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작별인사가 너무 늦은 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누 지노빌리가 은퇴를 선언한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핑계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노빌리의 은퇴 소식을 접한 뒤 치민 아쉬움을 추스르는 데에만 하루가 걸렸다. 그러고 나니 코트 위의 지노빌리를 기억하는 기사를 꼭 쓰고 싶었다. 그 기사는 결코 대강 쓴 것이 아니어야 했다. NBA에서 16년, 프로 무대에서 23년을 헌신한 지노빌리의 성실한 커리어처럼, 그를 추억하는 기사 역시 어느 정도는 성실할 필요가 있었다. 지노빌리가 은퇴를 발표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 기사를 뒤늦게 여러분께 전하는 이유다.

마누 지노빌리가 은퇴했다. 지노빌리는 지난 8월 28일(이하 한국시간) 트위터를 통해 2017-18시즌을 끝으로 농구 코트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전현직 선수들이 지노빌리의 퇴장에 박수를 보냈다. 샌안토니오의 레전드이자 지노빌리와 함께 한 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데이비드 로빈슨은 ‘Gracias’(감사합니다를 뜻하는 스페인어)라는 말과 함께 지노빌리의 은퇴 소식을 맞이했다.

지노빌리를 코트에서 수없이 상대했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노빌리,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이며 내가 상대한 최고의 적수 중 한 명이었다. 농구 이후의 삶을 즐기길 바란다.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자격이 있다’라고 했다.

보스턴의 고든 헤이워드는 자신의 등번호가 20번인 이유 중 하나가 지노빌리가 20번을 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 폴, 드웨인 웨이드, 스테픈 커리, 아이재아 토마스, 루디 고베어 등의 선수들이 지노빌리의 은퇴를 아쉬워하고 동시에 축하했다. NBA노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지금부터 위대한 슈팅가드, 마누 지노빌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 마이클 조던을 사랑한 아르헨티나의 빼빼 마른 소년

삶의 많은 부분은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거스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많다. 마누 지노빌리도 마찬가지였다.

지노빌리의 조국은 아르헨티나다. 모든 사람이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열광하는 곳이다. 지노빌리가 태어난 이듬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월드컵이 열렸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1986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는 두 번째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지노빌리가 만 9살이 되던 해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르헨티나 소년이 축구가 아닌 다른 스포츠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지노빌리의 마음을 빼앗은 곳은 그라운드가 아닌 코트였다. 지노빌리의 아버지 호르헤 지노빌리의 말에 따르면 지노빌리는 어린 시절 조금의 고민도 없이 축구공이 아닌 농구공을 잡았다고 한다.

이유가 있었다. 지노빌리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농구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지역 유소년 농구 팀의 운영자이자 코치였고, 두 형은 모두 농구 선수였다. 제아무리 축구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어린 지노빌리에게는 농구가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지노빌리에게 농구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지노빌리의 어린 시절 우상은 마이클 조던이었다. 아버지의 친구가 미국 출장을 갈 때마다 마이클 조던의 영상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선물로 사왔고, 지노빌리는 그 테이프를 필름이 늘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지노빌리의 방은 마이클 조던의 포스터로 도배돼 있었다.

하지만 조던을 꿈꾸며 최고를 꿈꿨던 것과 달리 현실은 지노빌리에게 냉혹했다. 지노빌리는 두 형처럼 키가 크지도, 체구가 좋지도 않았다. 지노빌리는 집안에서 가장 마르고 작은 소년이었다. 농구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지노빌리의 어린 시절 고향 친구이자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대표팀 동료로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페페 산체스는 “우리 지역에 지노빌리보다 잘하는 선수만 최소 15명은 있었다”라며 지노빌리의 어린 시절 실력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지노빌리는 그 지역 올스타에도 뽑히지 못했을 정도로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유망주였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마르고 작은 지노빌리에게도 매우 특별한 재능이 하나 있었다. 지는 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엄청난 승부욕이었다.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어린 시절 지노빌리는 첫째 형 리안드로가 이끄는 팀과 맞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형과의 맞대결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노빌리는 고학년이었던 리안드로와의 매치업에서 참패한 것은 물론 팀도 패했다고 한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득점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제가 마누를 엄청 잘 막기도 했고요” 리안드로의 말이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찾아온 두 번째 맞대결에서 지노빌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엄청나게 재빠른 몸놀림으로 형의 수비를 농락하며 팀 승리를 이끈 것이다.

