌리자면 앤써니는 대학 무대 입성과 동시에 전미를 '씹어먹는' 수준의 활약을 펼쳤다.

대학 무대 데뷔 첫 3경기부터 모두 27점 이상을 기록하는 강력한 임팩트를 남긴 앤써니는 신입생 시즌에 출전한 정규시즌 35경기에서 22.2점 10.0리바운드 2.2어시스트 1.6스틸 야투율 45.3%를 기록했다. 알고도 막을 수가 없는 득점 기계였다. 더블-더블은 총 22차례 기록했는데 이는 NCAA 역대 신입생 신기록이었다.

앤써니의 활약 속에 소속 팀 시라큐스 대학도 승승장구했다. 30승 5패로 시즌을 마치며 3년 만에 빅 이스트 컨퍼런스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고, NCAA 토너먼트에서는 결승 무대를 밟았다.

텍사스 대학과의 토너먼트 4강 경기에서 앤써니는 33득점을 쏟아 부으며 시라큐스 대학의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한 경기 33득점은 NCAA 토너먼트 경기에서 신입생이 기록한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앤써니의 활약 속에 시라큐스 대학은 1987년, 1996년에 이어 역대 세 번째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에서도 앤써니의 활약은 이어졌다. 닉 콜리슨, 커크 하인리히 등이 이끄는 캔자스 대학을 상대로 앤써니는 20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라큐스 대학의 우승을 견인했다. 앤써니는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으며, 이 우승은 지금도 시라큐스 대학 역사상 유일한 NCAA 토너먼트 우승으로 남아 있다.

앤써니와 함께 시라큐스 대학의 우승을 이끈 지휘자가 있었다. 대학 무대 최고 명장 중 한 명인 짐 보에하임 감독이었다. 앤써니가 NBA에 진출한지 몇 달이 지난 후 보에하임 감독은 “앤써니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대학 무대 최고의 선수였다”라고 극찬을 남겼다. 다음은 보에하임 감독의 말이다.

“카멜로 앤써니는 나뿐만 아니라 농구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대학농구 선수였다. 앤써니는 모든 걸 해내는 선수였다. 내가 본 대학농구 선수 중에 앤써니처럼 3점을 던지고 리바운드까지 해내는 선수는 극소수였다. 앤써니는 대학농구에서 뛴 어떤 포워드에도 밀리지 않을 패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농구에서 뛴 어떤 포워드에도 밀리지 않을 볼 핸들링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지난 시즌 앤써니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대학 최고의 선수였다. 앤써니에 근접할 만한 선수도 없었다. 적어도 지난 시즌은 어떤 선수도 앤써니에 견줄 만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 우연한 사건이 카멜로 앤써니와 다르코 밀리치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2003년 5월 22일 아침의 사건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앤써니는 2-3년 정도를 대학에서 보낸 뒤 NBA에 도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 남을 신입생 시즌을 보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학에서 더 이룰 게 없었던 앤써니는 결국 계획을 바꾼다. 대학 진학 1년 만에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것이다.

앤써니의 신입생 시즌이 대학 농구 역사에 남을 수준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이는 훗날 언론을 통해 종종 나왔던 ‘대학 농구 역사상 최고의 신입생 랭킹’과 같은 류의 기사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확인됐다. ESPN은 앤써니의 신입생 시즌을 역대 4위로 평가했으며, ‘블리처리포트’처럼 앤써니를 아예 1위로 평가한 곳도 있었다. 역사적인 활약을 펼치며 NBA 진출을 선언한 상태였으니 당시 앤써니의 주가가 크게 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당시 미디어가 가장 주목한 드래프트 참가자는 앤써니가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은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교를 오하이오주 우승으로 이끌며 ‘넥스트 조던’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고교생 르브론 제임스에 온통 쏠려 있었다.

