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묻는다!]
승기리의 깔깔인터뷰
바스켓 퀸! 정선민

마이클 조던은 은퇴 번복 후 코트로 돌아와 다시 챔피언에 올랐다. 여기 한국여자농구 무대를 떠난 뒤 중국여자농구마저 지배한 선수가 있다. 아시아를 정복한 ‘바스켓 퀸’, 정선민이 루키를 찾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솔직한 인터뷰를 지금 만나보자!

글ㆍ이승기   사진ㆍ오언석
 
 
[정선민 선수 프로필]
생년월일 1974년 10월 12일(경상남도 마산)
신체조건 185cm, 79kg
프로데뷔 1993년 SKC 농구단
통산평균 19.6점, 7.6리바운드, 4.3어시스트, 1.86스틸
우승경력 9회(신세계 4, 신한은행 5)
MVP  7회
득점왕  7회
리바운드왕 2회
어시스트왕 1회
스틸왕  2회
우수수비상 5회
베스트 5 13회
트리플-더블 13회
주요경력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2000 시드니 올림픽 4강
  2003 WNBA 시애틀 스톰 입단
  WKBL 역대 통산 득점 1위(8,140점)
 
 

[농구선수 정선민]
 
루키_ ren shi ni hen gao xing(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는 배치기가 아니라 ‘루키’에요. 혹시 징기스칸이세요? 왜 아시아를 정복하나요.
정선민 선수(이하 선민)_ 사실 중국에서 뛰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시즌 중에 중국 팀들로부터 꾸준히 연락이 오더라고요. 제가 꼭 필요하다면서요. 계속 거절하고 있었죠. 저는 2011-12시즌을 끝으로 한국프로농구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오는 상태였죠.
정말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 뛴다는 것은) 여러 파장을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었죠.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은퇴한 저를 찾아주는 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어요. “과연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많은 팀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는데 이들의 진심에 제 마음이 서서히 열리더군요. 실제로 ‘저장 파 페스트’라는 팀과는 성사 직전까지 갔었어요.
 
루키_ 그런데 실제로 뛴 팀은 ‘산시 신루이 플레임’이었잖아요.
선민_ 도전 정신 때문이었죠. 사실 저장은 이미 지난 시즌 준우승을 차지했던 강팀이었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됐죠. 팀 성적에 대한 부담은 물론, 장신들이 즐비한 팀에서 제가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었고요.
그런데 산시는 2부 리그에서 이제 갓 1부로 올라온 팀이었어요. 산시 측에서 제게 “우리의 목표는 8강이다. 당신의 경험과 승리에 대한 노하우를 어린 선수들에게 전수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새로운 도전에 대한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성적에 대한 부담도 적고요(웃음).
성장 가능성이 보이고 제가 가세한 이후 팀이 발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결심했죠. 산시 구단주가 한국농구를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어요.
 
루키_ 축하드립니다. 결국 열 손가락에 우승 반지를 모두 채우셨어요. 신세계에서 네 개, 신한은행에서 다섯 개, 중국 산시에서 한 개. 손오공도 드래곤 볼을 이렇게까지 모으지는 못했거든요.
선민_ (웃음)산시에서 우승이 결정되었을 때 한동안 멍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마야 무어를 비롯한 동료들과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죠.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유망주가 많았는데 저를 그렇게 잘 따를 수가 없었어요. 항상 제 방에 놀러 와서 애교를 부리는 등 다정다감하게 대해줬습니다. 통역사에게 배운 한국말로 “언니~ 언니~”하는데 정말 사랑스러웠죠.
그 친구들에게 제일 감동했던 것은 우승을 차지하고 나서였어요. 어린 친구들이 갑자기 오더니 저와 마야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겁니다. “언니와 마야 덕분에 그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라면서요. 팔찌 같은 소소한 선물이었는데 그 어떤 것보다 크게 느껴졌어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웃음).
 
