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학철 기자] 최근 레이커스에서 2개의 번호가 동시에 영구결번된 코비 브라이언트에 이어 또 한 명의 전설이 영구결번식을 치뤘다. 보스턴에서만 무려 15시즌을 뛰며 ‘The Truth’로 불렸던 폴 피어스가 그 주인공. 지난 시즌 클리퍼스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19년의 NBA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은 피어스의 영구결번 행사는 12일 클리블랜드와의 홈경기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를 맞아 <루키 더 바스켓>은 다사다난했던 그의 커리어를 뒤돌아봤다. (모든 날짜는 한국시간 기준)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2월호에 실린 기사를 수정 및 보완한 것입니다.

 

패기 넘치던 21살의 피어스 “나를 지나친 9개 팀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피어스는 1977년 10월 13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잉글우드 고등학교와 캔자스 대학교를 거친 그는 점차 기량을 갈고 닦으며 NBA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특히 3학년까지 뛴 캔자스 대학 시절에는 매 시즌 자신의 평균 기록을 끌어 올렸다. 1학년 때 평균 11.9점을 기록했던 피어스는 2학년 때 평균 16.3점을 기록한 후 마지막 3학년이 되어서는 평균 20.4점을 올리며 평균 20점 고지를 밟았다. 이후 피어스는 1998년 NBA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 

드래프트에서 피어스는 전체 10순위로 보스턴 셀틱스의 부름을 받는다. 당
초 더 높은 순위에서의 지명을 기대했던 21살의 피어스는 “나를 지나친 9개 팀을 후회하게 해주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피어스는 당시 슛 연습을 할 때마다 자신보다 먼저 지명됐던 선수들의 이름을 되뇌었다고 한다. 그의 무시무시한 승부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표] 폴 피어스에 앞서 지명되었던 9명의 선수들

피어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증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직장 폐쇄로 인해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루키 시즌 48경기에 나선 피어스는 평균 16.5점을 기록하며 빈스 카터(18.3점)에 이어 루키들 중 평균 득점 2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아쉽게 신인왕 투표에서 3위에 머물며 카터에게 신인왕을 내줬지만 대신 올-루키 퍼스트팀에 당당히 선정되었다. 참고로 당시 1순위 지명자였던 마이클 올로워캔디는 루키 시즌 45경기에 나서 평균 8.9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후 미네소타를 거친 그는 보스턴에서도 피어스와 2시즌을 뛰었으나 별다른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채 2006-07시즌을 끝으로 NBA 무대를 떠난다. 

직장 폐쇄를 벗어나 정상적으로 치러진 2년차 시즌. 피어스에게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총 73경기에 나선 피어스는 평균 19.5점을 올렸다. 데뷔 시즌 41.2%에 달했던 3점슛 성공률은 34.3%로 하락했으나 대신 2점 야투의 적중률을 끌어 올렸다. 또한 피어스는 이 시즌 평균 2.1개의 스틸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전체 선수들 중 무려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1위 에디 존스: 2.7개).

이후 피어스의 커리어는 탄탄대로였다. 3번째 시즌이던 2000-01시즌, 82경기 모두를 선발로 뛴 그는 평균 25.3점을 기록하며 마침내 평균 20득점 고지를 밟았다. 이 시즌 평균 득점 리그 8위, 득점 총합 4위(2,071점)에 이름을 올린 피어스는 명실상부 보스턴의 에이스로 올라섰다. 또한 그는 ‘이달의 선수’로 선정된 2001년 3월에는 평균 30.3점 7.2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NBA 무대를 휩쓸었다. 

이처럼 3시즌 만에 평균 20점 고지를 정복한 피어스는 2006-07시즌까지 7시즌 연속 평균 20점을 넘겼다. 그 사이 그는 올-NBA 서드 팀에 2차례(2001-02시즌, 2002-03시즌) 선정되었으며 2002년 이후 5시즌 연속 올스타 무대를 밟았다(이후 그는 2번의 올-NBA 팀 경력과 5번의 올스타전 출전 경력을 더했다). 또한 2002년에는 국가대표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피어스의 전성기와 함께 보스턴 역시 조금씩 암흑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94-95시즌 이후 7시즌 연속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하며 플레이오프 나들이에 실패했던 보스턴은 피어스가 평균 26.1점을 기록했던 2001-02시즌 49승 33패를 기록하며 마침내 플레이오프 무대 복귀를 알렸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은 피어스는 1라운드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와 마주했다. 이 시리즈에서 피어스는 30.2점 8.6리바운드 야투율 44.8%, 3점슛 46.5%를 찍으며 30.0점 4.2어시스트 3.6리바운드 야투율 38.1%, 3점슛 33.3%에 머무른 아이버슨을 압도했다. 특히 피어스는 2승 2패로 팽팽히 맞서던 마지막 5차전에서 무려 46점을 퍼부으며 팀을 2라운드 무대로 이끈다. 

