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멸의 국보센터
서장훈, 전설이 되다
서장훈, 전설이 되다
2002년 가을, 207cm의 국보센터는 부산사직체육관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국남자농구가 ‘영원한 숙적’ 중국을 연장 접전 끝에 꺾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2013년 3월, 그가 다시 한 번 부산사직체육관에서 눈물을 흘렸다. 11년 전만큼 뛸 수 없고 무릎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매 순간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물은 여전히 뜨거웠다.
글ㆍ정지욱 스포츠동아 기자 사진ㆍKBL 제공
농구계를 ‘힐링’한 국보
올 시즌 프로농구는 최악의 상황만 거듭 일어났다. 끊이지 않는 심판 판정에 욕설 논란이 불거졌으며 차기 드래프트 우선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어중간한 전력의 중하위권 팀들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꺼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와 함께 경기력도 바닥을 쳤다. 필자 역시 경기 취재를 다니면서 ‘이게 프로선수들의 경기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농구가 재미없다’는 팬들의 반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에 승부조작사건이 터졌다. 한국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 강동희 감독이 승부조작혐의로 구속되면서 많은 이들의 충격에 빠뜨렸다. 이번 사태로 농구 팬들은 영웅 한명을 잃었다. 아직 유죄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유·무죄 여부를 떠나 이번 사건 자체가 농구 팬들에게는 큰 상처였다.
프로농구는 출범 16년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사태 수습 여부를 떠나 농구 판 분위기 자체가 너무 침울해졌다. 침체된 분위기를 타개할 만한 ‘힐링’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3월 19일, 모처럼 농구 팬들로 하여금 마음 한구석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농구계를 ‘힐링’한 이벤트는 국보센터 서장훈의 은퇴식이었다.
2012-13시즌 개막 이전, KT 이적과 함께 서장훈은 “2012-13시즌이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며 일찌감치 은퇴를 예고한 바 있다. 3월 19일은 정규리그 마지막 날이었고 소속팀 KT는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즉, 서장훈의 선수생활 마지막 날인 셈이었다.
영웅의 퇴장
서장훈이 KT 유니폼을 입고 뛴 시간은 단 한 시즌뿐이었다. 하지만 KT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KT 구단은 최고의 은퇴식 무대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때문이었을까? 서장훈은 경기 시작 전부터 감정에 북받치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치열하게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결승점 포함, 시즌 최다인 33점을 기록하면서 화려하게 최종전을 장식했다. 16년간 쌓아온 득점 행진은 13,231점에서 막을 내렸다.
경기 후 부산사직체육관에는 가수 솔비가 부르는 머라이어 캐리의 ‘Hero’가 울려 퍼졌다. 체육관 천장에는 ‘대한민국이 기억하겠습니다. 불멸의 전설, 국보센터 서장훈’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조명은 오로지 서장훈만을 비췄고 전광판에서는 그의 활약이 담긴 주요 장면과 동료들의 영상 메시지가 전해졌다.
경기장을 찾은 7,000여명의 팬들도 이날만큼은 KT의 승리가 아닌 ‘선수’ 서장훈의 마지막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서장훈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11년 전 중국을 꺾고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장소에서 말이다. 서장훈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팬들에게 감사 메시지를 전했다.
“저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준 농구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갖고 있는 능력 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농구선수의 은퇴도 감동적일 수 있다’
그간 프로농구에서는 노장선수들이 사장되는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젊은 선수에만 치중하는 리그 분위기와 베테랑 선수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여러 제도는 노장선수들의 은퇴를 앞당기는 현상을 낳았다.
프로농구는 1990년대 후반, 농구대잔치 인기를 등에 업고 출범했다. 허재, 강동희,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전희철, 현주엽 등 농구대잔치 스타들의 활약상은 초창기 프로농구 인기를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마무리가 썩 좋지 못했다. 은퇴경기를 치른 허재, KCC 한 팀에서만 뛰면서 성대한 은퇴식을 치른 추승균 정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등 떠밀리 듯 코트를 떠났다.
