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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MVP의 역사를 새로 쓰는 박혜진

| 인터뷰에세이 ‘단편’(斷片/短篇)
| 정규리그 5회, 총 8번의 MVP를 수상한 박혜진
| WKBL 전설을 향한 본격적인 출발은 지금부터

 

[루키=박진호 기자] 2019년 2월 9일 청주체육관. 

청주 KB스타즈와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2018-19시즌 6번째 맞대결이 펼쳐졌다. 20승 5패의 KB가 한 경기를 더 치른 우리은행(20승 6패)을 근소하게 앞선 채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두 팀 간의 맞대결은 1~2라운드에서 우리은행이 연승을 거뒀지만 이후 KB가 3번을 내리 이기며 상대 전적을 뒤집은 상태.

정규 리그 우승 여부에 가장 큰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였던 이 경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은행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KB는 3쿼터, 외국인 선수 카일라 쏜튼이 U파울 2개로 퇴장을 당하면서 위기를 맞았고, 한때 12점 차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4쿼터, KB가 힘을 냈다. 점수 차는 좁혀졌고, 우리은행 역시 김정은과 외국인 선수 모니크 빌링스가 퇴장을 당했다. 염윤아의 3점슛으로 1점 차로 따라붙은 KB는 결국 종료 12초 전, 박지수가 포스트업을 통해 페인트존 득점을 올려놓으며 역전에 성공했다.

최후의 반격에 나선 우리은행의 선택은 ‘에이스’ 박혜진이었다. 자유투라인에서 박지수와 마주한 박혜진은 자신 있게 왼쪽을 돌파하며 드라이브인을 시도했다. 하지만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온 박지수의 손이 더 높았다. 박혜진의 슛은 박지수의 블록에 막혔고, 마지막 득점에 실패한 우리은행은 80-81로 패했다. 6년 연속 이어진 우리은행의 통합우승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던 순간이다. 

박혜진의 마지막 공격을 박지수가 블록으로 저지한 장면은 WKBL 왕좌와 MVP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이정표와 같았다. 우리은행의 왕조가 막을 내리고 KB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모두가 직감했다.

하지만 1년 후, 우리은행은 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역사를 썼다. 

2020년 3월 5일, 아산이순신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은행과 KB의 6라운드 경기에서 우리은행은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궜다. 한 때 13점 차로 끌려가던 승부를 뒤집은 우리은행은 KB와의 승차도 바꾸며 정규리그 1위로 올라섰고, WKBL의 대표적인 ‘포커페이스’ 박혜진도 경기 종료 순간, 더없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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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즌, 리그에서 가장 빛났던 단 한 명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칭호는 다시 박혜진에게 돌아갔다. 통산 5번째 정규리그 MVP. 챔피언 결정전 MVP 3회를 포함하면, 박혜진은 무려 8번이나 MVP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주인공이 됐다. 정선민 전 신한은행 코치(정규리그 7회, 챔프전 1회)와 더불어 WKBL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이다. ‘우리은행의 또치’ 박혜진은 지난 올림픽 최종예선을 거치며 ‘인터내셔널 또치’로 거듭났고, 이제는 가히 ‘WKBL MVP 트로피의 연인’이라고 부를 만 하다.

*역대 정규리그 최다 MVP 수상자
정선민 7회 / 박혜진 5회 / 정은순, 변연하 3회

*역대 챔피언결정전 최다 MVP 수상자
타미카 캐칭, 하은주, 박혜진 3회 / 김영옥, 전주원, 임영희 2회

지난 2017년 12월, WKBL은 출범 20주년을 맞아 실시한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WKBL 그레이트 12’를 발표했다. 당시 박혜진은 팀 선배 임영희와 더불어 현역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레이트 12’ 중 막내이자 유일한 20대의 젊은 선수였다.

논란이 일었다. 현역 선수가 대상에 포함된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고, 과연 박혜진이 함께 선정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여의 세월이 흐른 현재, 박혜진은 역대 MVP 최다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이제 한 개의 트로피만 더 하면 WKBL 역사에 가장 많은 MVP를 받은 선수가 된다.