루키_ 중국의 유망주들을 보며 느낀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선민_ 중국의 어린 선수들에게 이런 저런 기술을 가르쳐주면 스펀지처럼 흡수해요. 많이 놀랐습니다. 지적이나 조언을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후배들이 한국에 제법 있거든요. 하지만 이 친구들은 저를 거의 우상숭배 하더라고요(웃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 게 참 예뻤어요.
가끔은 기술 습득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어요.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대항마가 될 테니까요(웃음).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이 어린 친구들이 쑥쑥 성장하는 게 눈에 보여서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신감이 붙으니 발전하는 속도가 엄청나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중국은 농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NBA나 스페인 리그 같은 선진농구에 대한 갈망도 커요. 그러니 매년 발전하잖아요. 세대교체도 사실상 거의 끝난 상태에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어떤가요. 각종 마찰과 불협화음, 준비 부족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 진출에도 실패했어요. 보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루키_ 여자농구 최초로 열린 은퇴 기자회견 때 펑펑 우시는 것을 보고 인간미를 느꼈다는 팬들이 많아요. 저도 어릴 때는 정선민 선수가 로봇인 줄 알았거든요. 너무 잘하니까.
선민_ (웃음)어린 시절에는 솔직히 ‘농구’가 뭔지도 몰랐어요. 키가 커서 우연히 권유를 받았는데 막상 해보니 재밌더라고요. 매일 빵과 우유를 주는 것도 좋았어요(웃음).
처음에는 가드 포지션으로 시작했어요. 할아버지 감독님의 가르침 덕분에 드리블과 패스 등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죠. 그러다 신장이 점점 자라면서 포워드를 맡게 됐습니다. 다른 동작도 연습하며 기량을 닦았죠. 그런데 제가 열심히 훈련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는 게 싫은 거 있죠(웃음).
그래서 선수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체육관 불 꺼놓고 혼자 연습했어요. 그렇다고 엄청 많이 한 건 아니고 딱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곤 했죠. 처음부터 잘했던 것은 절대 아니랍니다.
 
루키_ 유난히 7과 인연이 깊은 것 아시나요? MVP 수상 7회, 득점왕 등극 7회도 모자라 연봉퀸까지 7번이나 차지하셨어요.
선민_ 집에 그동안 받은 트로피를 쭉~ 진열해뒀거든요. 볼 때마다 뿌듯해요. “아,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선수생활을 했구나”하고요.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한 것 같아(웃음).
 
루키_ 이뿐만이 아니에요. 2001 겨울리그에서 르브론 제임스로 활동하셨더라고요. 평균 28.4점, 10.3리바운드, 6.7어시스트, 2.6스틸, 1.0블록을 기록하며 득점상, 자유투상, 리바운드상, 어시스트상을 독식했어요.
선민_ 저는 사실 기록지를 살펴보지 않아요. 기록이야 뭐, 승리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니까요. 경기가 끝나면 오늘 안 풀린 부분만 생각하고 다음 경기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도록 하지 않도록 그 부분만 집중 연습했었죠.
(팀 던컨이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와, 정말요? 그래서 제가 던컨을 좋아한다니까요! 간혹 기록만 생각하다가 경기를 그르치는 후배들이 있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에요.
아무튼, 당시 저는 농구에 완전히 미쳐있을 때였어요. 무릎 부상 이후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우울증까지 왔었죠. 성적이 떨어진 팀을 위해서 정말 미친 듯이 훈련하고 재활에 임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개인 수상의 영예와 함께 우승까지 독식할 수 있었어요.
 
루키_ 2002 겨울리그에서는 BEST 5, 득점상, 스틸상, 자유투상, 정규리그 MVP, 우수수비상까지 수상했습니다. MVP, 득점왕인 동시에 수비왕이라니! 이는 한국프로농구 역사에서 유일무이하죠. NBA에서는 마이클 조던만이 달성한 바 있고요. 농구계의 자웅동체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선민_ (웃음)농구의 기본은 수비니까 절대 게을리 하면 안 돼요. 공격이 풀리지 않으면 수비부터 하나씩 만들어 가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고 덕분에 개인 수상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루키_ 프로통산 트리플-더블을 총 13회 기록하셨는데 이게 남녀농구 통틀어서 1위인 것 아세요? 남자농구 1위는 앨버트 화이트의 10개에요.
선민_ 와, 전혀 몰랐어요! 이런 기록들은 다 어디서 찾으시는 거예요? 진짜 루키 사서 봐야겠네요.
 