덴버를 제치고 200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클리블랜드는 오하이오 애크런에서 태어나고 자란 르브론 제임스를 지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스타성, 잠재력도 르브론이 최고로 평가받던 상황이었다.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팀은 디트로이트였다. 사실 디트로이트가 이 드래프트에서 2순위 지명권을 얻은 과정은 행운에 가까웠다. 디트로이트는 1997년에 오티스 소프를 멤피스(트레이드 당시는 벤쿠버)에 트레이드하며 1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왔는데, 이 지명권이 6년 뒤에 전체 2순위 지명권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2-2003시즌에 멤피스는 28승 54패로 클리블랜드, 덴버, 토론토, 마이애미보다는 나은 성적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로터리 추첨에서 2순위 지명권을 얻을 확률이 7.1%에 불과한 상태였다. 때문에 멤피스의 지명권이 2순위 지명권이 된 것은 큰 이변이었다. 2002년에 동부 준결승, 2003년에 동부 결승 무대를 밟으며 이미 동부 대표 강호로 거듭나 있던 디트로이트로서는 전력에 화룡점정을 찍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기도 했다.

 

▲ 조 듀마스 사장은 밀리치치에 대해 "덕 노비츠키보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선택은 앤써니가 아닌 유고 연방 출신의 216cm 왼손잡이 빅맨 다르코 밀리치치였다.

사실 디트로이트가 밀리치치를 뽑는 과정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았다. 디트로이트의 조 듀마스 사장은 드래프트가 열리기 한 달여 전부터 밀리치치라는 유망주에 푹 빠져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공교롭게도 로터리 추첨 결과 발표 당일이었던 2003년 5월 22일에 발생했다.

5월 22일은 디트로이트와 뉴저지의 동부지구 결승 3차전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당시 디트로이트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는 뉴저지에서 열릴 3차전과 4차전을 대비해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듀마스 사장을 비롯한 주요 프런트 직원들도 뉴욕에 동행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디트로이트는 뉴욕 맨하튼에 위치한 존 제이 대학교의 체육관을 빌려서 연습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같은 건물의 다른 체육관에서 다르코 밀리치치가 개인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ESPN의 드래프트 전문 기자 채드 포드의 회상을 잠시 들어보자.

“밀리치치는 이미 며칠 전에 뉴욕에 도착해 있었고 그날 아침에도 디트로이트 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의 바로 옆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2개의 다른 체육관이 서로 분리된 형태로 한 건물 안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조 듀마스 사장에게 가서 물어봤다. 옆 체육관에서 누가 훈련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고. 듀마스는 모른다고 하더라. 그래서 밀리치치가 옆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듀마스는 곧바로 밀리치치의 훈련을 지켜봐도 되는지 밀리치치의 에이전트에게 물어봤다. 일종의 워크아웃이 즉흥적으로 열린 셈이다.”

이렇게 정말 우연한 기회로 열린 워크아웃을 통해 디트로이트 구단 전체가 밀리치치의 재능에 푹 빠지게 된다. 조 듀마스 사장, 릭 칼라일 감독을 비롯한 디트로이트 구단 관계자 모두 옆 체육관으로 넘어가 밀리치치의 워크아웃을 구경했다고.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채드 포드 기자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갑작스러운 워크아웃에서 밀리치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본 역대 최고의 워크아웃이었다. 선수 수백여 명의 워크아웃을 직접 지켜봤지만 그날의 밀리치치보다 워크아웃을 훌륭하게 해낸 선수는 없었다. 216cm의 밀리치치는 그때 17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요구하는 모든 플레이를 다 훌륭히 해냈다. 빅맨이 필요한 팀이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워크아웃이었다.”

누구보다 밀리치치의 재능에 반한 사람이 바로 조 듀마스 사장이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가드였던 존 배리는 이런 이야기를 귀뜸해주기도 했다.

“듀마스는 밀리치치가 정말 대단한 선수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덕 노비츠키보다 나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 NBA에서 괴물이 될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 대단했던 워크아웃에도 불구하고 디트로이트는 밀리치치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멤피스의 1라운드 지명권이 확률상 6-7순위 정도의 지명권이 될 것으로 보였고, 당시 주가를 고려했을 때 밀리치치는 그 전에 뽑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진행된 로터리 추첨 발표 방송에서 멤피스의 지명권이 무려 2순위 지명권이 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디트로이트는 한 달 뒤에 열릴 드래프트에서 밀리치치를 지명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는다.

“로터리 추첨 발표가 끝나고 디트로이트 구단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2순위 지명권으로 밀리치치를 뽑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얘기였다.” 밀리치치의 에이전트였던 마크 콘스타인의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카멜로 앤써니는 자신이 2순위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훗날 앤써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로터리 추첨 결과가 발표된 후) 나는 내가 디트로이트에 지명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가 예상대로 르브론을 지명한다면 2순위는 내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은 밀리치치였다. 이후의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밀리치치는 10시즌 동안 총 468경기에 출전해 평균 6.0득점 4.2리바운드를 기록한 채 NBA 커리어를 마감했다. NBA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실패한 2순위’의 전철을 밟았다.