“정말 MVP에는 욕심이 없어요. 제가 MVP를 목표로 해왔다면 오히려 이만큼 상을 받지도 못했을 거로 생각해요. 그냥 상복이 많은 거 같아요.”

박혜진은 MVP 수상 소감으로 가장 먼저 “다시 못 받으리라 생각했던 상을 받았다”고 했다.

“MVP는 자신도 잘해야 하지만 팀 성적도 따라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임)영희 언니가 은퇴하면서 전력도 떨어졌고, 우승을 바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 했어요. 다시 우승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저도 나이를 먹고 있으니, 또 정상에 선다면 그때는 ‘다른 선수들이 주역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은행의 우승 가능성이 예년보다 줄어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자리 잡은 KB는 전력의 완성도를 더해갔지만, 우리은행은 박혜진과 함께 통합 6연패를 이끌었던 임영희가 은퇴했다. 박지현, 김소니아 등의 성장이 있었지만 당장 임영희의 공백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즌이 되리라 예상됐다. 시즌 첫 경기에서는 삼성생명에 패했다. 분명 어려움이 컸던 시즌이었다.

“낯설었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처음 접하는 게 참 많았어요. 이렇게 시상식 없이 상을 받은 것도 처음이잖아요? 시즌 중에 대표팀 일정이 이렇게 많았던 것도, 시즌이 조기 종료된 것도 처음이고... 분명 힘들었던 것도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시즌을 마치고 상도 받고 하니까 그런 건 다 잊히는 것 같아요.”

 

아쉬움이 큰 정규리그 우승 탈환
2019-20시즌은 정상적으로 종료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시즌이 중단됐다. WKBL은 리그를 조기 종료하며 1위 우리은행을 정규리그 우승팀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 우승팀은 ‘없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사실상 정규리그 우승이 좌절된 후, 플레이오프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칼을 갈던 KB는 좌절했다. 창단 후 공식적으로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가능성이 커졌던 하나은행도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모든 팀이 각각의 이유로 리그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이는 우리은행도 마찬가지. 2년 만에 왕좌를 탈환했지만 기쁨보다 아쉬움이 크다. 한 경기가 모자라 정규리그 우승을 자력으로 확정하지 못했고, 우승의 기쁨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이번 우승에는 팬들의 함성도, 화려한 폭죽도, 그리고 벅찬 트로피 수여식도 없었다. 우승 헹가래 후 짧게나마 위성우 감독을 향해 시즌의 스트레스를 풀던(?) 우리은행 특유의 세리머니도 하지 못했다.

“(박)지현이도 감독님한테 쌓인 게 많았을 텐데... 발뺌하는 게 아니고, 저는 솔직히 한 2년 하다가 안 했거든요. 그런데 지현이는 (감독님을) 밟아보지 못했잖아요? 지현이가 ‘이번에 우승을 하면 어떤 반응일까’가 살짝 궁금하긴 했는데 그걸 확인 못 했네요.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우리가 자력으로 우승을 하면서 마지막 마무리를 못 했다는 게 제일 아쉬워요. 우승하면 경기장에서 팬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데, 그런 걸 하지 못했잖아요. 정규리그 우승도 하고 상도 받았지만 그래서 아쉬움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우리은행은 3월 20일 오전,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다가 자신들의 우승 소식을 접했다. 이사회에서 리그 조기 종료와 함께 1위였던 자신들을 정규리그 우승팀으로 결정했음을 뉴스를 통해 알았다. 

“오전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즌이 끝났다고 하니까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떠서 운동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웨이트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올라갔는데, 감독님이 ‘그래도 마지막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슈팅을 쏘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 당장 시합도 없는데 무슨 슈팅이에요? 당황했죠. 솔직히 ‘이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지’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이번 시즌 마지막이니까 기분 좋게 슈팅을 쐈어요. 아주 우리은행답게 시즌을 마쳤죠!”

