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에세이 ‘단편’(斷片/短篇)
|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맏언니
| ‘전에 없던 캐릭터’ 청주 KB스타즈 염윤아

[루키=박진호 기자] KB는 지난 1963년 여자농구단을 창단했다. 전통의 여자농구 명문인 KB는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팀 중 하나이며, 실업 무대에서 맹위를 떨쳤고, 금융부가 다소 약세에 놓였던 농구대잔치 시절에도 명맥을 이었던 대표적인 팀이다.

그러나 WKBL이 출범한 이후로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우승이 없었던 팀. 꾸준한 투자가 이어지고 슈퍼스타가 배출되고 영입됐지만, 유감스럽게도 우승에는 한 발이 모자랐다.

2017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0년의 약속’ 박지수를 기적적으로 뽑았고, 2018-19시즌을 앞두고는 우승후보 1순위로 평가받았지만, 임영희-김정은-박혜진의 트로이카를 넘지 못하고 우리은행의 통합 6연패를 지켜봐야했다.

하지만 1년 뒤, KB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V1을 달성하며 우리은행 왕조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2007-08시즌의 정선민(당시 신한은행) 이후 최초로 정규리그와 챔프전에서 모두 만장일치 MVP를 수상한 박지수가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KB의 우승을 언급하며 모두가 ‘염윤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염윤아는 이적 첫해, 오버페이 논란을 우승으로 되갚았고,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
“국장님! 염윤아 좀 꼭 잡아주십시오!”

2018년 3월 21일 청주의 모처. 팀의 사령탑으로 2번째 시즌을 마친 안덕수 KB스타즈 감독이 말했다. KB의 감독으로 임명되며 길었던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금의환향했던 안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는 기적 속에 박지수를 품었다.

부임 첫 해, 플레이오프에 오르기는 했지만 정규리그 승률은 5할에 미치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두 번째 시즌에 챔피언결정전에 올랐지만 우리은행에게 3연패로 무릎을 꿇었다. 

아쉬움이 많았다. 시즌을 마치고서 아쉬움이 없는 지도자가 있겠냐만, 안덕수 감독은 더욱 그랬다.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1위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KB는 7라운드 막판까지 정규리그 1위의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우리은행과의 마지막 3번의 맞대결을 모두 이기며 여세를 몰았다.

하지만 나머지 4팀 중 우리은행을 잡은 팀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리그 맞대결에서 우리은행을 앞섰지만 끝내 순위를 뒤집지 못했다. 플레이오프 2차전 패배도 뼈아팠다. 2연승으로 플레이오프를 마쳤으면 며칠의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3차전까지 승부를 펼친 탓에 하루 쉬고 챔프전에 나섰다. 그리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믿었던 다미리스 단타스의 부진도 아쉬웠다. 

청주에서 열린 챔프전 3차전을 내주고, 우리 집 안방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는 상대팀을 뒤로한 채, KB스타즈 선수단은 청주의 모처에서 한 시즌을 정리하는 납회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안덕수 감독은 FA시장에서 염윤아를 잡아달라고 말한 것이다.

술 한 잔을 걸친 후였지만, 주량으로는 대한민국 농구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안 감독이기에 취중에 내뱉은 허언일리는 없다. 하지만 하나은행이 팀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은 염윤아를 놓칠 리 없기에 장원석 당시 KB 국장은 안 감독의 말을 마음에만 담아 놓았다.

#2
“우리 팀은 진~짜 아닙니다! 내 손목을 걸게요! 하하.. 아니 내 목을 걸면 믿어주실까?”

작년 4월, 통합 6연패를 마치고 동네 아저씨마냥 편한 복장으로 서울 신천에서 만난 위성우 감독은 자유계약선수(FA) 이야기를 하던 중, 영입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미 지난 시즌 김정은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뒀던 우리은행이기에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자신에게 ‘양치기 소년’이라는 별명을 붙였던 내가 못미더웠는지 그는 손목도 아니고 목을 내걸며 “영입은 없다”고 강조했다.