“바로 다음 시즌에 마누를 또 만났는데, 막는 게 아예 불가능했어요. 그때는 마누의 움직임이 갑자기 너무 빨라져서 작은 목욕탕에서도 마누가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 잡기 힘든 지경이었죠”

실제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승부욕은 지노빌리를 성장케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샌안토니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2007년 샌안토니오 지역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노빌리의 승부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아마도 지노빌리는 내가 경험한 모든 사람 중 가장 경쟁심이 강한 사람일 것이다.(probably the most competitive person I've ever been around)” 

평범한 유소년 유망주 지노빌리는 강한 승부욕을 바탕으로 ‘폭풍 성장’했다. 20살이던 1997년에는 아르헨티나 21세 이하 대표팀에 입성했고, 1998년에는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어린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지노빌리가 속한 아르헨티나는 2002년 세계선수권(현 농구월드컵)에서 미국을 꺾는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이변은 2년 뒤에도 반복됐다. 지노빌리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는 아테네 올림픽 4강전에서 팀 던컨, 앨런 아이버슨,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등이 이끄는 미국 대표팀을 또 한 번 누르는 대형 사고를 친다. 결국 아테네에서 아르헨티나는 사상 첫 올림픽 농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미국이 NBA 선수들을 올림픽에 내보내기 시작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비(非)미국 팀이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제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지노빌리의 모습에 샌안토니오 구단은 물론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크게 고무되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ESPN의 보도에 따르면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2002년 세계선수권에 미국 대표팀 코치로 참가했다가 지노빌리의 플레이를 처음으로 눈으로 봤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포포비치는 팀 던컨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후문이다.

“조만간 지노빌리라는 녀석이 우리 팀에 올 거야. 미국의 어떤 사람도 그 녀석이 얼마나 잘하는지 잘 몰라”

 

▶ 역대 최고의 스틸픽 혹은 행운

1999년 NBA 드래프트는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풍년 드래프트였다. 엘튼 브랜드, 스티브 프랜시스, 배런 데이비스, 라마 오덤, 리차드 해밀턴, 숀 메리언, 안드레 밀러, 제이슨 테리, 론 아테스트 그리고 안드레이 키릴렌코까지. 이름만으로도 NBA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왕년의 스타들이 1999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 드래프트가 낳은 최고의 스타는 배런 데이비스도, 라마 오덤도, 숀 메리언도 아니었다. 2라운드 전체 57순위로 지명된 마누 지노빌리였다.

당시 NBA는 29개 구단 체제로 운영됐다. 2라운드까지 진행되는 드래프트의 마지막 지명 순위는 58순위였다. 이 드래프트에서 지노빌리는 끝에서 2번째인 57순위에서 이름이 불렸다. 당시 샌안토니오의 스카우트팀 팀장이었으며 현재는 샌안토니오 단장으로 일하고 있는 R.C. 뷰포드는 지노빌리를 지명한 것에 대해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어림짐작이었어요.(wild guess)”

인터넷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지금은 미국은 물론 유럽의 유망주들의 플레이도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당장 유튜브만 들어가도 유럽에서 주목받은 10대 유망주들의 영상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일반 팬들도 유망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경기 영상을 꾸준히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1999년의 상황은 달랐다. 직접 발품을 팔지 않는 이상 유럽에 있는 낯선 유망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심지어 당시 NBA는 유럽 혹은 남미 선수의 영향력이 매우 약하던 시절이었다. 미국 본토에 더 촉망받는 유망주들이 넘쳐나는데, 생소한 이름의 비미국인 유망주를 스카우팅하기 위해 먼 유럽까지 스카우터를 파견하는 일은 ‘가성비’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샌안토니오가 마누 지노빌리를 2라운드 57순위로 지명하고 몇 년 후 팀의 새로운 간판스타로 성장시킨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샌안토니오와 지노빌리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샌안토니오의 스카우터였던 뷰포드 단장은 호주에서 열린 21세 이하 세계선수권을 보러 갔다가 지노빌리라는 선수를 처음 알게 됐다.

