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승기 기자] ‘식스맨(Sixth Man)’이란, 선발 5인과 맞먹는 기량을 지닌 ‘6번째’ 선수를 뜻한다. 벤치에서 출전하지만 그 실력과 영향력은 주전멤버 못지않다. 이들은 ‘벤치 에이스’ 역할을 맡거나, 4쿼터 중요한 포제션 때 코트 위에서 활약하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역대 최고의 식스맨은 누구일까.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식스맨’ 개념을 만든 레드 아워백

역대 최초의 식스맨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그 ‘식스맨’이라는 개념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역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레드 아워백이다. 그는 1946-47시즌 워싱턴 캐피탈스의 지휘봉을 잡으며 감독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보스턴 셀틱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리고는 리그 8연패 포함, 무려 9번이나 우승하는 등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1965-66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반납했다.

일반적으로는 1950~60년대 보스턴 왕조의 핵심멤버였던 프랭크 램지를 식스맨의 시초로 보곤 한다. 보스턴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체에 걸쳐 무려 11회나 우승하며 왕조를 구축했는데, 램지는 그 일원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총 7차례 우승반지를 손에 넣은 뒤 은퇴했다.

프랭크 램지는 1954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보스턴에 입단했다. 그는 빼어난 득점력을 갖춘 191cm의 슈팅가드였다. 하지만 보스턴에는 이미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밥 쿠지와 빌 셔먼이 붙박이 선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다른 팀 같았으면 당연히 주전으로 뛰었을 기량을 갖춘 램지였지만, 보스턴에서는 자리가 없었다. 

이에 레드 아워백 감독은 램지를 ‘벤치 에이스’로 기용했다. 여타 벤치멤버들과는 달리, 램지에게 더 많은 롤을 부여했고, 승부처에서도 과감하게 기용했다. 당시는 ‘식스맨’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벤치멤버들은 선발들의 휴식시간을 메워주거나 수비만 하는 등 보조적인 역할에 가까웠는데, 아워백 감독은 램지를 주득점원으로 활용하며 벤치 운용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늘날 말하는 ‘식스맨’의 탄생이었다.

1954-55시즌 램지는 벤치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팀내 득점 4위에 올랐다. 덕분에 보스턴은 48분 내내 일정 수준 이상의 득점력을 보여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NBA 역사상 최초로 평균 100득점 벽을 허물었다. 1954-55시즌 보스턴의 평균 득점은 101.5점이었다.

그렇다면 프랭크 램지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식스맨의 조상인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작 ‘식스맨’ 개념을 만들어낸 레드 아워백 감독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워백 감독의 말에 의하면, 역사상 최초의 식스맨은 어브 토고프라고 한다.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이름이라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NBA의 전신인 BBA 시절 뛰었던 1940년대 선수니까.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레드 아워백 감독은 1946-47시즌 BBA 워싱턴 캐피탈스에서 처음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시즌은 BBA가 창설된 원년이기도 했다. 어브 토고프는 이 팀의 멤버로 뛰며 평균 8.4점을 기록했다. (워낙 옛날이라 자세한 기록을 구할 수가 없는 점, 양해 바란다.) 아워백 감독은 토고프야말로 역대 최초의 식스맨이라고 말했다.

사상 최초의 식스맨이 어브 토고프든, 프랭크 램지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두 선수 모두 레드 아워백 감독의 지도 아래 식스맨으로 뛰었다는 것, 현대농구에서 부르는 식스맨 개념을 만든 이가 바로 레드 아워백이라는 점이다. 

 

역대 최고의 식스맨

프랭크 램지는 1963-64시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하지만 보스턴의 식스맨 계보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램지의 전성기가 저물 무렵에 이미 샘 존스, KC 존스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2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으로 추앙받는 존 하블리첵이 등장했다.

존 하블리첵은 1962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로 보스턴에 입단했다. 그러나 이때는 하블리첵이 아무리 잘해도 선발로 올라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보스턴은 이미 리그 4연패 포함, 최근 6년 동안 5번이나 우승하며 왕조를 구축한 상태였고, 그 핵심선수들이 모두 건재했기 때문이다.

‘식스맨 선배’ 프랭크 램지와 마찬가지로, 하블리첵 또한 벤치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하블리첵의 기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루키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소포모어 시즌에는 벤치에서 출격하면서도 이미 팀내 득점 1위에 오를 만큼 압도적인 재능을 뽐냈다. 