“하나은행은 어떻게든 염윤아를 잡았어야 했을텐데”라고 혼자말을 하던 위 감독은 문득 “KB로 가지 않을까요”라고 말을 던졌다. 그러면서 “박지수에... 강아정에... 지금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염윤아까지 가면 난 이제 어떻게 하냐”며 엄살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KB가 가드 보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당시 FA시장에는 염윤아를 비롯해 이경은, 박태은, 고아라가 1차 협상이 결렬된 상태였다. 위성우 감독은 “내가 KB감독이라면 염윤아를 선택할 것”이라며 염윤아의 행선지를 KB로 예상했다. 

#3
“엄마가 충남 당진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어서 서울로 발령이 난 아빠랑 같이 상경했어요. 아빠랑 사니까 저 혼자 할 일이 없잖아요. 집에서 그냥 먹기만 한거야! 시골에서 서울로 왔으니 얼마나 맛있는 게 많아? 햄버거 먹고, 인스턴트 음식 다 먹으면서 뚱뚱하게 살을 찌우고 있었던 거예요. 아빠가 얼마나 싫었겠어요? 퇴근 하고 집에 왔더니 딸이 과자 먹고 뚱뚱하게 늘어져서 돼지가 되어 가는데... 마침 숭의여고 부장선생님이 운동 시키라고 말을 하셨고, 아빠가 나한테 농구하겠냐고 물어봤는데, 그걸 또 내가 하겠다고 했대요.”

1987년생인 염윤아는 서울 홍대부중의 코치로 부임한 아버지 염중찬 감독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상경했고, 방과 후 활동으로 무럭무럭 살을 찌우다가 그 모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농구공을 처음 잡았다.

청소년대표를 거칠 만큼 기량을 인정받은 염윤아는 2006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2라운드 5순위, 전체 11순위로 금호생명에 선발됐고, 직후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우리은행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1라운드 2순위로 선발된 이경은과 염윤아가 우리은행으로, 2라운드 8순위로 선발된 고아라(은퇴)가 베테랑 센터 이종애와 함께 금호생명으로 옮기는 트레이드였다. 

“그때 우리은행은 선수들이 가기 싫어하는 구단이었어요. 박명수 감독님 때였는데 훈련 힘들다고 소문이 났었거든요. 저 프로 가기 1년 전에 청소년대표가 같이 해외에 있을 때 드래프트가 열렸고 (김)보미 언니(삼성생명)가 우리은행에 뽑혔는데, 엄청 울더라고요. 그만큼 무서운 팀이었어요. 아.. 훈련 힘든 거는 우리은행 전통인가...”

김보미는 2017신입선수 선발회에서 박지수가 KB에 선택됐을 때도 이 장면을 KB선수들과 함께 모여서 보다가 “이제 됐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가히, 눈물의 여왕이다. KB에 있을때도 그렇게 박지수를 아꼈다고. 그러나 ‘인생사 세옹지마’라고, KB는 결국 김보미가 삼성생명으로 떠난 후 우승컵을 안았다.

#4
같은 해 전체 1순위는 'WKBL 역대 최고 1순위 신인'으로 꼽히는 김정은(우리은행)이다. 김정은이 화려하게 데뷔한 것과 달리 염윤아는 2006겨울리그와 여름리그, 2007겨울리그에서 단 1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단일리그 원년인 2007-08시즌, 26경기에 평균 8분 31초를 뛰며 프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데뷔 시즌을 끝으로 프로에서 모습을 감춘다.

“아니... 살다 살다 경기에 안 내보내준다고 농구 못하겠다는 애들은 봤어도, 경기 내보내준다고 못하겠다는 애들은 처음이었어. (염)윤아도 그랬어! 그러더니 비시즌 체력 훈련 하루 전날, 농구를 그만두겠다는 거야! 그렇게 나갔다가 체력훈련이 다 끝나고 나니까, 다시 하겠대.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

당시 염윤아가 뛰던 우리은행의 감독은 본지 박건연 고문이었다. 박 고문은 “염윤아가 운동 능력도 있고, 재능도 있는 것 같아서 중용했는데, 경기 뛰는 거 자체를 힘들어했고, 체력훈련에 부담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며, 지금 잘하는 걸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며 웃었다. 박건연 고문의 이러한 한탄에 염윤아도 이제는 웃으며 동의한다.

