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느낌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 되니 더 묘하다. 2018 프로농구 플레이오프에서 첫 업셋(upset)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KGC인삼공사다.

KGC인삼공사는 2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8 정관장 프로농구 6강 플레이오프 울산 현대모비스와의 4차전에서 99-79 승리, 시리즈를 3승 1패로 가져가며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 시리즈의 최대 화두는 단연 ‘오세근의 건강’이었다. 5라운드부터 발목과 무릎이 좋지 않아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했던 오세근이었다. 1차전에서 32분 26초를 뛰었던 오세근은 21점 차 완패를 당한 2차전에서는 23분 5초 출전에 그치더니, 3차전에서는 경기 시작 2분 30여초만에 왼쪽 발목이 돌아가 코트를 떠났다.

1승 1패 상황에서 맞이한 3차전이었다. 시리즈의 분수령이었고, 당연히 너무나 중요한 경기였다. 오세근의 왼쪽 발목이 돌아가는 것을 느린 화면으로 확인한 많은 사람들은 KGC의 패배를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세근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컸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오세근이 미처 뛰지 못한 3차전의 나머지 32분 30여초, 그리고 오세근이 결장한 4차전의 40분을 합친 72분 30여초 동안 KGC가 현대모비스를 도합 193-157로 압도하며 4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KGC는 오세근의 공백을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김승기 감독에게 그 답이 숨어 있다.

 

‘전성현 활용’ 김승기 감독이 아끼며 성장시켜온 비밀 무기

“어떻게 해도 저는 팬들한테 욕 먹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지난 2월 11일 안양에서 열린 KGC와 DB의 5라운드 맞대결. 경기 전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만난 김승기 감독은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KGC는 당시 4연패에 빠지며 6강 티켓 확보에 적신호가 켜져 있던 상황. 직전 경기에서는 최약체 kt에게 충격적인 15점 차 완패를 당했다.

오세근은 계속 결장 중이었고 양희종은 장염에 걸려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게다가 하필 상대는 13연승 후 갑자기 3연패에 빠지며 독기가 바짝 올라 있었던 DB. 두경민이 빠져 있던 상황이라고 해도 오세근과 양희종이 모두 빠진 KGC가 DB를 이길 것이라고 내다본 이는 많지 않았다. KGC가 아닌 DB의 연패 탈출이 유력해 보이는 경기였다.

하지만 이 경기부터 KGC는 반전을 써내려갔다. 이날 DB에 극적인 2점 차 승리를 거둔 것을 포함해 이후 5연승을 달리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단숨에 확보해버린 것이다.

5연승을 거두는 동안 KGC는 오세근이 코트에 전혀 나서지 않았음에도 전자랜드, SK 같은 플레이오프권 팀들을 연파하며 정규시즌 막판 프로농구 판도를 뒤흔들었다. 이전까지 KGC는 오세근 혹은 사이먼이 없으면 거짓말 같이 무너지는 팀이었다. 하지만 이 연승을 계기로 KGC는 달라졌다. 이재도, 전성현, 한희원의 활용법이 살아나면서 오세근 없이도 경쟁력을 보여주는 팀으로 변모했다. 김승기 감독이 만들어낸 2017-2018 시즌의 작은(?) 반전이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열린 현대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 시리즈. 여기서도 김승기 감독은 사고를 쳤다. 오세근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만수’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현대모비스를 5전 3승제 시리즈에서 홈 이점 없이 눌러버렸다. 3차전과 4차전에서는 점수 차만큼이나 내용 면에서 현대모비스를 확실히 압도했다. 기적적인 업셋이 아니었다. 경기력으로 상대를 완전히 누른 아주 강력한 업셋이었다.

김승기 감독의 준비가 돋보인 시리즈였다. 그가 꺼내든 카드는 올시즌부터 KBL 대표 슈터로 성장할 잠재력을 드러낸 전성현이었다.

김승기 감독은 정규시즌 중에도 전성현을 위한 다양한 패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의 기를 살려왔다.

대부분의 KBL 팀들은 국내 슈터가 중심이 된 전술을 즐겨 쓰지 않는다. 혹여나 쓰더라도 경기 막판 클러치 타임이나, 공격 제한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펼치는 베이스라인 아웃오브바운드 공격 혹은 사이드라인 아웃오브바운드 공격에서만 제한적으로 쓴다.

