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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계의 거물들이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절대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슈퍼스타가 아니었어도, 혹은 NBA에서 뛰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남긴 유산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영원히 빛날 것이다.
 
글ㆍ최연길(MBC SPORTS+ 농구 해설위원)
 

인종의 벽을 허문, 해럴드 헌터

척 쿠퍼, 냇 ‘스윗워터’ 클리프튼, 얼 로이드와 함께 1950년 NBA에서 처음으로 인종의 벽을 허물었던 선수로 꼽히는 해럴드 헌터가 지난 3월 7일(현지시간), 테네시 주 헨더슨빌의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다. 향년 86세.

노스캐롤라이나 컬리지에서 걸출한 가드로 활약했던 헌터는 흑인들이 다니던 대학들의 무대였던 CIAA(Colored Intercollegiate Athlectic Association) ‘내셔널 토너먼트’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가 듀케인 대학의 척 쿠퍼를 지명하며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인종의 벽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그동안 눈치만 보던 각 구단들은 흑인 선수 영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1950년 4월 26일, 워싱턴 캐피톨스와 계약하며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트레이닝 캠프에서 살아남지 못한 탓에 클리프튼에 최초의 계약 선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캔사스 출신 175cm의 가드였던 헌터는 1959년부터 1968년까지 테네시 주립대학의 감독을 지내며 통산 172승 67패를 기록했다. 1960년에는 팀을 NAIA 토너먼트 파이널 4에 올려놓아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테네시 주립대학의 감독을 맡아 앤쏘니 메이슨, 카를로스 로저스 등 모두 17명의 NBA 선수들을 키워냈다. 감독에서 물러난 후 헌터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아내와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듀크 대학의 스타, 필 헨더슨

1980년대 말 듀크 대학을 이끌었던 필 헨더슨이 지난 2월 17일, 필리핀의 자택에서 향년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세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시카고 출신인 헨더슨은 고교시절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에 뽑혔을 정도로 전국구 스타였다. 1986년 듀크 대학에 입학한 후 1988년부터 1990년까지 팀을 3년 연속 NCAA 토너먼트 파이널 4로 이끌었다.

특히 4학년이던 1989-90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나서 평균 18.5점을 올렸다. 올-ACC 세컨드 팀에도 뽑혔다. 경기당 22.3점을 올리며 듀크 대학을 1990년 NCAA 토너먼트 결승까지 올렸지만 래리 존슨, 스테이시 오그먼이 버틴 UNLV에게 103-73으로 참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90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9번으로 댈러스 매버릭스의 지명을 받은 헨더슨은 1993cm의 작은 신장 때문에 결국 NBA 무대를 밟지 못했다. 이후 CBA에서 5시즌을 뛰며 12.7점, 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5년 은퇴 후 필리핀에서 유소년 농구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프로비던스 대학의 스타, 브루스 캠블

1970년대 프로비던스 대학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브루스 캠블이 지난 3월 8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코네티컷 주 최고 스타이자 전미 최고의 고교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캠블은 1974년 프로비던스 대학에 입학해 1978년까지 통산 1,829득점, 94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수프(Soup)’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206cm의 장신이면서도 드리블, 슛, 패스 3박자를 지닌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프로비던스 대학을 졸업한 후 1978년 NBA 드래프트 8라운드 153번으로 뉴저지 네츠의 지명을 받았지만 NBA에서 뛰지는 못했다. 이후 유럽에서 10년 동안 프로선수로 활약했다.

프로비던스 대학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하나였던 캠블은 지난 2004년 프로비던스 대학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야구와 농구에 두각을 나타냈던 문 멀린

오레곤 대학에서 야구와 농구선수로 유명세를 누렸던 포드 파커 ‘문(Moon)’ 멀린이 지난 2월 28일, 워싱턴州 스탠우드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하기 2주 전 심장마비에 빠졌던 멀린은 생존 중인 최고령 메이저리거였다.

워싱턴州 올림피아 출신인 멀린은 1939년 NCAA 토너먼트 초대 우승팀인 오레곤 대학의 백업 가드로 활약했는데 1944년 메이저리그에서 1시즌(필라델피아 필리스)을 뛰며 타율 .267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올림피아 고등학교에서 생물 교사와 야구 감독을 겸임하며 여생을 보냈다.
 
 
캐나다 대표였던 조지 위어링

1952년 런던 올림픽에서 캐나다 남자 농구 대표팀으로 출전했던 조지 위어링이 지난 3월 2일, 캐나다 온타리오州 런던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 당시 위어링은 런던 올림픽에서 6경기를 뛰며 5.1점을 올렸지만 캐나다는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축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위어링은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 이후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건강학 교수로 27년 간 재직했다.
 
 
피펜의 대학 동창, 지미 맥클레인

센트럴 알칸소 대학에서 스카티 피펜과 함께 뛰었던 지미 맥클레인이 지난 2월 23일, 테네시州 코르도바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193cm의 가드였던 맥클레인은 피펜과 호흡을 맞추며 1986년부터 2년 간 센트럴 알칸소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이끌었다. 1m가 넘는 점프력을 앞세운 호쾌한 덩크슛으로 ‘지미 잼(Jimmy Jam)’이란 별명으로 통했던 그는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 멤피스 지역 농구 코치로 활동해왔다.
 
 
그리스 농구의 전설, 조르고스 콜로키타스

그리스 농구의 전설적인 인물, 조르고스 콜로키타스가 지난 3월 2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1945년 그리스에서 태어난 콜로키타스는 2m의 포워드로 1960년대 그리스의 명문 스포르팅과 파나티나이코스에서 뛰며 3차례 그리스 리그 득점왕(1964, 1966, 1967)에 올랐다. 1967년과 1969년 유럽선수권대회 득점왕 타이틀도 함께 거머쥐었다.

1965년부터 72년까지 파나티나이코스에서 뛰며 팀을 1967년과 69, 71, 72년 그리스 리그 우승으로 견인한 그는 1969년에는 팀을 유러피언컵 위너스 컵 준결승으로 이끌며 활약을 인정받았다.

그리스 국가대표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총 90경기를 뛰며 통산 1,807점을 올렸다. 1967년 유럽선수권대회에 출전해 평균 19.7점으로 득점왕에 올랐고 1969년에도 경기당 22.9점으로 1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무릎 부상으로 28살의 젊은 나이에 코트를 떠난 그는 1991년 FI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의 선수’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레바논의 영건, 로니 아부 자우드

레바논 베이제 클럽의 슈팅가드였던 로니 아부 자우드가 지난 2월 1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6살의 꽃다운 청년이었던 아부 자우드는 교통사고로 뇌수술까지 받았지만 결국 세상을 등져 레바논 농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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