그러나 레드 아워백 감독은 하블리첵을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다. 본인이 지휘봉을 내려놓았던 1965-66시즌까지 줄곧 하블리첵을 식스맨으로 활용했다. 아워백 감독은 하블리첵이 벤치에서 출전할 때의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하블리첵 없이도 리그 4연패를 달성했던 팀이 아닌가. 그런데 벤치에 하블리첵이라는 엄청난 선수가 추가되었으니, 보스턴이 매년 우승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블리첵은 벤치에서 뛰면서도 올-NBA 세컨드팀에 선정되는 등 출중한 기량을 인정받았다. 또, 플레이오프가 되면 사실상 에이스급으로 출장시간을 부여받으면서 맹활약했다. 보스턴은 하블리첵 입단 직후 4시즌 동안 모조리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역대 전무후무한 리그 8연패 위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하블리첵은 데뷔 후 첫 7시즌 동안 식스맨으로 뛰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팀이었으면 에이스 역할을 소화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불만은 없었을까. 하블리첵은 말한다. “레드 아워백 감독이 내게 ‘식스맨은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것’이라고 가르쳐줬다. 스타팅은 아니었지만 경기 마지막 순간이면 언제나 코트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하블리첵이 본격적으로 선발로 올라선 것은 1969-70시즌이었다. 빌 러셀과 샘 존스가 함께 은퇴하면서 하블리첵이 이 팀의 기둥이 됐다. 이때부터 하블리첵은 거의 외계인 수준으로 돌변한다. 1970-71시즌에는 평균 28.9점 9.0리바운드 7.5어시스트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냈고, 이때부터 올-NBA 퍼스트팀과 수비 퍼스트팀을 4년 연속 동시석권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했다. 식스맨 롤에서의 해방, 대선배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고삐가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블리첵은 보스턴을 이끌고 1974, 1976년 챔피언에 등극, 본인이 중심이 되어 우승할 수 있음을 만천하게 증명해냈다. 1962-63시즌 데뷔해 1977-78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8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에는 파이널 MVP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13회 올스타, 퍼스트팀 4회, 세컨드팀 7회, 수비 퍼스트팀 5회, 수비 세컨드팀 3회 등 숱한 업적을 세웠다. 보스턴은 그의 등번호 17번을 영구결번했으며, 1984년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군웅할거의 1980년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식스맨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주목할 만한 식스맨이 많이 등장했다. 각 팀별로 식스맨 한 명씩은 데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NBA 사무국은 1982-83시즌부터 ‘올해의 식스맨’이라는 상을 신설했다. 

‘올해의 식스맨’ 최초 수상의 영광은 필라델피아 76ers의 바비 존스에게 돌아갔다. 팀내 핵심멤버이자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었던 존스는 이 시즌 식스맨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벤치에서 평균 23.6분밖에 뛰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수비 퍼스트팀에 선정될 만큼 탁월한 수비력을 보여줬다. 게다가 1983 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필라델피아의 우승에 공헌했다.

1980-81시즌에는 케빈 맥헤일이 데뷔했다. 1980년대 보스턴 셀틱스 왕조의 주역이었던 맥헤일은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파워포워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1996년에는 ‘NBA의 위대한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던 그였지만, 커리어 초기 다섯 시즌 동안은 벤치멤버로 활약한 바 있다.

맥헤일은 1983-84시즌 평균 31.4분 동안 18.4점 7.4리바운드 FG 55.6%를 기록하며 ‘올해의 식스맨’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보스턴의 1984년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1984-85시즌에도 평균 19.8점 9.0리바운드 FG 57.0%를 찍으며 또 한 번 ‘올해의 식스맨’으로 선정, 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맥헤일은 1985 플레이오프를 통해 붙박이 주전으로 올라섰다.

지금은 잊힌 이름이 됐지만, 1980년대 밀워키 벅스에서 뛰었던 리키 피어스 또한 리그 최고의 식스맨 중 한 명이었다. 코트 전 방위에서 득점이 가능했던 타고난 스코어러였다. 중장거리 점프슛을 주무기로 쓰면서도 야투 성공률 5할을 우습게 넘길 정도로 슛이 정확했다. 그는 1986-87시즌 평균 19.5점 FG 53.4%를 기록하며 ‘올해의 식스맨’에 등극했다. 1989-90시즌에는 최전성기를 맞이해 평균 29.0분 동안 23.0점 FG 51.0%를 올리며 두 번째 ‘올해의 식스맨’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때 피어스가 올린 평균 23.0점은 역대 모든 벤치멤버를 통틀어 최다 득점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올해의 식스맨’ 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비니 존슨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식스맨이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배드보이즈’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벤치에서 뛴 탓에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실력은 ‘진짜’였다. 벤치에서 출격해 코트 위를 순식간에 뜨겁게 달군다고 해서 별명이 ‘마이크로웨이브(Microwave)’였다. 우리말로 하면 전자레인지 정도 되겠다.

