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하나원큐 2019-2020 여자프로농구는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창단 11번째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20일 오전, 훈련장에서 리그 종료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은행 선수단은 덤덤히 웃은 뒤 오전 훈련을 이어갔다고. 때 아닌 시즌 종료는 WKBL 6개 구단 선수단 모두를 허탈하게 했지만, 지난 여름부터 오직 우승 한 길만 바라보며 무수한 땀방울을 흘린 우리은행 선수단이야말로 이런 결말은 실로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시즌보다 더 젊어지고 더 역동적으로 바뀐 2019-2020시즌 우리은행은 누구의 도움없이 자신들의 두 손으로 왕좌를 탈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제거한 매직넘버

지난 5일, 우리은행은 라이벌 KB스타즈와 6라운드 맞대결에서 4쿼터 막판 거짓말 같은 역전극을 일궈내며 54-51로 승리했다. 우리은행은 이날 승리로 1위를 탈환함과 동시에 KB와의 시즌 상대전적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이후 KB가 BNK에게 한 번 더 패하며 우리은행의 정규리그 우승 매직넘버는 3경기를 남겨두고 단 1만 남겨놓고 있던 상황.

그러나 우리은행은 매직넘버를 스스로 줄이지 못했다. 남은 매직넘버 1은 우리은행도, KB도 아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의해 사라졌다.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와 함께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다 우승 기록인 11번째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됐다.

그러나 잠실의 만원 관중 앞에서 감격적으로 V11을 달성한 기아와 달리 우리은행의 11번째 우승은 조용한 장위동 훈련장에서 이뤄졌다.

11번의 우승 중 7번의 우승을 책임진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축하를 받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많이 당황스럽다"면서 “우승이 아닌 1위일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오전 훈련 도중 갑작스럽게 종료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은행은 동요 없이 훈련을 이어갔다는 후문. 우승을 확정할 때마다 세리머니라는 미명 아래 위 감독을 코트에 눕혀 밟아왔던 선수단에게는 더욱더 슬픈 엔딩일 수도. 어쨌든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우리은행은 2년 만에 다시 왕좌에 올랐다. 

 

사라진 18%

지난 시즌 우리은행은 35경기에서 총 2,548득점을 기록했다. 김정은이 461점으로 팀 내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고, 박혜진이 437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임영희 코치의 마지막 선수 시절 기록인 358점이었다. 불혹의 나이인 마흔 살에 새긴 기록이었다.

임영희는 최강 우리은행 왕조의 산 증인이다. 위성우 감독 부임 후인 2012-2013시즌부터 2018-2019시즌까지 7시즌간 총 245경기 17,168득점을 기록했다. 임영희는 245경기 중 242경기를 나왔다. 192승 50패를 기록했으며, 이 기간 리그에서 150경기 이상을 치른 선수 중 임영희보다 높은 승률(79%)을 가진 선수는 아무도 없다. 득점은 3,083점으로 팀이 기록한 17,168점 중 가장 높은 18% 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2018-2019시즌을 마치고 선수 임영희가 은퇴를 결정하면서 우리은행은 그의 빈자리 18%를 다른 선수로 메워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에 대해 위성우 감독은 “예전 양지희가 나갔을 땐 김정은이 들어와 자리를 메워줬다. 그러나 임 코치가 나갈 땐 대신할 사람이 없어 막막했다. (박)지현이가 후보로 기대를 받긴 했지만, 이제 1년 차인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임영희 은퇴 후 1년 후. 우리은행은 사령탑의 걱정을 기우(杞憂)로 만들었다. 2012년부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 시즌 우리은행의 평균 득점은 72.8점으로 리그 1위였다. 그렇다면 올 시즌은? 7년간 득점 18%를 책임졌던 임영희 코치가 빠졌음에도 우리은행은 70.6점으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소폭 깎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선방. 이뿐만 아니다. 평균 실점은 지난 시즌 60.9점에서 60.2점으로 더 ‘짠물’이 됐고, 팀 어시스트는 15.8개에서 15.9개로 오히려 늘었다. 속공 역시 경기당 3.3개에서 3.9개로 올랐다.

