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상혁 기자] 부천 KEB하나은행의 김완수 코치는 겸손한 지도자로 꼽힌다. 프로팀 코치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2018년 박신자컵 서머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모든 공을 이환우 감독과 선수들에게 돌리고 평소에도 항상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하나은행의 벤치를 지키고 있다. 올 시즌 팀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실의에 빠진 어린 선수들을 다독여 코트에서 제 몫을 하게 만드는 것도 수석코치인 그의 역할이다. 선수 은퇴 후 남자농구단 프런트와 여자 중고등학교팀 코치를 지내는 등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기 위해 그가 겪었던 그의 농구인생을 들었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8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육상 유망주에서 농구선수가 되기까지

내 운동의 시작은 농구가 아닌 육상이었다. 산곡북초 3학년 때였는데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이것저것 하다가 학교 육상부에 들어가 하게 됐다. 운동 자체를 좋아하고 운동 신경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정식대회에 참가했고 어느 정도의 성적도 내곤 했다. 그런데 나와 다른 동기를 밀어주려는 육상부 선생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운동을 관둬야 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지냈는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4학년 때 다시 육상부를 찾아갔더니 다시 받아주기는 어렵다고 말하면서 ‘너 그럼 농구하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육상이 좋다기보다는 운동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망설일 것이 없었고 속전속결로 농구부에 들어갔다. 그때 6학년에 있던 2년 선배가 지금 신한은행의 사령탑인 신기성 감독이다.  

당시 인천에서는 산곡북초를 졸업해 송도중고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한번 선후배의 연을 맺으면 그대로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송도중에 진학했는데 그때는 형들이 너무 강해서 주전으로 올라서는 게 힘들었다. 신기성 선배가 졸업하고 난 뒤인 중2 때부터 김상우 선배와 함께 투 가드로 나섰다. 

송도중고 농구부하면 전규삼 할아버지(송도중고 출신들은 당시 감독이던 전규삼 선생을 모두 할아버지라 부른다 - 필자 주)가 떠오른다. 중학교 때는 선배들 볼 잡아주기도 바쁜데 할아버지가 가끔씩 따로 불러 ‘너는 이 연습을 더 하면 될 것 같다’라고 말해주시면서 따로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깽깽이 스텝 같은 것도 가르쳐주셨는데 배운 것을 실습해보고 싶어서 형들이 다 가고 난 다음에 체육관에 남아서 혼자서 훈련을 하곤 했다. 개인 훈련이 다 끝나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 12시가 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고된 생활이었지만 농구를 시작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집에서도 농구를 한다고 반대하시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게 해줬다. 대신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는 늘 하셨다. 학업에 대한 이야기도 절대 안 하셨는데 내가 스스로 느끼게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학교 때 부터는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성적이 반에서 30등 밖으로 벗어나면 아예 농구를 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건 송도중고 농구부의 룰 같은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농구부라도 수업은 무조건 다 받은 뒤 훈련을 하게 했다. 나도 농구를 하기 위해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평일에 훈련량이 적기 때문에 주말이나 혹은 연휴 같은 때에 모여서 훈련을 했는데 누구 하나 불만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파란만장했던 건국대학교 시절

나는 진학할 대학교를 고교 2학년 때 정했다. 다소 빠른 결정이었지만 불안감을 없애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1학년 때 나보다 2년 선배들이 팀 성적이 4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하는 것을 봤다. 나나 부모님 모두 혹시나 대학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였다. 

당시 농구부 코치가 박재수 선생님이라고 얼마 전까지 송도고 농구부장을 지냈던 분인데 이분이 건국대 출신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야, 너 선배들 대학 못 간 거 알지?' 그러더니 대뜸 건국대에 가라고 하시더라. 나도 나지만 농구를 시켰던 아들이 대학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라고 걱정하던 어머니가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셨다. 

이런 과정을 거쳐 건대에 왔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가 않았다. 일단 집합이 일상사였다. 본 운동 때 볼 못 잡으면 집합, 간식 제대로 안 사오면 집합을 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선수로서도 가장 힘든 때가 이때였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가드로서 내 마음대로 플레이를 했는데 대학에서는 그런 프리랜스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었다. 선배들한테 맞기도 많이 맞고 도망을 간 적도 있다.  

3학년 때는 새벽과 오전, 오후, 야간 이렇게 하루 4번을 주구장창 트랙만 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거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생각을 시작했는데 2주가 지나니 사람이 할 수 없는 거였다. 처음에는 4학년 선배들이 단체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농구부 전원이 이른바 ‘소풍’을 나가는 것으로 의기투합했는데 갑자기 가는 날 밤에 형들이 ‘졸업 후 취업이 있으니 안 되겠다’라고 하더라. 

그때 내가 ‘그럼 제가 데리고 나갔다 올게요’라고 말했다. 1,2학년 후배들이 3학년인 우리만 바라보고 있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을 데리고 강원도 속초에 갔다. 마침 그때 선수단 회비를 내가 관리했는데 유스호스텔 같은 넓은 방을 빌려서 그걸로 회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1주일 정도 지냈다. 그러다 후배 중 한 명이 무서웠는지 집에 전화를 했고 나갔다 숙소에 와보니 감독, 코치님과 가족들이 있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팀에 돌아왔고 이때 이후로는 숙소를 이탈한 적은 없었다. 4학년 때는 주장을 맡게 돼서 나름 후배들을 잘 챙기고 조용히 보냈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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