이유가 있다. 국내 슈터들이 소위 말하는 ‘무빙슛’(사실 무빙슛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콩글리시 농구 용어다. 오프스크린을 통한 캐치앤슛이라고 말하는 게 적합하다. 영어로는 shot on the move 정도가 적절한 표현이다.)에 능한 경우가 많지 않거니와, 더 확실하고 안정적인 옵션인 외국인 선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빙슛’은 볼 없이 많은 움직임을 가져가야 하는 만큼 체력 소모가 심하다. 무엇보다 패스를 받는 타이밍에 맞춰 스텝을 밟는 기술이 매우 능숙해야 한다. NBA의 스테픈 커리, 클레이 탐슨 같은 최고의 슈터들은 패스를 받는 순간 스텝의 보폭, 속도를 경기 상황과 수비수의 움직임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조절함으로서 마크맨을 따돌리고 슛을 던질 공간을 확보한다. 

하지만 KBL에서는 이런 ‘기술자 슈터’들이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외국인 선수가 밖으로 빼주는 패스를 그 자리에서 받아서 던지거나, 아주 짧게 코너 혹은 45도로 이동해 받아서 던지는 동작에 국내 슈터들이 익숙해져 있다. 결국 악순환이다. 감독들은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계속 그대로 가고, 거기에 익숙해진 국내 선수들은 슈터로서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굳이 넘보지 않는다.

 

하지만 김승기 감독은 전성현에게 색다른 기회를 줬다. 오세근, 데이비드 사이먼이라는 확실한 골밑 공격 자원, 큐제이 피터슨이라는 기복 있지만 폭발력 있는 외국인 가드 자원이 있음에도 전성현을 위한 오프스크린 전술을 꾸준히 활용하며 전성현이 슈터로서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끔 도왔다.

현대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도 김승기 감독은 전성현을 중요한 카드로 활용했다.

전성현을 양희종, 사이먼과 엘보우 구역 혹은 베이스라인에서 교차시키며 그에게 순간적인 오픈 3점슛 기회를 만들어주는 패턴을 기습적으로 몇 차례 활용했고, 그게 통하는 장면이 나왔다. 유재학 감독이 현대모비스 팀 전체에 업템포와 적극적인 3점슛 시도를 꾸준히 주문해 KGC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면, 김승기 감독은 사이먼에 팀의 중심을 두되 기회만 되면 전성현을 기습적인 전술의 반전 카드로 활용하면서 현대모비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특히 1차전 4쿼터 3분여를 남긴 시점과 2분여를 남긴 시점에 잇따라 나온 전성현의 연속 3점슛은 이번 시리즈에서 김승기 감독의 전성현 활용법을 확인할 수 있었던 백미 같은 장면이었다.

* 1차전 4쿼터 전성현의 연속 클러치 3점슛 영상:

http://tv.naver.com/v/2879645

이 두 장면에서 김승기 감독은 오세근을 림 정면 3점슛 라인  부근에 위치시키고, 코너에서 오세근에게 달려가는 전성현의 움직임에 맞춰 오세근이 핸드오프 패스를 건네며 스크린을 거는 전술을 활용했다.

(영상을 잘 보면 두 장면 모두 오세근이 한 두 차례 드리블을 치면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전성현에게 줄 패스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패스하는 선수의 드리블이 가미된 핸드오프 패스 전술을 ‘드리블 핸드오프’ 줄여서 ‘DHO’ 전술이라고 부른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여기서 오세근은 전성현에게 핸드오프 패스를 건네주는 것 외에도 다른 선택지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마크맨인 함지훈이 전성현을 더 의식하거나 방심하는 것이 보일 경우, 기습적으로 림으로 몸을 돌려서 그대로 오른쪽 돌파를 감행해 레이업 득점을 올려버리는 것이다. NBA 마이애미 히트의 켈리 올리닉이 이런 형태의 기습 공격을 아주 능숙하게 즐겨 쓴다. 오세근도 돌파의 능한 빅맨인만큼 자주 활용 가능한 선택지다.)