비니 존슨은 탁월한 득점력을 바탕으로 디트로이트의 리그 2연패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정규리그는 물론이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비니 존슨이 한 번 터지면 아무도 못 말렸다. 그만큼 몰아넣기에 강했다. 1990 파이널 5차전 경기 종료 0.7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터뜨리며 피스톤스의 우승을 확정지은 장면은 커리어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다재다능함이 돋보였던 1990년대 식스맨들

1990년대 식스맨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한 가지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팀이 필요로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해낸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코트를 누볐고, 이들이 속한 팀은 대부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올라운더 포워드 데틀리프 슈렘프가 단연 돋보였다.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식스맨 역할을 맡았던 그는 빼어난 득점력, 정교한 외곽슛, 훌륭한 보드 장악력, 공격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1991년과 1992년, 2년 연속 ‘올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통했다. 1991-92시즌에는 평균 기록이 17.3점 9.6리바운드 3.9어시스트 FG 53.6%까지 치솟았다. 웬만한 팀의 선발 파워포워드보다 기록이 더 좋았다.

1992-93시즌에는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의 클리포드 로빈슨이 평균 19.1점 6.6리바운드 2.2어시스트 1.2스틸 2.0블록 FG 47.3%를 기록하며 ‘올해의 식스맨’이 됐다. 로빈슨은 스몰포워드부터 파워포워드, 센터까지, 세 가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특별한 선수였다. 

1994-95시즌 ‘올해의 식스맨’ 수상자 앤써니 메이슨도 다재다능하면 빠지지 않는 스타였다. 평균 기록은 9.9점 8.4리바운드 3.1어시스트 FG 56.6%. 그는 뉴욕 닉스의 팀 컬러에 딱 맞는 터프가이였다. 강력한 수비력과 보조 리딩 능력을 동시에 보여줬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리스 디아우나 드레이먼드 그린 같은 유형의 원조격 선수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시카고 불스 3연패의 주역, 토니 쿠코치 역시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그는 위에 언급한 데틀리프 슈렘프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기본 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지만, 시카고의 승부처 라인업에서는 경우에 따라 파워포워드 혹은 센터 포지션까지 소화했다. 쿠코치는 1995-96시즌 ‘올해의 식스맨’ 상을 받았다. 시카고의 2차 3연패 기간(1995-96시즌부터 1997-98시즌) 동안에는 평균 13.2점 4.3리바운드 4.0어시스트 FG 47.2% 3점슛 37.0%를 기록했다.

 

식스맨의 새로운 정의, 마누 지노빌리

2000년대 들어 좋은 식스맨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000년대 초반 새크라멘토 킹스의 바비 잭슨은 엄청난 스피드와 득점력을 바탕으로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2000년대 중반 시카고 불스의 ‘클러치 타임 해결사’ 벤 고든의 등장도 충격적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 피닉스 선즈의 리안드로 발보사 역시 번개 같은 스피드와 폭발적인 3점슛 능력을 바탕으로 각광 받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선수의 임팩트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레전드가 된 남자, 마누 지노빌리다.

지노빌리는 2002-03시즌 스퍼스의 유니폼을 입고 NBA에 데뷔했다. 신인 시절의 지노빌리는 기복이 굉장히 심했고, 화려한 플레이를 즐기며 실책도 잦았다. 한 마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매일 같이 그렉 포포비치 감독에게 혼이 나곤 했다. 

하지만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열린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2년차 때부터 지노빌리의 단점은 가리고,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체력이 약한 지노빌리의 출전시간을 철저히 관리해주고, 코트 위에서 많은 자유를 허용해주는 등 지노빌리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을 깔아줬다.