루키_ 언론이 정은순 선수와 비교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손사래를 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본인이 꼽는 선수생활 최대의 라이벌은 누구인가요.
선민_ 은순 언니는 진짜 최고의 센터였죠. 당시 언론에서 저희 둘을 라이벌 구도로 몰고 갔는데 실제로는 늘 제가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었어요. 비록 포지션은 달랐지만 언니에게 배울 점도 무척 많았고요.
선수생활 동안 라이벌은 딱히 없었어요. 그냥 매 시즌 부족한 점을 채워갔을 뿐이었죠. 중거리 슛 위주의 경기를 하다가 차기 시즌에는 인사이드 게임을 익히고 그 다음 시즌에는 골밑에 더블-팀이 왔을 때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꼭 기사에 “내 라이벌은 정선민 나 자신!”하고 나오던데(웃음).
 
루키_ 이런, 들켰네요. 급하게 화제를 바꿔볼게요. 선수생활을 통틀어 최고의 동료는 누구였습니까?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동료가 누구인지 궁금해요.
선민_ 최고의 동료는 전주원 언니! 주원 언니만큼 잘하는 가드는 못 봤어요. 정말 최고였어요. 호흡도 잘 맞았고요. 박정은 선수와 꼭 한 번 같이 뛰고 싶었는데 결국 안 되더라고요. 제가 킥-아웃 패스를 해주고 정은이가 3점슛을 넣는다면 정말 멋질 것 같지 않나요?
 
루키_ 김태술 선수는 예전 루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농구를 제일 잘했던 시기는 대학교 3학년 때”라 말했거든요. 정선민 선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선민_ (잠시 고민하더니) 아무래도 신한은행 때였던 것 같네요. SKC나 신세계 시절보다 더 노련해졌고 승리하는 법을 알게 된 시기였어요. 만장일치 MVP도 두 번이나 수상했고요. 정말 재밌고 즐겁게 농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루키_ 많은 팬들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강의 감동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전주원-양정옥-박정은-정선민-정은순으로 이어지는 주전 멤버는 “다시 보기 힘든 최고의 라인업”이라는 평까지 들었잖아요.
선민_ 제 선수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에요. 국민 여러분이 워낙 큰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아, 시드니 대표팀 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어요. 한 번은 은순 언니 방에 놀러갔는데 “선민아, 이제는 네가 중심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언론에서 워낙 라이벌 구도로 몰아가니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경계도 했다”며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셨어요. 언니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신경이 쓰이셨을 거예요.
사실 그동안 은순 언니를 많이 어려워했거든요. 그런데 속 깊은 이야기를 하셔서 많이 놀랐어요. 그날 서로 허심탄회하게 속풀이 토크를 하면서 굉장히 친해질 수 있었답니다.
 
루키_ 코비 브라이언트가 “2012 대표팀이 1992년 원조 드림팀을 이길 수 있다”고 발언해 큰 화제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여자농구 대표팀과 2000년 시드니 대표팀이 가상 대결을 펼친다면 누가 승리할까요.
선민_ 1984년이면 제가 농구를 시작하기도 전이네요. 그때 올림픽 농구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웃음). 잘 알아야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잖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박찬숙, 성정아 등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많이 뛰셨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비의 그 발언은 저도 들었거든요. 당시 많은 레전드 선수들이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저도 1992년 드림팀이 이길 것이라 봐요. 농구는 제공권 싸움이니까요.
 