중심에는 신예 박지현이 있었다. 위성우 감독 역시 시즌을 마치고 “박지현이 언니들을 잘 도왔다”고 따로 언급했을 정도로 박지현의 공로를 인정했다. 공격 전술이나 수비 이해도, 코트 위 리더십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공헌도를 따진다면 임영희와 박지현은 ‘비교 불가’겠지만, 수치로만 따지면 2년 차 새내기 박지현은 충분히 제 몫을 해낸 듯 보인다.

19-20 박지현 34분 27초 8.4PTS 5.6REB 3.4AST 1.4STL 0.8BLK 
18-19 임영희 29분 33초 10.5PTS 3.3REB 3.6AST 1.0STL 0.2BLK

득점은 확실히 임영희보다 떨어졌다. 단순 득점 볼륨도 그렇지만, 박지현의 야투율은 36%로 임영희의 마지막 해(40%)에 미치지 못했다. 박지현은 대신 다른 부분에서 빛났다. 리바운드와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은 곳에 올렸다. 

5.6리바운드는 국내 선수 기준 리그 전체 5위, 3.4어시스트는 9위, 1.4스틸은 7위, 0.8블록슛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리바운드와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4개 부문에서 모두 1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리그에서 단 둘뿐이다. 박지현 그리고 지난 시즌 통합 MVP였던 박지수. 

시즌 중 롤러코스터를 타긴 했지만, 박지현의 2년 차는 분명 위성우 감독의 기대와 우려보다 괜찮았던 시즌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올 시즌 마지막 득점이 우리은행의 우승을 결정지은 KB전 종료 직전 터진 것임을 떠올린다면 더 그렇다.

 

든든한 기둥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팀의 중심은 박혜진이다. 올 시즌 박혜진의 특별한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경기당 13.6개의 야투 시도 개수다. 2008-2009시즌 데뷔한 박혜진은 이제껏 한 번도 평균 13개 이상 야투를 던진 시즌이 없었다. 임영희 코치의 말년과 외국인 선수의 득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지난 시즌에도 야투 시도는 12.2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 시즌, 그는 데뷔 후 처음으로 13개 이상의 평균 야투를 기록했다. 어시스트 또한 지난 시즌 4.9개에서 올 시즌 5.4개로 크게 늘었다. 단순 숫자로만 봐도 공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영희, 박혜진, 김정은 세 명에서 박혜진, 김정은 두 명으로 줄어드는 건 엄청난 차이예요.” 위성우 감독이 시즌 도중 했던 말이다. “상대 수비가 우리가 어느 쪽에서 공격을 시도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들어가잖아요. 아마 혜진이와 정은이가 가장 크게 느끼고 있을 걸요.”

위 감독은 두 명이 뛰는 것도 힘들다 말하는데, 심지어 김정은은 대표팀 차출 이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결장했다. 가장 중요했던 5라운드와 6라운드, 김정은은 부상에서 돌아와 5경기에 나왔으나 이 기간 평균 득점은 단 3.6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김정은이 헤맸던 이 기간 7경기서 6승 1패를 거뒀다. 박혜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혜진은 7경기에서 평균 36분을 뛰면서 15.6점 5.1리바운드 5.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40분 풀타임 경기가 7경기 중 4경기나 됐고, 야투 시도는 무려 16.4개로 같은 기간 2위인 강이슬(14.4개)보다 경기당 2개가 더 많았다. 팀이 가장 에이스를 필요로 한 순간,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낸 박혜진은 정규리그 MVP를 수상할 자격이 있는 선수다.