이렇게 경험치를 먹은 지노빌리는 데뷔 3년 만에 올스타로 성장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번뜩이는 패스, 눈을 사로잡는 유로스텝, 화끈한 돌파와 날카로운 3점슛까지. 그야말로 못하는 게 없었다. 2005 파이널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하며 스퍼스의 우승에 매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지노빌리는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모두 선발로 뛰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2006-07시즌이었다. 포포비치 감독은 여러 실험을 통해 지노빌리를 선발로 쓰나 벤치로 쓰나 생산력과 효율 모두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지노빌리를 벤치 에이스로 활용할 때, 팀이 더 강해진다는 것 또한 눈치 챘다. 

벤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고심했던 포포비치 감독은 2007-08시즌 지노빌리를 벤치로 내리는 강수를 뒀다. 그리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지노빌리는 평균 19.5점 4.8리바운드 4.5어시스트 FG 46.0% 3점슛 40.1%를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올해의 식스맨’ 트로피는 당연히 지노빌리의 것이 됐다. 뿐만 아니라 벤치멤버인데도 불구하고 올-NBA 서드팀까지 선정되며 기량을 인정받았다. 스퍼스는 지노빌리 덕분에 벤치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후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지노빌리는 스퍼스에서 2017-18시즌까지 활약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그 사이 그는 ‘식스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던 ‘식스맨’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그동안 식스맨의 활약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지노빌리는 달랐다. 개인의 활약은 물론이고, 팀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선발대와는 다른 새로운 분대를 이끌고 나타나 상대를 때려 부순다. 벤치 운용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었다. 

지노빌리가 대단한 점은 코트 위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토니 파커를 대신해 경기를 운영했고, 팀 던컨을 대신해 4쿼터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슈터로 변신해 3점슛을 펑펑 꽂았고, 돌파가 필요할 때는 직접 슬래셔 역할까지 척척 해냈다. 심지어 수비까지 잘했다. 그래서 기록에 비해 존재감이 훨씬 더 컸다. 코트 위에 지노빌리가 들어서면 모두의 시선이 지노빌리에게 집중될 정도였다.

지노빌리는 샌안토니오 소속으로 총 네 개의 챔피언 반지(2003, 2005, 2007, 2014)를 꼈다. 때로는 벤치멤버로서, 때로는 에이스로서, 때로는 경기를 망치고, 때로는 경기를 지배했다. 말 그대로 혼자서 경기를 들었다 놨다 했다. 이토록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식스맨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 같다.

 

진정한 의미(?)의 식스맨들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존 하블리첵은 식스맨 범주가 아니라 역대 최고 선수 범주에 넣어야 하는 레전드다. 선발로 뛰던 시절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벤치에서 뛸 때에만 올-NBA 세컨드팀에 4차례나 선정되었고, 올스타전에 4번 초청 받았으며, 6번의 우승컵에 입을 맞췄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케빈 맥헤일은 데뷔 후 5시즌간 벤치에서 활약한 뒤 선발로 올라섰고, 그 뒤에는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데틀리프 슈렘프, 토니 쿠코치, 마누 지노빌리... 이런 선수들은 누가 봐도 주전급 기량이지만 팀 사정상 혹은 전략적 차원에서 벤치에서 출격했을 뿐이다. 4쿼터 승부처가 되면 언제나 코트 위에서 활약했고, 때로는 클러치샷도 독점하곤 했다. 사실상 에이스급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잠시, ‘식스맨’의 사전적 의미를 되짚어 보자. Sixth Man, 말 그대로 6번째 선수를 의미한다. 선발 5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선수 중 최고의 선수가 바로 식스맨이다. 공격이든 수비든 뭔가 약점이 있어 선발로 뛰지는 못하지만, 확실한 강점을 바탕으로 벤치타임을 이끄는 그런 선수가 바로 사전적 정의의 식스맨이다.

위에 잠시 언급한 바비 잭슨과 벤 고든, 리안드로 발보사가 바로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2번으로 뛰기에는 작은 신장, 그로 인한 수비 문제, 게다가 야투까지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선발로 뛰기에는 애매하다. 하지만 벤치 에이스로 뛰면서 벤치 멤버들을 이끌고 득점이 필요할 때 해결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조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끝판왕으로는 자말 크로포드가 있다. 레전드급이나 에이스급 식스맨들을 제외하고, 정말 순수한 의미의 식스맨을 찾는다면, 자말 크로포드가 단연 역대 최고가 아닌가 싶다. 크로포드는 ‘올해의 식스맨’을 7년에 걸쳐 총 3번(2010, 2014, 2016)이나 수상했다. 이는 단연 역대 최다 기록. 한두 시즌 반짝하고 마는 그런 식스맨들과는 격이 다르다. 