루키_ WNBA의 슈퍼스타 로렌 잭슨은 삼성생명에서 뛰던 시절, “변연하와 정선민은 WNBA에서도 통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정선민 선수는 2003년 국내 최초로 WNBA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썼어요.
선민_ WNBA에 지명되었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트라이-아웃을 비롯해 각종 힘든 훈련, 경쟁을 거쳐 최종 로스터에 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경쟁을 펼치기 때문이에요.
최종 로스터에 들어 WNBA 선수가 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어요. 그 대단한 선수들이 뛰는 무대에서 같이 숨을 쉴 수 있다니! 각 구단의 전통과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죠. 3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WNBA에서 뛴다는 게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에서는 기록에만 초점을 맞춰서 부진하다는 기사를 쏟아냈어요. 결과에만 신경을 썼지 숨은 노력은 전혀 봐주지 않았죠. 그게 속상했어요. 그래서 3년 계약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루키_ 2007년, 김계령 선수가 피닉스 머큐리에 입단했으나 곧 방출된 적이 있죠. 2008년에는 최윤아 선수의 WNBA 진출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습니다. 후배들 가운데 WNBA 진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도 있나요? 그에 대한 조언도 부탁드릴게요.
선민_ 글쎄요. 일단은 뭔가를 이뤄놓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저 같은 경우, 국내 무대는 물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은 덕분에 WNBA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후배들은 국제 대회에서 뭔가를 보여주며 기반을 다지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국제 대회 경쟁력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 상태니까요. WNBA 진출은 그 다음 얘기죠.
 
루키_ 만약 20살 때 WNBA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면 도전했을까요.
선민_ 당연하죠. 20살 때라면 무조건 도전했을 겁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을 것 같아요. 그 나이에 WNBA에 진출했다면 현재의 제 커리어는 없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저는 상관없이 도전했을 겁니다.
 
루키_ 농구선수 정선민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선수였을까요? 또 앞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선민_ ‘한국여자농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먼 훗날 사람들이 “옛날에 정선민이 참 잘했는데~”하고 추억할 수 있는 그런 선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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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선민]

루키_ 인터뷰 스타일이 화제에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화법, 꾸밈없고 솔직한 인터뷰가 팬들의 호평을 얻고 있어요. 농구계, 혹은 후배들에게 쓴 소리도 거침없이 하시던데요.
선민_ 프로 선수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는 인터뷰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배들도 그런 능력을 길렀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쓴 소리인가요? 저는 정말 필요한 말을 했을 뿐인데. 물론, 제 이미지 상 조금 세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요.
 
루키_ 팬들이 정선민 선수보고 “해설자로 활동하라”고 난리에요. 워낙 달변이시잖아요.
선민_ 그런데 저는 해설하면 감정을 못 숨겨서 안 돼요. 지난번에 일본 대표팀에게 질 때 어찌나 속상하던지. (그때 톤 자체가 완전히 가라앉으시던데요?) 그러니까요. 티 많이 났죠?(웃음) 해설은 루키의 조현일 편집장이 참 재밌게 잘하시죠. 정말 광팬이에요. NBA 중계 매번 즐겁게 시청하고 있어요.
 
루키_ “드세 보이는 여장부 캐릭터와는 달리 실제로는 여린 심성을 지녔다”고 자평하신 적이 있는데요.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선민_ 에이~ 제가 얼마나 섬세한데요. 이미지는 강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척 여린 편이에요. 상처도 잘 받고요. 코트 안에서와 밖에서의 성격이 다르답니다.
 
루키_ 정선민 선수의 SNS에 들어가기가 겁이 나요. 온통 핑크빛이라서요. 사랑전도사로 활동하시는 줄 알았어요.
선민_ 깔깔깔~ (수줍어하며)저도 여자거든요? 핑크빛으로 도배하면 안 되나요? 남자친구와는 2년 가까이 만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혼 이야기가 나온 것은 없어요. 팬들께서는 빨리 결혼하라고 하시지만 아직은 연애가 좋아요.
SNS를 통한 소통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선수들은 운동만 하다 보니 사회 경험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인생을 배울 수 있거든요.
 
루키_ NBA도 상당히 즐겨 보시는 걸로 유명하세요. 리키 루비오를 남몰래 흠모하시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선민_ 리키 루비오는 정말 최고에요(웃음). 호리호리한 체격에 잘 생긴 선수가 농구까지 잘 하잖아요. 라존 론도도 몹시 좋아해요. 지난 플레이오프를 보면서 “아이고, 우리 론도가 드디어 경기를 쥐락펴락하는 슈퍼스타가 됐구나”하며 좋아했어요. 루비오와 론도는 둘 다 영리해서 격하게 아낀답니다. 또, 둘 다 등번호가 9번이잖아요? 저 역시 9번이에요(웃음).
 