 

김정은은 어땠을까? 비록 시즌 막판 부상으로 평균 기록을 많이 까먹었지만, 김정은의 올 시즌 초반 기세는 MVP의 그것이었다. 특히 만나는 매치업 상대마다 기록을 분쇄하며 ‘공수겸장’의 포스를 내뿜던 초반 라운드, 김정은은 “경기 후 기록지를 볼 때 내 점수보다 매치업 점수를 먼저 본다. 수비가 재밌다”고 말했을 정도로 수비 코트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 말년에 수비에 재미를 느끼면 어떻게 되냐고? KB스타즈 카일라 쏜튼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은행은 KB와 붙을 때 항상 외국인 선수를 박지수에게 붙이고, 김정은을 상대 외국인 선수와 매치업한다. 덕분에 지난 시즌부터 김정은의 KB전 파트너는 항상 쏜튼이었다. 

그런데 올 시즌 쏜튼의 기록지를 보면 김정은의 위엄이 느껴진다. 쏜튼은 28경기에서 19.1점을 기록하며 득점 부문 리그 2위를 차지했는데, 우리은행과 6경기에서는 평균 29분 12초로 풀타임(외국인 선수는 2쿼터를 뛸 수 없다)에 가까운 시간을 뛰면서도 고작 11.8점에 그쳤다. 

컨디션 문제였을까? 아니다. 쏜튼은 올 시즌 우리은행전 6경기에서 자유투 22개를 얻어 21개를 성공했을 정도로 매 경기 감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우리은행의 김정은이었을 뿐이다. 김정은은 쏜튼을 34% 야투율로 꽁꽁 묶었다. 경기당 실책 역시 2.8개로 시즌 실책(2.3개)보다 훨씬 많은 실책을 이끌어냈다. 쏜튼이 올 시즌 우리은행을 상대로 15득점 이상을 기록한 경기는 단 한 경기, 2월 20일 5라운드 경기였는데 이날이 바로 김정은이 부상으로 유일하게 KB전에 결장했던 경기다.

르샨다 그레이는 모처럼 위성우 감독의 마음에 쏙 들었던 외인이었다. 지난 시즌 우리은행은 외국인 선수 문제로 시즌 내내 골치가 아팠다. 처음 뽑았던 크리스탈 토마스는 외국인 선수치고 득점력이 너무 떨어졌다. 23경기를 뛰면서 10.3점. 리바운드는 경기당 12.5리바운드로 나쁘지 않게 잡아줬으나, 경기당 자유투 시도 횟수가 3.0개에 그쳤을 정도로 적극성이 떨어지는 모습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자유투 성공률은 45%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만의 고집이 강해 코치진의 조언도 잘 듣지 않았다. 시즌 막바지 뒤늦게 모니크 빌링스로 교체했으나, 빌링스는 수비 이해도가 떨어졌다. 

이에 비해 그레이는 공수에서 우리은행의 입맛에 쏙 맞는 외인이었다. 2대2 공격에 대한 이해도가 좋았고, 적극성과 승부욕은 가끔 과할 정도였다. 84%에 달하는 자유투 성공률은 덤. 시즌 도중 머리를 우리은행의 색깔인 파란색으로 염색할 정도로 팀에 대한 애착도 컸다. 우리은행이 그레이에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올 시즌 너무 좋은 활약을 한 탓에 내년에는 우리은행과 한 배를 타지 못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정도랄까?

팀 MVP | 박혜진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했다. 만 30세를 맞이했음에도 40분 뒤 한 쿼터를 더 뛸 수 있을 듯한 체력, 지난 시즌보다 더 정교해진 3점슛 성공률, 덤으로 이제는 국제대회 경쟁력까지. 챔프전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을 정도로 박혜진은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팀 RISING STAR | 김소니아

농구와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그녀다. 지난 시즌 5.7점 6.7리바운드에서 올 시즌 8.6점 6.9리바운드로 확실히 레벨업했다. 김정은이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시즌 막판, 특유의 에너제틱한 움직임으로 팀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위성우 감독도 “열애설 이후 부담이 컸을 텐데 잘해줬다”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열애를 인정하기 전 19경기에서 8.1점을 기록하다가 열애 인정 후 8경기에서 9.8점으로 더 잘했다는 사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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