2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를 만난 보스턴은 1차전을 내준 이후 내리 4경기를 잡아내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러나 피어스는 이 시리즈에서 평균 20.2점 8.6리바운드 야투율 39.8%에 그치며 1라운드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3점슛 성공률이 8.7%로 처참했다. 이어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보스턴은 뉴저지를 맞아 2승 4패로 아쉽게 패하며 7년 만의 플레이오프 도전을 마무리했다. 

이후 피어스가 이끌던 보스턴은 3시즌 더 플레이오프 무대에 나선다. 그러나 여전히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44승 38패를 기록한 2002-03시즌에는 4승 2패로 인디애나를 꺾으며 1라운드를 통과했으나 2라운드에서 뉴저지에게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4연패로 무너졌다. 이어진 2003-04시즌과 2004-05시즌에는 2번 연속 인디애나에게 1라운드에서 덜미를 잡혔다. 

2005-06시즌과 2006-07시즌에는 아예 플레이오프 무대조차 밟지 못한다. 피어스는 2005-06시즌 26.8점으로 자신의 평균 득점 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정작 팀은 33승 49패에 그친다. 또한 2006-07시즌에는 피어스가 부상으로 47경기밖에 뛰지 못하면서 또 한 번 좌절한다. 

 

‘Big 3' 시대의 첫 포문, 마침내 우승컵에 입맞춤하다

이처럼 ‘원맨팀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한계 속에 피어스의 전성기도 조금씩 낭비되고 있었다. 매년 팀이 하락세를 이어가자 피어스의 인내심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피어스는 대니 에인지 단장에게 당장 팀 전력에 보탬이 되는 선수를 데려올 계획이 없다면, 자신을 컨텐더팀에 트레이드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위기 속에 맞이한 2007년 여름, 보스턴은 단 2건의 트레이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먼저 보스턴은 2007년 뉴욕에서 열린 드래프트 당일 시애틀 슈퍼소닉스(현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서 피어스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레이 알렌을 영입한다. 알렌의 반대급부로 팀을 떠난 선수는 당시 5순위로 지명된 제프 그린과 월리 저비악, 딜론테 웨스트. 또한 보스턴의 2008년 2라운드 티켓도 시애틀로 향했다. 대신 보스턴은 알렌과 함께 35순위로 지명된 글렌 데이비스를 받았다. 

보스턴의 ‘직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알렌의 영입 약 한 달 후 또 하나의 초대형 트레이드가 터졌다. 보스턴이 새롭게 영입한 선수의 이름을 살펴 본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바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외롭게 활약하던 ‘늑대 대장’ 케빈 가넷이었다. 

사실 트레이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에도 보스턴은 미네소타와 가넷 트레이드 합의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가넷이 이를 거절하면서 두 팀의 트레이드는 무산되는 듯 했다. 이후 보스턴이 알렌을 영입하는 것을 확인한 가넷이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두 팀의 결국 성사되었다. 이제는 많은 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게 된 ‘Big 3’가 탄생하게 된 순간이다. 

보스턴은 가넷을 영입하기 위해 무려 7명의 선수를 떠나보냈다. 알 제퍼슨, 라이언 곰스, 테오 라틀리프, 제랄드 그린, 세바스찬 텔페어와 2009년의 1라운드 픽 2장(웨인 엘링턴, 조니 플린 지명)이 그 주인공들. 이번 시즌을 앞두고 휴스턴이 크리스 폴 영입을 위해 8명의 선수를 내어주기 전까지 가넷의 이 트레이드는 한 명의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가장 많은 선수를 내어준 트레이드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전년도 24승에 그치며 리그 최약체에 머물렀던 보스턴은 이 2건의 트레이드로 일약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Big 3’의 호흡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조금씩 양보하며 오직 우승만을 위해 달렸다. 결국 ‘Big 3’ 결성 첫 해, 보스턴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66승을 따낸다. 전년도 대비 무려 42승을 더 추가한 셈인데, 당시 이는 NBA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이었다. 이 시즌 80경기에 나선 피어스는 평균 득점이 19.6점으로 하락하며 7시즌 연속 이어오던 평균 20점 이상 기록을 중단했으나 그에게는 기록보다 팀의 우승이 더 소중한 가치였다.  