특히 프로농구 역대 최고 인기스타로 꼽히는 이상민의 은퇴는 유망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가져다 줬다. 한 현역 선수는 “‘이상민 선배도 저렇게 구단 압력에 밀려 은퇴하는데 나 같은 선수 내보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씁쓸한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서장훈의 은퇴는 좀 달랐다. 특히 코트 가운데로 나와 원정 팬들에게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은 적잖은 감동을 일으켰다. 이에 타 구단들도 서장훈의 마지막을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KT와 6라운드 첫 경기를 치른 KGC였다. KGC는 서장훈이 몸담은 적이 없는 구단이다. 그러나 KGC는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안양을 방문한 서장훈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구단은 KGC 선수들이 서장훈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행사를 통해 그간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KGC 김성기 사무국장은 “우리 팀에서 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안양에도 서장훈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고 말했다.
KGC의 움직임은 타 구단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KGC를 시작으로 서장훈이 뛰었던 삼성, 전자랜드, SK 구단 ‘마지막 국보센터 맞이’에 나섰다. 삼성은 꽃다발과 함께 선수 전원이 서장훈과 사진 촬영에 임했다. 그런가 하면 전자랜드는 기념촬영은 물론, 금판 명함, 사인 유니폼이 담긴 액자까지 선물했다.
서장훈의 데뷔 구단인 SK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SK는 아예 영상까지 준비했다. 서장훈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 팬들은 물론, SK 구단 관계자들도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듯 각 구단들의 아낌없는 배려로 서장훈의 은퇴 분위기가 고조될 수 있었다. 이는 19일 부산사직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의 감동적인 마무리로 이어졌다.
은퇴 문화, 이제 바뀌어야 할 때
그동안 국내 프로농구에서는 선수들의 팀 이적이 영광스러운 은퇴를 가로막는 요소가 되어왔다. 그러나 서장훈만큼은 다르다. 여러 구단에 몸담으며 팬들과 추억을 나눈 것이 은퇴 분위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서장훈의 이번 은퇴는 척박한 노장선수들의 은퇴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장훈 은퇴를 함께 빛내려 노력하는 구단들의 분위기와 달리, 연맹(KBL)은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해 아쉬움을 남겼다. KBL 관계자들이 참석하긴 했지만 다음날 열리는 미디어데이 준비를 이유로 정작 은퇴식이 채 치러지기도 전에 자리를 떠 다시 한 번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미 KBL은 레전드 올스타전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와중에 정작 리빙 레전드인 서장훈을 기념하는 행사는 철저히 배제해 실망을 남긴 전례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장훈의 은퇴식이 열리던 날,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농구 섹션은 서장훈 관련 기사, 각종 영상들로 알차게 꾸며졌다. 반면, KBL 홈페이지에는 일반적인 기사 링크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살아있는 전설’, 서장훈 덕분에 모처럼 훈훈해진 농구계였지만 이속에서 초를 치는 KBL의 무관심한 반응은 팬들의 질타를 받아 마땅했다.
서장훈 은퇴 메시지 전문(3월 21일, 은퇴기자회견)
안녕하세요. 서장훈입니다.
저는 오늘로서 27년간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으려 합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농구코트는 저에게 편안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습니다.
잘 하지 못했어도 코트 안에 있으면 그 어느 때보다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오늘로서 27년간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으려 합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농구코트는 저에게 편안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습니다.
잘 하지 못했어도 코트 안에 있으면 그 어느 때보다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너무 많은 관심을 받게 됐고 그 많은 관심은 제가 농구에서 느꼈던 행복을 무거운 부담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항상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이 저를 누르고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게 되다 보니 승부에 더 집작하고 걱정했습니다.
누구보다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제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조금 과한 저의 모습들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 한없이 부족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오랫동안 봐주느라 힘드셨을 농구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해줬던 모든 동료 선수들, 감독님, 코치님, 모든 농구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 옆에서 늘 힘이 되어 준 친구, 선후배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오랫동안 봐주느라 힘드셨을 농구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해줬던 모든 동료 선수들, 감독님, 코치님, 모든 농구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 옆에서 늘 힘이 되어 준 친구, 선후배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전창진 감독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KT 구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또 저의 모든 가족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농구가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떠나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뒤에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뒤에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앞으로 살면서 저는 명예를 더 얻으려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돈을 더 벌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오랫동안 좋은 꿈 잘 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