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 8회, ALL-NBA 팀 6회
[루키 염용근 기자] 지난 몇 년간 오프 시즌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드와이트 하워드의 최종 행선지가 휴스턴 로켓츠로 결정되었다. 휴스턴은 리그 최고의 센터로 손꼽히는 하워드를 손에 넣으면서 단숨에 우승후보 전력을 구축했다는 평가다.
 
한편 휴스턴은 팀 창단 이래 늘 좋은 센터들과 함께 했다. 플레이오프 진출과 우승 등 영광의 시기에는 언제나 특급 센터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워드의 휴스턴 합류에 발 맞춰 그동안 팀을 거쳐갔던 위대한 센터들의 계보를 살펴보자.
 
모제스 말론(1976-77시즌~1981-82시즌)
통산 1,455경기  평균 20.3득점  12.3리바운드  1.3블록슛  FG 49.5%  FT 76%
올스타 13회, MVP 3회, 파이널 MVP 1회, ALL-NBA 팀 8회, 리바운드 1위 6회
 
ABA(과거 NBA의 경쟁 단체)에서 데뷔했던 말론은 리그 해체와 함께 NBA로 넘어와 휴스턴에 합류한다. 말론의 합류와 함께 휴스턴은 강팀으로 거듭났고, 1980-81시즌에는 프랜차이스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당시 함께했던 동료들로는 캘빈 머피, 마이크 던리비 시니어 등이 있다.
 
말론은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인 고졸 출신 선수였다. 신생 리그였던 ABA가 NBA 인기를 뛰어넘기 위한 복안 중 하나로 미래가 유망한 고졸 선수 영입을 허용한 덕분이었다. 이른 나이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말론은 탄탄한 신체 조건과 동물적인 위치선정 및 허슬, 안정적인 인사이드 플레이를 통해 최고의 빅맨으로 거듭났다.
 
휴스턴 소속으로 5번의 올스타 선정, MVP 선정 2회(1979년, 1982년), 리바운드 1위 3회 등 영광을 누렸지만 끝내 우승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결국 커리어 2번째 MVP를 수상했던 1981-82시즌 종료 후 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이듬해 말론은 줄리어스 어빙, 모리스 칙스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하킴 올라주원(1984-85시즌~2000-01시즌)
통산 1,238경기  평균 21.8득점  11.1리바운드  3.1블록슛  FG 51.2%  FT 71.2%
올스타 12회, MVP 1회, 파이널 MVP 1회, 올해의 수비수 2회, ALL-NBA 팀 11회
리바운드 1위 2회, 블록슛 1위 3회
 
휴스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프랜차이즈 스타다. 1984년 드래프트 당시 마이클 조단(3순위)를 넘어 1순위로 지명되었을 정도로 큰 기대를 받고 팀에 입단했다. 초창기에는 선배 랄프 샘슨과 함께 트윈 타워를 결성해 팀을 플레이오프 단골 손님으로 견인했다. 이후 오티스 도프,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과 함께 백투백 우승(1993-94시즌, 1994-95시즌)을 달성했다. 말년에는 찰스 바클리가 영입되면서 '빅3'를 결성, 마지막 우승 도전에 나섰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올라주원은 리그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센터로 손꼽힌다. 다양한 공격 스킬을 활용한 득점력은 물론 긴 팔과 운동 능력, 탁월한 센스를 통해 발군의 수비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통산 3,830개의 블록슛은 현재까지 통산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흔히들 얘기하는 90년대 4대 센터 중 공수 밸런스 측면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90년대를 지배한 마이클 조단의 시카고 불스는 두번의 쓰리핏을 달성했다. 그 사이에 백투백 우승을 차지했던 팀이 바로 올라주원이 이끈 휴스턴이었다. 비록 2001년 토론토 랩터스로 사인&트레이드 되면서 친정 팀에서 은퇴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현재까지 휴스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야오 밍(2002-03시즌~2010-11시즌)
통산 486경기  평균 19득점  9.2리바운드  1.9블록슛  FG 52.4%  FT 83.3%
올스타 8회, ALL-NBA 팀 6회
 
중국 국가 대표팀을 통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002년 드래프트에 나와 전체 1순위로 휴스턴에 지명되면서 영광의 빅맨 계보를 잇게 된다. 트레이시 맥그레디와 함께 역사적인 '맥-밍 듀오'를 결성해 인기몰이에 성공했지만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야오 밍은 리그를 지배했던 샤킬 오닐의 기량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에 데뷔했다. 데뷔 때부터 차세대 최고 빅맨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늘 부상이 문제였다. 다양한 공격스킬과 정교한 중거리 점프 슛, 높이를 활용한 수비가 장점으로 동료들과의 이타적인 플레이 역시 돋보였다. 중국에 NBA 열풍을 일으키면서 리그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휴스턴은 야오 밍과 함께 5번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맥그레디와 야오 밍이 교대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다. 결국 맥그레디는 트레이드, 야오 밍은 은퇴로 인해 팀과의 인연이 끝났다. 은퇴 후에는 NBA의 홍보 대사를 맡는 등 제 2의 농구 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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