그러나 거침이 없던 정규시즌과는 달리 보스턴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조 존슨이 이끌던 애틀랜타와의 1라운드부터 7차전 접전이었다. 다행히 보스턴은 마지막 7차전에서 22점으로 팀 내 최다득점을 올린 피어스를 앞세워 34점차 대승(65-99)을 거둔다.
 
천신만고 끝에 진출한 2라운드에서는 르브론 제임스가 이끌던 클리블랜드가 버티고 있었다. 첫 경기에서 14개의 야투 중 12개를 흘리며 4득점의 굴욕을 맛본 피어스는 4차전까지 평균 12.5점 4.8리바운드 야투율 34.6%에 머물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피어스는 5차전에서 29점 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멋지게 부활했다. 시리즈의 백미가 된 것은 7차전. 또 다시 펼쳐진 끝장 승부에서 피어스는 무려 41점을 퍼부으며 클리블랜드의 도전을 물리쳤다. 르브론 역시 45점을 기록하며 대등하게 맞섰으나 컨퍼런스 파이널 티켓은 97-92로 승리한 보스턴의 차지였다. 

그나마 디트로이트와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6차전 만에 4승을 따내며 대망의 파이널에 올랐다. 1986-87시즌 이후 21년만의 파이널 진출. 피어스 역시 자신의 첫 파이널에 나섰다. 

보스턴의 파이널 상대는 정규시즌 MVP에 빛나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보유한 LA 레이커스였다. 전통의 라이벌 매치에서 보스턴은 1,2차전을 내리 잡아내며 기선을 제압한다. 1차전 무릎 부상 속에서도 코트로 돌아온 피어스는 2경기 평균 25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한 걸음 다가섰다. 

3차전을 내준 보스턴은 4차전에서 무려 24점차 열세를 뒤집으며 97-91로 승리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5차전을 다시 잡아내며 끝까지 보스턴을 물고 늘어졌다. 피어스는 5차전에서 38점을 퍼부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보스턴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은 홈에서 열린 6차전이었다. ‘Big3’가 69점을 합작한 보스턴은 131-92로 레이커스를 완파하며 마침내 우승컵에 입맞춤했다. 피어스, 가넷, 알렌에게는 커리어 첫 우승의 영광스러운 순간. 가넷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눈물과 함께 “Anything is possible!!!” 이라고 포효하며 많은 이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자신의 첫 파이널에서 평균 21.8점 6.3어시스트 4.5리바운드를 기록한 피어스는 파이널 MVP의 주인공이 되었다. 

첫 우승의 달콤함을 맛본 피어스와 보스턴의 ‘Big 3’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승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문턱에서 좌절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구단 최다 연승인 19연승을 기록하며 2연패를 노린 2008-09시즌에는 부상으로 마지막 25경기와 플레이오프를 결장한 가넷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며 2라운드에서 올랜도 매직에게 덜미를 잡힌다. 

이듬해인 2009-10시즌에는 가넷의 복귀와 함께 다시 파이널 무대에 올랐으나 이번에는 레이커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주고 만다. 보스턴은 이후 2시즌에서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예상 밖이었던 트레이드. 그 후..

이처럼 첫 시즌 우승 후 계속해서 우승에 실패한 보스턴의 ‘Big 3’는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걷는다. 가장 먼저 팀을 떠나게 된 이는 알렌. FA로 풀린 2012년 여름, 알렌은 보스턴의 라이벌이었던 마이애미에 새둥지를 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보스턴 동료들에게 아무런 사전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이에 보스턴 선수들도 알렌에게 실망감을 표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보스턴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내 몸에는 녹색 피가 흐른다”며 보스턴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피어스를 ‘냉혈한’ 에인지 단장이 트레이드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피어스의 트레이드와 관련한 소문이 끊임없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보스턴의 팬들에게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피어스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피어스가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 곳은 브루클린이었다. 더불어 에인지 단장은 가넷 역시 피어스와 함께 브루클린으로 떠나보내며 무려 3장의 향후 1라운드 티켓을 거머쥔다. 데뷔 이후 15년을 보스턴에서 뛰며 보스턴의 영원한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을 것 같았던 피어스는 그렇게 허망하게 브루클린으로 떠났다. 구단 통산 2위(24,021점), 3점슛 성공 1위(1,823개), 자유투 성공 1위(6,434개), 스틸 1위(1,583개). 피어스가 보스턴에서 남긴 업적이다.  