물론 오세근의 핸드오프 패스가 나오기 전에 양희종과 전성현이 미리 가져가는 움직임의 디테일은 다소 달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공격의 콘셉트는 동일했다. 사이먼과 더불어 KGC의 가장 강력한 공격 옵션이라 할 수 있는 오세근을 미끼로 활용하면서, 전성현의 오픈 3점슛 기회를 기습적으로 창출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클러치 타임을 위해, 전성현을 클러치 타임의 에이스로 활용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온 작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성현이 여기서 터트린 2방의 3점슛은 1차전은 물론 시리즈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아주 큰 득점이 됐다. 기회를 완벽하게 살린 전성현의 강심장, 그리고 승부처의 전성현 활용법을 잘 준비하고 활용한 김승기 감독의 지략이 완벽한 시너지를 낸 이번 시리즈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4차전 흐름 바꾼 용병술, 김승기 감독은 과소평가 받고 있다

4차전에서는 김승기 감독의 용병술이 돋보였다. 이날 KGC는 3차전의 분위기를 이어가 1쿼터에 현대모비스를 완벽하게 압도했는데, 2쿼터 들어 갑자기 현대모비스에게 추격을 허용하며 위기를 맞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모비스의 2-3 지역방어를 상대로 사이먼의 페인트존 득점은 잘 만들어졌지만 정작 다른 선수들의 점프슛이 계속 림을 빗나가면서 공격이 주춤했다. 둘째로 3차전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였던 마커스 블레이클리가 집중력을 발휘해 2쿼터부터 꾸준히 얼리오펜스의 페인트존 득점을 만들어주면서 KGC 수비를 괴롭혔다.

위기에 몰리자 김승기 감독은 2쿼터 막판부터 라인업에 변화를 줬다. 공격 시에 상대적으로 슈팅 범위가 넓어 2-3 지역방어 공략에 더 용이한 최현민 대신 김승원을 투입했다. 수비에 초점을 둔 선택이었다. 블레이클리의 페인트존 득점 생산을 방해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김승기 감독의 이 선택은 제대로 통했다. 2쿼터까지 3차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던 블레이클리는, 3쿼터부터 페인트존 득점 마무리가 크게 흔들렸다. 블레이클리가 마땅히 넣어줘야 할 골밑 득점을 놓치는 장면이 연달아 나오면서 현대모비스의 사기가 내려갔다. 김승원의 안정적인 페인트존 위치 선정과 자신의 실린더를 지키며 림을 보호하는 힘에 밀린 블레이클리는 골밑 득점 실패를 연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2쿼터에 지지부진하던 전성현의 3점슛까지 터지기 시작하면서 KGC는 다시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현대모비스 입장에서 4차전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포인트는 2-3 지역방어 카드의 성공과 블레이클리의 경기력 반등이었다. 때문에 김승기 감독의 김승원 투입이 성공한 3쿼터는 KGC가 현대모비스가 가진 최후의 패마저 빼앗아버린 이 시리즈의 ‘결승 쿼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KGC엔 시리즈 승리에 공헌이 큰 주역들이 또 있다. 페인트존을 완전히 장악하며 현대모비스를 넋 놓게 만들었던 데이비드 사이먼, 수비의 구심점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며 KGC에 발생하는 로테이션 수비 구멍을 메워버린 양희종이다. 이들의 활약과 헌신이 아니었다면 KGC는 짜릿한 업셋을 연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는 훌륭했던 KGC 선수들의 활약만큼 KGC의 업셋을 지휘한 김승기 감독의 역량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마땅한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김승기 감독은 디펜딩 챔피언 팀의 감독임에도 외국인 선수 교체, 선수들의 출전 시간 관리 등에 대한 논란 때문에 실제 만들어낸 성과물만큼 좋은 평가를 그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올시즌도 KGC는 오세근과 데이비드 사이먼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모습을 자주 연출했고, 김승기 감독은 이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5라운드 후반부터 정규시즌 막판까지, 그리고 현대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김승기 감독이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다소 달랐다. 오세근 없이 플레이오프 티켓을 거머쥐었으며, 오세근을 부상으로 또 다시 잃었음에도 현대모비스를 누르고 4경기 만에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KGC는 더 이상 오세근 없이 이기지 못하는 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승기 감독의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

KGC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1위 DB를 만난다. 디온테 버튼과 이상범 감독이 이끄는 올시즌 최고의 팀이다.

KGC에게 어려운 시리즈가 될 것이라는 시선이 많다. 오세근은 향후 2주 동안 코트를 밟지 못할 예정이고, 당연히 이 시리즈는 모든 경기를 결장할 가능성이 높다. 양희종은 체력 문제가 걱정되고 데이비드 사이먼은 공격에서 책임이 너무나 막중하다. 전성현이 빛나고 있지만 큐제이 피터슨은 실책을 남발하는 양날의 검이다. 확실히 KGC에 불리한 시리즈다.

하지만 KGC는 열세로 보였던 현대모비스와의 시리즈에서 오세근 없이 승리하는 아주 소중한 경험을 이미 쌓았다. 김승기 감독과 KGC가 DB와의 4강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농구에 절대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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