“호주에 간 것도 다른 선수를 보기 위해서였어요. 그때만 해도 마누 지노빌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죠”

“지노빌리에 대한 첫 인상이요? 미친 짓을 하는 야생마 같았어요. 어떤 플레이는 말이 됐지만, 어떤 플레이는 아예 말이 되지 않았죠” ESPN과의 인터뷰에서 뷰포드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샌안토니오는 도대체 왜 마누 지노빌리를 지명한 걸까? 그 답은 1999년 드래프트 당시 샌안토니오가 처해 있었던 상황에 숨어 있다.

1999년 6월 26일, 샌안토니오는 NBA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4승 1패로 꺾고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다. 창단 첫 우승이었다. 당시 샌안토니오의 로스터는 화려했다. 데이비드 로빈슨, 팀 던컨을 비롯해 션 엘리엇, 에이브리 존슨, 마리오 엘리, 스티브 커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샌안토니오 프런트는 이 우승 멤버를 그대로 지키길 원했다. 리그 2연패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과 닷새 앞으로 다가온 신인 드래프트는 고민거리였다. 29순위 지명권으로 뽑은 루키와 곧바로 계약할 경우 샐러리캡에 부담이 생기고 결국 로스터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명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샌안토니오는 결국 재밌는 전략을 세운다. 당장 NBA에 데뷔하지 않을 비미국인 유망주를 지명하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알박기’라는 은어로 NBA 팬들에게 매우 익숙한 드래프트 전략을 당시 샌안토니오는 우승 로스터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드래프트 당일 샌안토니오는 29순위로 지명한 미국인 유망주 리온 스미스를 댈러스에 넘기고, 그 대가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40순위 유망주 고단 기리첵과 2000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온다. 당시 자국 리그에서 뛰고 있던 기리첵은 NBA 데뷔조차 불투명한 선수였다.

57순위에서도 샌안토니오는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탈리아의 비올라라는 팀에서 뛰고 있었던 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망주를 지명했다. 바로 마누 지노빌리였다. R.C. 뷰포드 스카우트팀 팀장은 2년 전 세계선수권에서 목격한 ‘미친 망아지 같은’ 지노빌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57순위였기에 실패해도 부담이 없는 도박이었다. 무엇보다 지노빌리가 곧바로 NBA에 진출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게 지노빌리는 샌안토니오의 호명을 받았다. 당시에는 정말 사소하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지명이었다. 하지만 훗날 이 지명은 NBA 역사를 크게 뒤바꾸게 된다. 지노빌리는 2002년에 비로소 NBA에 데뷔했고, 이후 샌안토니오는 지노빌리와 함께 4번의 우승(2003, 2005, 2007, 2014)을 더 차지한다.

훗날 「NewsOK」와의 인터뷰에서 뷰포드 단장은 지노빌리를 뽑은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다른 팀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지노빌리를 몰래 염탐하고 지켜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지노빌리를 뽑았고 정말 운이 좋았다. 하지만 지노빌리가 스틸픽이 된 가장 큰 공은 결국 지노빌리 본인에게 있다. 지노빌리가 최고의 선수가 될 때까지 능력을 기르고 스스로 성장해줬다”

지노빌리는 샌안토니오가 자신을 57순위로 지명한 것에 대해 “솔직히 샌안토니오가 운이 좋았던 것은 맞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샌안토니오에 드래프트될 때 내 나이는 22살이었다. 그때의 나는 전혀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지명 후에도 샌안토니오는 내가 유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줬다.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 터프한,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2005년 「워싱턴포스트」는 마누 지노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스퍼스의 지노빌리, 가을의 전설(Legend of Fall)’

이 제목은 ‘fall’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활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였다. ‘fall’은 명사로는 ‘가을’을 뜻한다. 하지만 동사로는 ‘떨어지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칼럼을 발표하며 인용한 의미는 후자였다. 코트 위에 넘어지고 뒹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지노빌리의 터프한 플레이스타일을 설명한 것이었다.

NBA 데뷔 직후 지노빌리는 동료들로부터 ‘El Contusione’라는 이탈리아어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것을 영어로 바꾸면 ‘the contusion’이다. ‘contusion’은 ‘타박상’을 의미한다. 타박상을 입을 정도로 거칠게 코트 바닥으로 넘어지는 플레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최근 ESPN은 지노빌리의 거친 플레이스타일과 관련된 재밌는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2007년 9월,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두고 디펜딩 챔피언 샌안토니오의 트레이닝 캠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그날 샌안토니오 선수들은 자체 연습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노빌리가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루즈볼을 잡기 위해 동료 선수들 위로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부상이 나올 수도 있었던 장면이었다.