“감독님이 기회를 주셨는데, 진짜 경기를 감당하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았어요. 청심환 먹고 뛰었으니까 말 다한 거지... 연습도 열심히 하고, 감독님도 칭찬해주셔서 좋았는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는 거예요. 코트가 무서웠어요. 선수가 코트를 무서워하는데, 뭘 할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체력훈련이 싫어서 프로 생활을 포기했다는 부분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농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시즌을 뛸 때 이미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마음을 굳혔는데 체력훈련을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체력훈련까지 갔다 오면, 못 그만둘 것 같았어요.” 

우리은행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마치고 온 후에 복귀 의사를 전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박건연 고문이 ‘기억의 오류’를 갖고 있다고 해명에 나섰다.

“아니에요. 제가 확실히 아는데,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 다음날 하루 만에 강원도 양구에 내려갔어요! 왜냐하면, 집에다가 그만뒀다고 말했다가 엄마한테 끌려서 다음날 바로 체력훈련지로 갔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선수들에게도 말을 다했고, 구단에도 보고가 끝나서 안 된다’고 하셨어요.”

#5
프로에 적응하지 못한 ‘비운의 청소년 대표’ 염윤아의 농구 인생은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었다...여야 하는 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농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는 염윤아의 변덕, 혹은 개과천선은 이 후에 이루어진다. 어쩌면 염윤아가 “나갔다 와야 하는 선수는 나가서 정신 차리고 들어오는 게 낫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농구를 그만두고 나온 염윤아는 1주일 만에 실업팀인 대구 동아백화점으로 진로를 선택한다. 본인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선택이다.

‘트레이너를 하던가, 농구를 그만뒀으니,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대학도 가고 싶고, 유학도 가고 싶다’는 것이 원래 염윤아의 목표. 그러나 현실은 그냥 무대만 바뀐 농구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부모님은 ‘1년 뒤 다시 프로에 도전하라’는 목표까지 설정해줬다고.

“선수가 농구를 관두면 모든 게 다 고생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엄마가 쉴 시간도 안 주고 집안일을 시켰어요. ‘밥해라’, ‘청소해라’, ‘빨래해라’ 뭐 그러면서, 가정주부도 아니고 거의 하녀같이 괴롭히다시피 하셨어요.”

시집 간 지금도 집안일을 남편보다 못 하는 염윤아 임을 감안하면, 어머니의 괴롭힘(?)은 무척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염윤아 본인은 “더 이상 농구는 못한다”고 강조했지만, 부모님의 주변인들은 “염윤아는 할 수 있다”며 희망고문을 이어갔다. 결국 염윤아는 주말에는 동아백화점에서 농구를 했고, 주중에는 홍대부중에서 개인 훈련을 했다. 

그런데 “1년 뒤에도 난 안 될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집안의 평안을 위해 1년짜리 시한부 선수생활을 연장한 염윤아에게 이 기간 동안, 변화가 생겼다. 실업 무대에서 다른 이들의 눈치도 안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무서웠던 농구가 재미있어졌다는 것.

이렇게 1년을 보낸 염윤아는 신세계에서 다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이때 신세계를 이끌던 정인교 감독의 눈에 띄어 다시 프로에 복귀했다.

원 소속팀이었던 우리은행이 염윤아에 대한 권리를 쿨하게 풀어줬기에 염윤아는 실업에서 뛰는 것도, 이후 신세계로 복귀하는 것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염윤아에 대한 기대치가 당시 우리은행에게는 없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6
‘농구선수 염윤아’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부모님이 상당히 자주 언급된다. 진로 결정과 선택에서 때로는 자신보다 부모님의 의견을 따랐던 경우가 많다.

염윤아의 초중고는 물론 프로 초반의 팀 선배였던 본지 컬럼니스트 김은혜 해설 위원은 염윤아에 대해 “아빠 말씀 참 잘 듣는 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FA이적과 관련해서도 부모님은 물론 남편의 의견까지 많이 고려했다는 염윤아다. 과거 ‘마마보이’가 있었다면 염윤아는 거의 ‘파파걸’수준인 걸까?

“맞아요. 아빠 말, 엄마 말을 정말 잘 들었죠. 그런데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지금도 그런 편이에요. 남편 얘기도 잘 듣고... 인생 경험도 저보다 많고, 가족들은 언제나 내 편이니까요. 나를 위해 말씀해주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엄마랑 아빠가 워낙 강하셔서, 제가 감히 거기에 덤빌 그릇도 안됐고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남편 외에 염윤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오빠도 있었다. 염윤아의 아버지는 사실 염윤아보다 그의 오빠에게 먼저 농구를 권했다고 한다.