루키_ 무릎 부상 경력까지 소름끼치게 똑같네요. ‘바클리코드 평행이론’ 기사로 쓸 걸!
선민_ 그러네요! 제가 좋아하는 선수는 까드(필자 주 -농구선수들은 가드를 ‘까드’로 발음합니다)가 많아요. 팀으로는 보스턴 셀틱스나 샌안토니오 스퍼스처럼 꽉 짜인 시스템 농구를 펼치는 팀을 좋아해요. 저처럼 노장들이 많아서 그런지 더 응원하는 맛도 있고(웃음).
 
루키_ 부모님과의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아요. 이번에 귀국하셨을 때도 가장 먼저 고향의 부모님부터 찾아뵈셨잖아요.
선민_ 항상 제 뒷바라지하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분들이에요. 언제나 감사하죠.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아직도 부모님이 해주시는 따뜻한 집밥이 제일 먼저 생각나요.
 
루키_ 레지 밀러는 어린 시절 누나 쉐릴 밀러(여자농구의 전설)와 함께 1대1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잖아요. 하지만 늘 쉐릴에게 처절하게 당했어요. 혹시 정선민 선수도 어린 시절 동생 정훈종 선수를 무참히 짓밟은 것 아니에요?
선민_ 하하하. 짓밟은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1대1 대결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한다고 해도 거의 장난 비슷하게 했죠. 가끔 한 수 지도해주곤 했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가르쳐줬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도 열심히 배우려 했고요.
 
루키_ 취미는 무엇인가요? 농구라고 대답하지는 말아주세요.
선민_ (웃음)농구 맞아요. 농구를 직접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장마다 농구를 보러 다니려 하죠. 그게 제 유일한 취미에요.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 만나러 다니는 것도 좋아합니다. 어쨌든 다 돌아다니는 것이네요. 가만히 집에만 있을 성격은 아닌가 봐요.
 
루키_ 뼛속까지 농구인이시군요. 1993년 SKC 농구단에서 데뷔한 이후 무려 20년 동안 아시아 최정상 선수로 군림했습니다. 혹시 박제인간이세요?
선민_ 그럴 리가요(웃음). 자기관리의 비결은 다른 게 없어요. 쉬는 동안에도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거죠. 등산을 한다든가 자꾸 몸을 움직여서 언제든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에 많은 초점을 맞췄습니다. 한 시즌 끝났다고 해서 유니폼을 벗는 건 아니잖아요. 나태하게 풀어지지 않고 언제나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그게 꾸준히 20년간 정상에서 뛸 수 있었던 비결이에요.
 
루키_ 못 다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선민_ 농구하는 동안 참 살맛났던 것 같습니다. 정말 즐거웠고 개인적으로도 감사한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거든요.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에요. 지루한 일상에서 찾는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앞으로는 선수가 아닌 멋진 여자 정선민으로서 행복하게 농구를 전도하며 살겠습니다. 여자농구뿐만 아니라 한국농구의 발전을 위해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발 벗고 나설 계획이에요. 루키 독자 여러분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파이팅!
 

[팬들이 묻는다!]
 
無用之用님_ SKC 시절부터 팬입니다! 우승하고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해체되어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져 아쉬웠는데요. 용병이 없다고 가정하고 그 당시 실업 팀 SKC가 지금 프로리그에 있다면 챔피언에 등극할 수 있을까요.
선민_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충분히 우승에 도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지민 트리오(유영주-김지윤-정선민)를 비롯해 강현옥, 이종애 등 내/외곽에서 모두 경쟁력을 갖춘 팀이었거든요. 당시 선수들의 기량과 체격이라면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현재 선수들도 잘하기 때문에 확신은 못하겠네요.
 
jwAhn님_ 나중에 자녀들에게 농구를 시키실 건가요.
선민_ 딸이라면 절대 운동은 안 시키려고요. 여자로서 못해보고 산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딸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WNBA에 갈 정도로 타고났다면 모를까(웃음). 아들이라면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이 받쳐줄 경우, 권유해 볼 의향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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