이를 지켜본 포포비치 감독은 곧바로 뛰쳐나와 연습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선수들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금 전 지노빌리의 플레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아는가? 바로 간절함이다. 방금 지노빌리의 모습에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리그 2연패에 대한 간절함이 크게 묻어났다. 다른 선수들도 지노빌리처럼 열심히 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던 포포비치는 갑자기 뒤로 돌아 지노빌리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지노빌리, 지금은 젠장할 9월이라고! 시즌이 코앞인 9월에는 제발 그딴 짓 좀 하지마!”

이 에피소드에 대해 던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사실 지노빌리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벌어졌다. 지노빌리에게 제발 좀 진정하라고, 이건 연습일 뿐이라고 타일러야 하는 일이 많았다”

현재 인디애나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네이트 맥밀란 감독은 2005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허슬플레이를 주저하지 않는 지노빌리의 모습에 대해 “큰 부상 없이 커리어를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우려를 표한 적도 있었다.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지노빌리의 플레이스타일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터프하기 때문에 지노빌리가 큰 부상 없이 커리어를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노빌리는 50살이 되면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많이 상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노빌리는 이 같은 우려의 시선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노빌리는 “부상을 걱정하며 뛰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며 결국 은퇴할 때까지 허슬플레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내 플레이스타일이 아닌 다른 플레이스타일로는 어떻게 뛰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부상을 걱정하면서 뛰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지노빌리의 승부욕 강하고 거친 플레이스타일을 포포비치 감독도 매우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9월의 사건’(?)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상에 대한 걱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 승부욕이 강하고, 코트에서 몸을 마구 던지고, 라커룸에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지노빌리의 리더십을 포포비치는 매우 신뢰했다고 한다. 심지어 포포비치는 지노빌리의 플레이를 케빈 가넷과 비교하기도 했다.

“지노빌리나 케빈 가넷처럼 한 팀의 최고의 선수가 그런 심장과 열정을 가지고 뛰면, 모든 선수들이 그 선수를 뒤따르게 된다” 포포비치의 말이다.

지노빌리를 상징하는 또 다른 플레이가 있다. 바로 예측불가능한 창조적인 플레이들이다. 지노빌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슈팅을 던지고 패스를 뿌린다. 이런 지노빌리의 예측 불가능함(unpredictable)은 2000년대 샌안토니오에 신선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지노빌리의 통제된 혼돈(controlled chaos) 같은 플레이가 샌안토니오를 바꾸고 있다. 지노빌리가 오기 전까지 우리 팀은 짜여진 플레이에 집중하는 팀이었다. 지노빌리 같은 선수가 온 덕분에 우리 팀은 매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던컨이 2005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초창기만 해도 지노빌리의 이런 플레이에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지노빌리의 플레이는 창조적인 만큼 실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지노빌리의 위험한 플레이에 포포비치 감독이 깜짝 놀라 그를 혼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오죽하면 포포비치는 당시 샌안토니오 코치로 있었던 마이크 부덴홀저(현 밀워키 감독)에게 “나는 쟤를 코칭하지 못할 것 같아(I don't think I can coach him)”라며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고민 끝에 포포비치가 내린 결정은 지노빌리의 플레이를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내 방식대로 지노빌리를 가르치기보다는 지노빌리가 자신의 방식대로 플레이하도록 두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노빌리는 지노빌리가 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지노빌리의 최대 장점은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지노빌리의 그런 성향을 억지로 제어하려고 한다면, 지노빌리의 모든 플레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노빌리가 이상한 동작으로 스틸을 하든, 하지 말아야 할 때 공격 리바운드를 따려고 달려가든, 혹은 내가 안 된다고 화내며 소리칠 때 3점슛을 던지든, 나는 결국 지노빌리를 계속 뛰게 할 것이다.”

 

▶ 역대 최고의 식스맨

마누 지노빌리는 농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식스맨이라는 보직의 개념을 크게 바꿔놓았다.

지노빌리 이전까지만 해도 NBA에서 식스맨은 ‘주전이 아닌 선수’를 의미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좋은 득점력을 자랑하는 식스맨들은 등장했다. 바비 잭슨(2003년 새크라멘토), 리안드로 발보사(2007년 피닉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주전급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굳이 식스맨으로 뛰는 경우는 없었다. 지노빌리는 그 첫 사례였다.