뉴저지에서 브루클린으로 연고지를 옮긴지 2번째 시즌을 맞았던 브루클린은 미래를 아낌없이 퍼주며 현재에 올-인했다. ‘데론 윌리엄스-조 존슨-폴 피어스-케빈 가넷-브룩 로페즈’로 이어진 브루클린의 라인업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6세가 된 피어스는 더 이상 예전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75경기를 뛴 피어스의 시즌 성적은 13.5점 4.6리바운드. 평균 득점은 자신의 데뷔 이후 가장 낮은 수치였다. 출전 시간도 커리어 처음으로 20분대(28.0분)에 그쳤다. 결국 야심차게 출발한 브루클린은 플레이오프 2라운드 무대에서 마이애미를 만나 1승 4패로 허망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브루클린에서 1년만을 소화한 후 피어스는 또 다시 워싱턴으로 이적했다. 평균 득점(11.9점)과 출전 시간(26.2분)은 더 떨어졌다. 그렇게 피어스는 점차 팀의 중심에서 조력자로 자신의 역할을 바꿔갔다. 

그러나 보스턴 시절부터 각광받았던 특유의 클러치 능력만은 날카롭게 살아있었다. 애틀랜타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3차전. 피어스는 종료 버저와 동시에 점프슛을 터뜨려 팀에게 103-101의 승리를 안겼다. 당시 데니스 슈로더는 “운이 좋았다”며 애써 정신승리했지만 피어스의 전성기를 똑똑히 기억하는 이들은 아무도 슈로더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어스 역시 “그 친구는 NBA에 데뷔한지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지난 17년 동안 해왔던 것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피어스는 6차전에서 또 한 번 영웅으로 등극할 뻔 했다. 팀이 91-94로 뒤지던 종료 직전, 극적인 동점 버저비터를 꽂았다. 그러나 판독 결과 피어스의 손에서 공이 떠나기 바로 직전에 버저가 울렸고 아쉽게도 피어스의 득점은 무효 처리되고 말았다. 

시즌 종료 후 피어스는 보스턴에서 우승을 합작했던 닥 리버스 감독이 있던 클리퍼스로 또 다시 팀을 옮기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계약 첫 시즌 피어스는 6.1점에 그치며 부진을 면치 못했고 점차 팀의 로테이션에서도 제외되어 갔다. 마지막 시즌 25경기에서 3.2점의 기록을 남긴 피어스는 화려하게 빛났던 자신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피어스의 마지막 시즌이 종료된 후, 보스턴은 피어스의 번호인 34번이 구단의 24번째 영구결번이 될 것이라 발표했다. 또한 지난 7월 피어스와 1일 계약을 맺으며 그가 보스턴 소속으로 은퇴할 수 있게 배려했다. 팀의 ‘레전드’에 대한 대우였다. 이제 피어스와 그의 팬들은 영구결번 행사가 열릴 2월 12일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Side Story

1) 피어스의 대표 별명 ‘The Truth’의 유래는?

피어스하면 떠오르는 별명은 바로 ‘The Truth’다. 이 별명을 지어준 이는 바로 샤킬 오닐. 그는 2001년 3월 14일 자신들과의 경기(112-107 레이커스 승)에서 19개의 야투 중 13개를 적중시키며 42점을 퍼부은 피어스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오닐은 자신을 취재하러 온 보스턴 헤럴드의 스티브 불펫의 노트를 가리키며 “똑똑히 받아적으라”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오닐은 “내 이름은 샤킬 오닐이고 폴 피어스는 진짜다. 그가 잘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폴 피어스는 진짜배기(The Truth)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오닐이 말했던 ‘The Truth’는 그대로 피어스의 멋진 별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 11번이나 칼에 찔리고도 멀쩡히 돌아온 ‘철인’ 

2000년 9월 26일, CNN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스튜어트 가에 있는 버즈 클럽에서 한 청년이 언쟁 끝에 여러 차례 칼에 찔렸다는 것. 그의 이름은 놀랍게도 폴 피어스였다. 

당시 피어스는 목, 얼굴, 배 등 무려 11군데에 상해를 입었다. 곧바로 수술에 돌입한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2000-01시즌 출전은 누가 보더라도 힘들어 보였다. 11월 1일로 예정된 시즌 첫 경기까지는 약 한 달여의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피어스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회복속도를 보였다. 11군데나 칼에 찔리고도 개막전에 맞춰 돌아왔다. 언제 다쳤냐는 듯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에 나선 피어스는 28점을 퍼부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그 시즌 82경기 전 경기 출전의 대업을 이룬 피어스의 기록은 25.3점 6.4리바운드. ‘레전드’의 탄생은 이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진 제공 = 루키 DB, 나이키

일러스트 제공 = 홍기훈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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