“오빠는 아빠가 농구하라고 할 때 안한다고 했대요. 오빠는 농구부가 아빠한테 혼나는 걸 봤대요. 얼마나 심하게 혼냈는지 그걸 봤기 때문에 ‘난 이거 못한다’고 생각했고, 안한다고 했대요. 약았던 거지...”

이 자상한 오빠는 그러나 하나 뿐인 여동생이 농구를 선택한다고 했을 때는 조금의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동생이 농구를 하다가, 인생을 살다가, 혹은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어서 하소연하면 평생 묵묵하게 그 이야기를 다 들어줬다고.

“아무리 말을 잘 듣는다고 해도... 나도 힘든 게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있을 때면 오빠한테 막 전화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곤 했어요. 그러면 오빠는 그걸 다 들어주고, 다 받아줬어요. 그런데 듣기만 하지, 해결은 안 해줘요.(웃음) ‘엄마가 나한테 이래서 속상하다’고 얘기하면 ‘그래, 속상하겠구나’라고만 하지, 엄마한테 가서 내 편을 들어주거나 그런 건 전혀 없어요. 들어만 주지, 행동하진 않는 거죠. 약았어!”

#7
테스트에 합격해 신세계에 다시 들어갔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염윤아의 입단 테스트와도 같았던 연습 경기는 비시즌 초반이라 신세계 기존 선수들의 몸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고, 이들이 조금씩 자신의 컨디션을 찾아가자 염윤아도 초반에 보여줬던 모습을 경쟁력으로 온전히 가져가기 힘들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매년 팀과는 재계약을 했다. 염윤아는 “엄마가 직업이라 생각하고 그냥 있으라고 하셨다”며, 특별히 뭔가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팀에서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기에 꾸역꾸역 버틴 시간이라 회상했다.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염윤아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14년. 신세계가 아닌, 그렇다고 지금의 KEB하나은행도 아닌, ‘하나외환’이라는 이름을 팀명으로 하고 있던 시절, 박종천 감독이 부임하면서였다.

“죽기 살기로 수비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일대일로 상대하는 모든 선수들을 변연하 언니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3억짜리 선수를 막으면 네가 3억짜리 선수가 되는 거’라고 하시면서 동기부여를 해주셨죠.”

이전까지 염윤아는 공격이나 수비에서 조금씩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선수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특출한 장점을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색깔이 없던 선수라는 것. 박종천 감독은 본인 스스로도 수비에 강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던 염윤아에게 수비라는 색깔을 처음으로 부여했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수비수로 특화되어 본 적 없던 염윤아는 2014-15시즌, 갑작스레 수비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가 됐고, 상대 에이스를 전담 마크하는 선수가 됐다. 뒤늦게 수비에 재미를 느끼며, 평균 출전 시간은 이전 시즌보다 3배 이상 늘었고, 데뷔 후 처음으로 30경기를 넘게 소화했다.

염윤아는 “경기에 못 나가던 내가 수비 때문에 경기를 뛰게 되니, 더 신나서 수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당시 하나은행의 코치였던 신기성 전 신한은행 감독이 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을 제안했다. 수비 선수로 기회를 얻은 지 1년 만이었다.

“신 감독님이 코치로 계실 때 스킬 같은 걸 시키셨는데, 제가 그걸 곧 잘했어요. 어렸을 때 개인 코치가 있었거든요. 농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센터를 봐서 드리블이나 기본기는 아빠의 제자 분들이 따로 가르쳐주셨어요. 그런 걸 해봐서 어느 정도 익숙했는데, 그걸 보시고는 가드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하필 하나은행은 당시 신지현과 김이슬이 모두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팀에 첼시 리가 가세하며 안정적으로 포스트에 공을 넣어줄 선수가 꼭 필요했다.

프로 입단 후 꾸준히 포워드로 활약했던 염윤아는 수비 잘하는 177cm 장신 가드가 됐다. 팀의 주전 가드로 자리를 잡으며 꾸준히 출전 시간을 늘린 염윤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FA자격을 획득한 지난 해 KB로 팀을 옮겼다.

사진 = 박진호 기자  ck17@rookie.co.kr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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