크로포드는 2008-09시즌까지는 선발로 뛰었으나, 허약한 수비와 난사 기질 때문에 한 팀에 정착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약체팀에서만 뛰는 바람에 플레이오프와도 연이 닿지 않았다. 평균 20점을 돌파하고, 심지어 한 경기 50점씩 때려 넣어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2009-10시즌 애틀랜타 호크스로 이적하면서 그의 커리어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식스맨 역할을 받아들인 크로포드는 그야말로 펄펄 날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평균 18.0점 3.0어시스트 3점슛 38.2%를 올렸다. 덕분에 애틀랜타는 53승이나 거뒀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오를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올해의 식스맨’으로 뽑혔고, 처음으로 봄농구를 즐길 수 있었던 시즌이었다.

2012-13시즌 LA 클리퍼스의 유니폼을 입은 뒤, 또 한 번의 성공신화를 썼다. 그가 벤치에서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면서 팀 공격력이 확 살아났다. 클리퍼스는 벤치 득점력이 암울했는데, 크로포드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었다. 클리퍼스는 해당시즌 한때 17연승을 질주하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그 중심에 크로포드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로포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3-14시즌에는 평균 18.6점 3.2어시스트를 올리며 클리퍼스의 창단 이래 최다승(57승) 신기록에 앞장섰다. ‘올해의 식스맨’ 수상은 당연했다. 크로포드는 2015-16시즌 한 번 더 ‘올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었다.

크로포드는 승부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클러치슛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볼핸들링, 폭발적인 3점슛 등을 무기로 코트를 수놓았다. 그가 역대 최고의 식스맨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유다. 

2010-11시즌 댈러스 매버릭스의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제이슨 테리 역시 비슷한 유형이었다. 테리는 원래 댈러스의 선발 포인트가드였으나, 2007-08시즌 도중 제이슨 키드가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어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벤치로 내려갔다. 사실 테리는 수비 약점이 너무나 명확한 선수였기에, 벤치 에이스로 출전해 활약하는 게 더 효율이 좋았다.

벤치로 내려갔다고 해서 테리의 기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자유도와 슛을 허락 받으면서 평균 득점이 올라갔다. 2008-09시즌 테리는 평균 19.6점 3.4어시스트 FG 46.3% 3점슛 36.6%(2.3개) 1.3스틸을 기록하며 ‘올해의 식스맨’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1 플레이오프에서의 활약은 아직까지도 회자될 정도다.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캐런 버틀러를 대신해 팀내 2옵션으로 뛰며 매경기 놀라운 퍼포먼스를 펼쳤다.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4차전에서는 3점슛 9개(10개 시도) 포함, 32점을 폭발시키며 팀의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견인했고, 마이애미 히트와 맞붙었던 파이널 5차전 21점 6어시스트, 6차전 27점을 올리며 댈러스의 창단 첫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최근에는 LA 클리퍼스의 루 윌리엄스가 주목 받고 있다. 이미 2015년 토론토 랩터스 소속으로 ‘올해의 식스맨’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최근 들어 농구에 완전히 눈을 뜬 느낌이다. 2017-18시즌 평균 22.6점 5.3어시스트를 올리며 ‘올해의 식스맨’ 상을 받았는데, 사실상 클리퍼스의 1옵션 에이스나 다름없었다. 

루 윌리엄스는 2018-19시즌에도 변함없이 놀라운 활약을 이어가는 중이다. 몬트레즐 해럴과 펼치는 2대2 공격은 알고도 못 막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4쿼터 고비 때마다 터지는 루 윌리엄스의 폭발적인 득점력 또한 일품이다. 올시즌 역시 강력한 ‘올해의 식스맨’ 후보 중 한 명이다.

 

정답은 마음속에

NBA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은 누구인가?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대적인 실력과 업적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존 하블리첵이 최고다. 현대농구에 끼친 임팩트를 높이 사는 사람이라면 마누 지노빌리를 택할 것이다. 필자처럼 주전급을 제외한 원론적인 의미의 식스맨을 찾는 이들이라면 자말 크로포드 혹은 다른 누군가를 꼽을 수도 있겠다.

현대농구는 점점 빨라지고 또 발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벤치 로테이션에 대한 연구가 더욱 중요해지고,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식스맨은 이러한 흐름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식스맨이 등장해 우리의 눈을 사로잡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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