 

만족을 모르는 에이스
박혜진은 스스로 상복이 많은 선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트로피와 개인상이 오롯이 상복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모든 감독이 박혜진을 가장 첫머리에 꼽는 이유가 분명 있다. 스스로 ‘농구 잘한다’는 말을 농담으로도 꺼내지 않는 박혜진이 생각한 자신의 MVP 비결은 무엇일까?

“정말로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잘한다는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한테 만족을 못 하니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말은 누구보다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저 스스로한테 부끄럽지 않게, 정말 열심히 했다고는 말할 수 있기 때문에, MVP라는 상은 그렇게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려고요. 그러면 조금 뿌듯하게 여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박혜진은 이번 시즌에도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공격력에서는 강이슬, 패스는 안혜지를 보면서 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강)이슬이는 슛 터치가 정말 좋잖아요? 볼 때마다 저런 건 나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같은 가드인데 나는 왜 (안)혜지처럼 패스를 못 하는지 고민도 했고요. ‘혜지처럼 저런 타이밍에 저렇게 패스를 해봐야지’ 하면서 배우기도 했던 것 같아요. 경기를 많이 보는 편인데, 자기만의 장점이 확실한 선수들을 보면 다 닮고 싶고, 배우고 싶어요.”

KB의 박지수는 신인 시절부터 리바운드와 블록에서는 자신의 경쟁력을 믿었다 “선배 언니들의 벽이 높겠지만, 국제대회에서도 리바운드와 블록은 잘했었으니까 막내라도 처음부터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박혜진이 언급한 강이슬 역시 “3점슛이 나를 상징하는 가장 큰 장점이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후배들이 당찬 자신감으로 도전해오는 이 시점에서 박혜진은 정말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장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좀처럼 자신의 장점을 당당하게 꺼내지 못하는 박혜진을 채근하자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조금만 어렸어도 체력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제는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저는 그냥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조금씩 할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래서 꾸준함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제가 제 자랑하는 것 같잖아요.”

자신을 칭찬하는 것에 영 재능이 없는 박혜진은 “어려서부터 욕만 먹고 자라서 자존감이 낮다”며 말을 아꼈다. 

 

낮은 자존감에도 MVP를 총 8번이나 받은 ‘인간승리의 아이콘’ 박혜진은 이제 바뀐 FA 규정에 따라 스스로 우리은행에 남느냐, 아니면 다른 팀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최고 연봉자는 오히려 팀을 옮길 수 없던 WKBL FA 제도가 수정됐고, 박혜진도 데뷔 후 처음으로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기회를 갖게 됐다.

바뀐 규정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 박혜진의 선택은 뒤이어 박혜진과 같은 입장에 설 선수들에게 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박혜진은 “제도가 긍정적으로 바뀐 부분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지만, 너무 부담스럽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내년, 박혜진과 똑같은 권리를 획득하게 되는 하나은행의 강이슬이 “바뀐 FA 적용 대상이 내가 처음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박)혜진 언니가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나는 존경하는 우리 선배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내년에 그대로 따라 하면 될 것 같다”고 한 말을 전하자, 내내 진지했던 박혜진 입에서 “이 쓰레기!”라며 처음 웃음 섞인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강이슬은 박혜진의 삼천포여고 4년 후배다.

어떤 팀을 선택하든, 박혜진의 농구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 없이 계속 발전만을 위해 달려온 그의 시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박혜진의 농구는 계속된다. FA 협상을 앞두고 자신의 미래를 확정하지 않았기에 다음 시즌의 목표를 명확히 밝히기는 어려웠지만, 유니폼 색깔과 관계없이 박혜진이 바라보는 결승점은 항상 같다.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하는 게 우선의 목표에요. 감사하게도 부모님이 잘 낳아주셔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아프지 않고 운동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팀이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WKBL MVP 역사에 찬란한 선배들과 함께 선 박혜진이 본격적으로 써나갈 전설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박진호 기자  ck17@rook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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