지노빌리는 2004-05시즌과 2005-06시즌에 대부분의 경기를 선발 출전하며 샌안토니오의 핵심 선수로 확실히 인정받는다. 하지만 2006-07시즌에 갑자기 식스맨으로 변신한 지노빌리는 단 36경기만 선발 출전(총 74경기 출전)하면서 평균 15.1점을 기록한다. 이 시즌 그의 평균 출전 시간은 27.5분이었다. 

2007-08시즌에는 상황이 더 재밌게 흘러갔다. 지노빌리는 총 74경기 중에 23경기만 선발 출전했다. 그런데 평균 출전 시간은 31.0분에 육박했다. 평균 기록은 19.5점 4.8리바운드 4.5어시스트 1.5스틸이었다. 누가 봐도 스타급 플레이어의 활약이었다. 하지만 지노빌리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코트에 나서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가 벤치에서 출전해 세컨 유닛(second unit) 싸움에서 우위를 만들어내는 ‘벤치 에이스’ 역할을 하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경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지노빌리를 코트에 세웠다. 말 그대로 '무늬만 식스맨'인 주전급 선수였다.

결국 지노빌리는 2008년에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다. NBA 올해의 식스맨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올-NBA 서드 팀에도 입성한 것이다. NBA 역사상 올해의 식스맨상을 수상한 선수가 그 해에 올-NBA 팀에도 이름을 올린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노빌리가 최초였다. 그리고 지노빌리 이후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선수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2008년의 지노빌리가 얼마나 위대한 식스맨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최고의 농구 데이터 분석 칼럼 페이지로 평가받고 있는 <나일론 칼큘러스(The Nylon Calculas)>라는 사이트에는 지노빌리의 은퇴 발표 이후 다음과 같은 제목의 칼럼이 게재되기도 했다.

‘마누 지노빌리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벤치 플레이어다. 심지어 압도적인 차이로 말이다’

<나일론 칼큘러스>는 역대 식스맨들의 커리어 승수 기여 누적치(Career Wins Added), 커리어 임팩트 플러스-마이너스(Career PIPM) 기록을 도출했는데, 그 결과 지노빌리는 보스턴의 전설 케빈 맥헤일을 제치고 두 부문 모두 압도적인 1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왕년의 가장 잘 나갔던 식스맨들도 지노빌리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지노빌리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커리어의 마지막 시즌에도 식스맨 지노빌리는 샌안토니오를 수차례 위기에서 구해냈다. 팀 던컨이 은퇴하고, 카와이 레너드가 전력에서 이탈했으며, 최고의 동료였던 토니 파커가 노쇠화를 겪는 상황에서 지노빌리는 벤치에서 영리하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통해 샌안토니오의 승리를 이끌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골든스테이트를 상대로 분전을 펼치며 팀의 스윕패를 막기도 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올여름 지노빌리는 그렉 포포비치 감독에게 “계속 뛰는 것보다는 은퇴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라고 미리 말한 뒤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떠났다고 한다. 휴가를 보낸 후 샌안토니오로 돌아온 지노빌리는 첫 훈련에서 지난 시즌의 피로도가 몸에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고 미련 없이 은퇴 결정을 굳혔다고. 그리고 지노빌리는 월요일을 기다렸다가 포포비치에게 은퇴 결정을 가장 먼저 알린 뒤, 현지 시간으로 월요일 오후에 트위터를 통해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샌안토니오 역대 최고의 슈팅가드가 팬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은퇴 후에도 지노빌리는 여전히 샌안토니오 구단과 교류하며 팀을 도울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더 이상 공격자 파울 유도나 스틸로 샌안토니오의 승리를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가능한 한 샌안토니오에 기여하고 싶다. 아이들도 샌안토니오에서 이미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나는 샌안토니오라는 팀과 프랜차이즈의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내가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샌안토니오를 도울 것이다” 지노빌리의 말이다.

과연 은퇴 이후 지노빌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아르헨티나와 샌안토니오의 전설, 마누 지노빌리의 인생 2막을 우리 모두 지켜볼 필요가 있다.

 

사진 = 마누 지노빌리 인스타그램, NBA 미디어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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