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상혁 기자]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의 이미선 코치는 한국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였다. 전주원(우리은행 코치), 김지윤(전 신한은행 코치) 등과 함께 국가대표 가드진을 이끌었고 소속팀인 삼성생명에서는 입단 후 부동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다. 입단 후 이적없이 한 팀에서만 뛴 원클럽맨이며 이런 그의 공로를 인정해 삼성생명은 그의 등번호인 ‘5’번을 영구결번시켰다. 
이랬던 그의 현재 직함은 삼성생명의 코치. 지도자 생활을 한 지 햇수로 2년차에 접어든 그는 김도완, 전병준 코치에 이은 막내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여자농구의 레전드에서 코칭스태프 막내로 거듭나 차근차근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비행기 탈 것이란 점괘에 시작한 농구

나의 농구 시작은 다소 우여곡절이 많았다. 첫 시작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반에서 달리기를 곧잘 했던 나는 키는 작았지만 농구부 테스트에 지원을 했고 뽑혔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고 관뒀다. 생활 패턴도 달라지고 당시 농구부 선배 언니들이 너무 무서워서 관뒀던 것 같다. 그러다 1년이 지나고 다시 농구부를 찾아갔다. 사실 농구가 뭔지도 모를 때였지만 무작정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에 찾아간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농구였지만 내가 6학년이 되던 해에 소년체전이 없어졌다. 나갈 대회가 없다보니 사실상 클럽 활동처럼 되어 버렸다. 대학교에서 체육을 전공하는 언니와 오빠들이 내려와 가르쳐주는 정도였다. 이렇게 초등학교 때는 사실상 어영부영하다가 중학교 진학을 앞두게 됐다. 

초등학교 때까지와 달리 중학교 때부터는 말 그대로 정식 농구부였다. 당시만 해도 학교 평준화나 이른바 집 근처 학교를 가던 때가 아니어서 농구로 수피아여중을 가려면 부모님 동의서가 있어야 했다. 일반 학생이라면 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나는 가서 입학하면 농구를 시킬 것이라는 부모님의 동의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 엄마가 엄청 반대를 했다. 초등학교 때 공부도 곧잘 하던 애가 무엇하러 힘든 운동을 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엄마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내가 그렇게 졸랐다고 했다. 하도 그래서 엄마가 속는 셈치고 점을 봤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가 “(농구를 하면) 비행기도 타고 잘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농구를 시켰다고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그 점괘가 맞았다. 농구를 하고 나서 비행기도 많이 탔고 했으니 말이다. 만약 그때 나온 점괘가 나빴다면 농구선수 이미선은 없었을지 모른다.  

고3때 결정된 삼성생명 입단

학창 시절의 나는 그렇게 농구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중학교 입단 동기가 총 8명이었는데 그중에 내 키가 두 번째로 작았다. 초등학교 때 나름 강점이라 생각하던 달리기도 다른 학교에서 온 육상부 출신 동기들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게 됐다. 키는 작지 달리기마저 못하면서 자괴감이 생길 정도였다. 

이러던 중 다행히 키가 컸다. 1년에 5~6cm 정도는 꾸준히 컸다. 처음에는 또래보다 작았지만 비슷해졌고 어느새 보니 커졌다. 삼성생명에 와서도 2cm가 더 컸을 정도니 또래들보다 성장이 좀 늦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에 잘 나가는 선수들은 빠르면 중3이나 고1 정도에 실업팀 입단이 결정될 때였다.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실업팀들이 일부러 지방으로 내려와 전지훈련을 할 때였으니 말이다. 내 동기 중에 선수민(전 신한은행)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이 친구는 고2 때 태평양화학에 스카우트됐다. 이때는 계약금이란 게 있었는데 선수민은 1억 2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억대 계약금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우선 그때만 해도 모든 중고농구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우리 같은 지방 학교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감독님 차에 선수들이 모두 끼여 앉아 4시간 정도를 차로 온 뒤 서울에서 1시간 반 정도 코트 적응 훈련을 한다. 그리고 여관에서 계속 쉬다가 경기에 나서는 거였는데 장거리를 좁게 오고 거기에 멀미까지 심해서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를 한 적이 없다. 

고3 전국체전 참가 때는 안 되겠다 싶어 혼자 나가서 운동장을 뛰는 등 경기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당시 체전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는데 만약 그때 대회 MVP가 있었다면 내가 받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잘됐다.

이때 나를 눈여겨보신 최경덕 감독님이 팀과 함께 광주로 와서 연습경기를 하면서 나를 스카우트하셨다. 아이러니하게 최 감독님은 나를 뽑은 뒤에 바로 삼성남자농구단으로 가셔서 같이 운동을 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는 분이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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