반면 밀리치치에 밀려 3순위로 덴버 유니폼을 입은 카멜로 앤써니는 시대를 풍미한 스타플레이어가 됐다. 아직도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앤써니는 지금까지 1,114경기에 나서 평균 23.6점 6.5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올스타는 10차례, 올-NBA 팀은 6차례 선정됐으며 2013년에는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2008년, 2012년, 2016년에는 미국 농구대표팀 소속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향후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적인 선수이기도 하다.

2012년 드래프트에서 안드레 드러먼드를 지명한 후 조 듀마스 사장은 현지 취재진으로부터 2003년 드래프트의 선택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 ‘선택’이란 앤써니를 두고 밀리치치를 2순위로 뽑은 일이었다. 듀마스는 9년 전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밀리치치를 뽑은 후 우리 팀은 선수의 정보를 최대한 취합하기 위해 리그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하는 팀이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밀리치치에 대해 20% 정도 밖에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뽑았다. 밀리치치라는 선수에 대해 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멜로가 디트로이트에 갔다면

지난 3월 말 앤써니는 절친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진행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흥미로운 말을 꺼내 이목을 끌었다. 2003년 드래프트에서 디트로이트가 자신을 2순위로 지명했다면, 자신이 이미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디트로이트에 지명됐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우승 반지를 2개나 3개 정도 가지고 있을 거야.”

앤써니의 이 코멘트는 자가격리로 지쳐 있던 NBA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심지어 당시 디트로이트에서 뛰었던 선수들과 래리 브라운 전 감독까지 나서서 앤써니의 코멘트에 대해 의견을 직접 밝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앤써니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앤써니 없이도 디트로이트는 2000년대 중반 NBA에 큰 획을 그은 팀이었다. 2004년과 2005년에 잇따라 파이널 무대를 밟았으며 2004년에는 레이커스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05년 파이널에서도 7차전 혈투 끝에 샌안토니오에 석패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3년 연속 동부지구 결승 무대를 밟았다. 언제든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이었던 것이다.

이런 디트로이트에 루키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친 앤써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가 훨씬 더 무서운 팀이 됐을 가능성은 분명히 높다.

2003-2004시즌과 2004-2005시즌에 디트로이트의 지휘봉을 잡았던 래리 브라운 전 감독도 앤써니의 의견에 찬성 표를 던졌다. 그는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앤써니가 우리 팀에 있었다면 더 많은 우승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주전 포인트가드이자 리더였으며, 덴버와 뉴욕에서 앤써니와 함께 뛴 경험이 있는 천시 빌럽스도 생각이 같았다. 빌럽스는 “만약 우리가 앤써니를 뽑았다면 우승을 3번은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3년 드래프트에서 밀리치치와 함께 상위 5순위 이내에 지명됐던 르브론, 멜로, 웨이드는 훗날 미국 농구 역사의 중심에 섰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디트로이트 골밑의 핵심 수비수였던 벤 월러스는 앤써니가 디트로이트에 왔다면 오히려 팀이 와해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디트로이트가 카멜로 앤써니를 뽑았으면 우승을 단 한 번도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앤써니는 출전시간을 보장받길 원하는 선수였다. 앤써니의 그런 상황이 우리 팀의 케미스트리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앤써니가 우리 팀에 왔다면 테이션 프린스도 자신이 가진 수비수로서의 잠재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디트로이트의 다르코 밀리치치 지명은 NBA 역사에 남을 중요한 사건이 됐다. 천시 빌럽스와 벤 월러스 중 누구의 생각대로 됐든 디트로이트가 앤써니를 지명했다면 이후 리그의 역사는 크게 뒤바뀌었을 것이다. 당시 빅맨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던 덴버가 드웨인 웨이드를 3순위로 지명하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2004년 샤킬 오닐의 마이애미행, 2010년 마이애미의 빅3 결성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배드보이즈 2기'(물론 현지에서는 200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이후 침체기가 길어졌던 디트로이트의 역사도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2003년 드래프트에서 디트로이트가 내린 결정이 NBA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음이 분명한 이유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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